릴로

“아가씨……! 영지 안쪽에, 황실의 격문이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라울의 절박한 외침이 마차 내부의 무거운 침묵을 찢었다.

그러나 아델라 에브리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입은 상아빛 륀느 실크 드레스는 마차의 흔들림을 따라 부드러운 파도처럼 장엄하게 일렁였다. 가슴팍에 정교하게 수놓아진 은빛 장미 자수와, 소맷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최고급 드레이프가 사교계의 가장 화려한 티타임을 연상시켰다. 방금 전 결혼식을 파괴하고 도망쳐 온 이의 행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아한 자태였다.

쿵, 쿵, 쿵!

그 우아한 침묵을 비웃듯, 대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차 뒤편, 저 멀리 국경선 너머에서부터 밀려오는 가공할 마력 파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야수들의 폭주가 아니었다.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카르디안 대공가의 정예, ‘청사자 기사단’이 뿜어내는 조직적이고 포악한 마력의 군홧소리였다. 수십 마리의 군마가 내딛는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흔들며 아델라가 탄 마차의 뒤를 매섭게 쫓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지 마세요, 라울.”

아델라가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떨림도 없었다.

그녀는 가죽 시트 옆에 놓인 부서진 펜던트 조각을 가만히 응시했다. 결혼식장에서 제 손으로 던져 깨뜨린, 카르디안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은빛 펜던트였다. 산산조각 난 파편의 단면에서 미세하고 붉은 마력의 실줄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력 추적석.’

율리안이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심어둔 은밀한 족쇄였다. 전생의 그녀라면 대공이 자신을 염려해 준 증표라 여겨 가슴에 품었을 그 기만적인 물건이, 지금은 그저 추악한 감시 장치에 불과했다. 아델라는 그 붉은 실줄기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손가락 끝을 살짝 움직였다.

지면을 울리는 추격대의 마력 파동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공가의 수석 부단장 카셀이 이끄는 선발대의 기세는 마차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사나웠다. 이대로 영지 경계를 넘는다 해도, 그들의 가차 없는 군홧발에 영지 국경은 유린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델라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푸른빛으로 요동치는 에테르 회로가 개방되었다. 영혼의 심처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었다. 거대한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는 합당한 땔감이 필요했다. 에테르 회로의 역설은 언제나 가장 가치 있는 기억과 감정을 가장 먼저 요구하니까.

‘무엇을 태울 것인가.’

아델라는 주저 없이 뇌리의 서랍을 열었다. 회귀 전, 제국 황립 마법학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구축했던 최고위 방어 결계의 보안 약점들. 삼중으로 얽힌 마력 제어식의 치명적인 균열점과, 학회의 원로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마력 흐름의 왜곡 경로에 대한 지식이었다. 제국을 뒤흔들 수 있는 그 비가치적인 정보들이 순식간에 에테르의 푸른 불꽃 속으로 던져졌다.

화르륵!

기억의 파편이 연소하는 순간, 전신을 타고 흐르는 극상의 원소 마력이 폭발적으로 정제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장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여 나가는 감각이 찾아왔다. 머릿속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그가 지어 보이던 다정한 미소의 잔상이 안개처럼 흐려지다 이내 완전히 소멸했다. 율리안 카르디안. 그가 자신에게 지었던 구애의 말들 중 일부가 영원히 지워진 것이다.

하지만 아델라의 입꼬리는 오히려 비틀려 올라갔다. 미련 따위는 사치였다. 잃어버린 감정의 자리에는 오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마력만이 가득 들어찼다.

“전개(展開).”

아델라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이 허공에 기하학적인 마력 궤적을 그리자, 영지 국경을 이루는 흑요석 비석들이 일제히 공명했다.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에브리트 영지의 마력 맥이 아델라의 부름에 응답해 솟구쳤다.

쿠구구구둥!

하늘과 땅을 가르는 거대한 파멸의 소리와 함께, 순백의 마력 장벽이 대지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결계가 아니었다. 황실 마법학회의 정교한 보안 방식을 역이용해 설계한, 그 어떤 마력의 침투도 허용하지 않는 ‘불침의 원소 장벽’이었다.

“전원, 정지! 정지하라!”

뒤를 바짝 쫓던 대공가 기사들의 선두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빛의 장벽은 마치 신이 내린 단절의 벽 같았다. 거친 속도로 달리던 군마들이 앞다리를 치켜들며 거칠게 울부짖었다. 몇몇 기사들은 장벽이 뿜어내는 가공할 풍압에 밀려 말에서 떨어져 흙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게 무슨……!”

추격대를 이끌던 수석 부단장 카셀이 경악에 찬 얼굴로 말에서 내렸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투명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냉기를 뿜어내는 마력의 벽이었다. 장벽 너머로 천천히 멈춰 서는 아델라의 마차가 보였다.

카셀은 다급하게 장벽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검을 뽑아 결계를 타격하려 했으나, 검끝이 닿기도 전에 강력한 반발력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마력의 격차가 이토록 현격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자신들이 고작 영지 국경의 결계 하나에 완전히 가로막힌 것이다.

“에브리트 영애! 아델라 님!”

카셀이 결계 벽에 손을 서둘러 대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만한 대공가의 기사다운 위세는 간데없고, 절박한 애원만이 묻어났다.

“대공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아델라 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발 결계를 열고 대화에 응해 주십시오! 대공가와의 혼약을 이대로 깨뜨리시면 영지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벽 너머,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 발판을 딛고 내려선 그녀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우아한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장벽 너머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한 카셀을 향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오직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한 극도의 무관심만이 서려 있었다.

“카셀 부단장.”

아델라의 목소리가 장벽의 미세한 진동을 타고 카셀의 귓가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낮고, 우아하며,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였다.

“돌아가서 당신들의 주인에게 전하세요.”

그녀는 손끝으로 허공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카르디안 대공이 흘릴 눈물 따위, 내 영지의 흙먼지보다 가치 없다고 말입니다.”

“아델라 님! 제발……!”

“더 이상 내 영토를 더럽히지 마세요. 불청객의 발소리는 이 엄숙한 북부에 어울리지 않으니.”

아델라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파앙!

장벽에서 시작된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대공가의 정예 기사들이 단 한 번의 손짓에 밀려 뒤로 수십 미터나 날아가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그들의 오만한 갑옷이 흙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수석 부단장 카셀 역시 장벽의 위력에 밀려 무릎을 꿇은 채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아델라는 그 비참한 광경에 단 한 번의 눈길도 더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출발하세요, 라울.”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 뒤로 단단히 닫히는 마력 결계의 이중 궤도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디안 대공가의 추격은 이제 완전히 차단되었다.

***

에브리트 영지의 중심부, 영주성에 도착했을 때 마차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삼엄한 긴장감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 은발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청년이 아델라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에브리트 영지의 보좌관이자, 그녀의 가장 충직한 심복인 엘리아스 밴스였다.

“환영합니다, 아델라 아가씨.”

엘리아스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냉철했으나, 그의 시선은 아델라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온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하려는 안도감, 그리고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낯설고도 강력한 마력의 기운에 대한 경계가 교차했다.

아델라는 엘리아스의 부축을 받지 않고 스스로 마차에서 내렸다. 륀느 실크 드레스의 자락이 영주성의 거친 돌바닥에 쓸렸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엘리아스, 상황은?”

“라울이 보고한 대로입니다. 황실의 전령이 다녀갔습니다. 아가씨의 파혼 선언과 대공가와의 결별을 반역적 거사로 규정하고, 영지를 압수수색하겠다는 황태자의 친필 격문이 영주실에 도정되어 있습니다.”

엘리아스가 덤덤하게 말하며 소리 없이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나는 것을 아델라는 놓치지 않았다. 엘리아스는 아델라의 눈동자가 이전과 달리 깊고 푸른 심연처럼 변해 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가 제 목숨을 깎아 마법을 부렸음을 직감한 것이다.

“황태자 레오나르드가 벌써 움직였군요.”

아델라는 영주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복도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오만한 황족들이 에브리트를 자신들의 사냥터로 여긴 모양인데, 착각은 자유죠.”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황실의 격문을 무시하는 것은 제국법상 반역에 해당합니다.”

엘리아스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아델라는 영주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에브리트 가문의 문장 앞에 멈춰 섰다. 성난 늑대가 그려진 가문의 깃발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반역이라뇨, 엘리아스. 나는 그저 내 권리를 되찾으려는 것뿐입니다.”

그녀는 제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었다. 선명한 붉은 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아델라는 그 피 묻은 손가락을 에브리트의 가문 인장에 대고 꾹 눌렀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영지의 가신들과 기사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 아델라 에브리트는, 이 시간부로 에브리트 영지의 정당한 영주이자 지배자임을 선언합니다. 우리 영토에 발을 들이는 그 어떤 황족과 대공가의 발길도, 나의 허락 없이는 반역으로 간주하여 처단할 것입니다.”

피의 서약이 완료되는 순간, 영주성 지하에서부터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영지의 대지가 새로운 주인의 탄생을 인정하며 공명한 것이다. 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에브리트 영주를 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영주성 벽을 흔들었다. 전생에서 그저 대공비라는 화려한 껍데기 속에 갇혀 고사해 가던 아델라가, 마침내 자신의 진짜 왕관을 머리에 얹은 순간이었다.

엘리아스는 무릎을 꿇은 채, 아델라의 서늘한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그 어떤 인간적인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차가웠다. 에테르 회로의 저주가 그녀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기고 있는지, 그는 낱낱이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그녀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지켜내야 하니까.

“영주님, 이제 에브리트는 제국 전체와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아스가 나지막이 고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제국이 우리를 적으로 돌린다면, 우리 역시 제국을 집어삼키면 그만이니까요.”

아델라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영주석에 앉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영주성 대문이 거칠게 열리며, 안도감에 젖어 있던 영주 마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냐!”

엘리아스가 검자루를 잡으며 외쳤다.

영지민들과 경비병들이 사색이 되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혼란스러운 군중 사이를 헤치고,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마당 한가운데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사내의 가슴과 등에는 시커멓게 변색한 화살촉들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억…… 에, 에브리트…….”

사내는 짧은 단명만을 남긴 채, 아델라의 영주석 아래 계단 바로 앞바닥에 툭, 하고 고꾸라졌다.

검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을 더럽히며 빠르게 번져나갔다. 사내의 등에 박힌 화살깃에는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검은 태양 문양과 함께, 지독한 마취 독의 기운이 검은 연기가 되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실의 정예 첩자였다.

아델라는 영주석에서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황실의 음모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게 영지의 심장부까지 뻗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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