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전 09:00 - 주식 시장 개장]

"혜성바이오홀딩스, 개장과 동시에 18% 급락! 매도 대기 물량만 300만 주 돌파!"

테라피아 전용 호출기 위에 떠오른 금융 뉴스 속보는 붉은 피처럼 선명했다.

민태준 이사장이 해외 거대 의료 트러스트인 아산재단의 은예원과 손을 잡고 혜성병원을 고의 도산시키겠다는 계획은 즉각적으로 시장을 강타했다. 악의적인 부도설 찌라시와 채권 회수 불능 뉴스가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자마자, 주식 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의사 선생님, 정말 우리 병원 망하는 겁니까? 월급은 나오는 건가요?" "인수합병 되면 우리 과는 통째로 날아간다던데……."

스테이션 너머로 들려오는 간호사들과 전공의들의 수근거림에는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손끝을 미세하게 떠는 연차들의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비쳤다. 병원의 기둥이 통째로 흔들리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그 어떤 사명감도 모래성처럼 무력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한 의사님."

어느새 다가온 서채윤이 내 가운 소매를 살짝 쥐었다. 평소의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확장된 동공과 가파른 호흡은 내면의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민태준 이사장이 아예 판을 깨려는 모양이에요. 병원의 채무를 고의로 불이행해서 법정관리에 밀어 넣고, 아산재단이 헐값에 강제 인수하게 만들 속셈이에요. 이대로 가면 병원의 모든 의료 인프라가 동결돼요. 환자들의 수술 일정까지 전부 다요!"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대답했다.

"병원이 망하는 게 아니라, 민태준의 주머니가 찢어지는 중이겠지."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시장에 풀린 투매 물량이 벌써 전일 대비 다섯 배가 넘어요. 저들이 작정하고 주가를 폭락시켜서 지분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뒤 우회 매입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확보한 지분도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고요!"

"서 선생."

나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 차가운 안광에 서채윤이 움찔하며 숨을 들이켰다.

"민태준이 집을 불태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냥꾼이 무서워 스스로 쥐구멍에 기어 들어가게 만들려는 수작이지. 하지만 그 늙은 여우는 한 가지를 간과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블릿 PC를 켜며 포트폴리오 화면을 띄웠다.

"이 병원의 진짜 가치는 민태준의 장부상 숫자가 아니라, 내 메스 끝에서 살아 나간 인간들의 목숨값이라는 걸 말이야."

***

[오전 09:45 - 테라피아 전용 접견실]

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푸른빛을 발하며 명멸했다.

[경영 평판 누적 지수: 92,400 SP (보유 중)] [경고: 적광안(赤光眼)의 과도한 사용으로 촉발된 신경 마비 증세를 억제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수 소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저려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붉은 광선으로 신경망을 투시하는 힘은 내 육체를 갉아먹는 칼날과 같다. 이 마비를 누르고 내 영토를 온전히 소유하려면, 지금 이 순간 민태준의 목줄을 완전히 끊어내야만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용 단말기의 암호화된 통신망을 활성화했다.

내가 그동안 이 테라피아 격리 병동에서 살려낸 정재계의 거물들. 쇠약해진 관상동맥을 완벽하게 재건해 준 성일제강의 오 회장, 뇌저동맥류 파열 직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전직 국무총리 김 의원, 그리고 내 정교한 봉합술로 생명을 연장한 수십 명의 자산가들.

그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었다. 내 메스 끝에 목숨을 저당 잡힌,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채권자들이었다.

"한지호 의사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오 회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 의사, 뉴스는 보았네. 혜성병원이 시끄럽더군. 민태준 그 인간이 노망이 난 모양이야."

"그 노망을 치료해 주려 합니다. 자금이 필요합니다. 어설픈 대출이 아니라, 시장의 모든 매물을 일시에 삼켜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화력이 필요합니다."

- "허허, 아주 대담하군. 내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요구하기에는 액수가 제법 클 텐데?"

"회장님의 망가진 심장 근육을 봉합할 때, 저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지금 제 제안에 망설이신다면, 다음번 관상동맥 우회술 우회로가 막힐 때는 다른 의사를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내 신랄하고 거침없는 협박에 수화기 너머에서 찰나의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껄껄거리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지독한 친구군. 좋아, 내 목숨값의 이자라고 생각하지. 성일제강의 우호 지분과 라인들을 동원해 즉시 크레딧을 개통하겠네."

연이어 전직 국무총리를 비롯한 금융가 거물들과의 통화가 이어졌다.

피의 가치산정 지수. 이 차가운 메디컬 자산주의 세계에서 내가 쌓아 올린 평판은 곧 무한한 신용이자 화폐였다. 내가 살려낸 자들의 신뢰와 경영 평판 누적 지수가 연동되며, 단말기 화면 위로 믿을 수 없는 숫자들이 찍히기 시작했다.

[알림: 성일 캐피탈 외 4개 금융 기관 합산 '긴급 자금 긴용 동의' 승인 완료.] [총한도 크레딧 라인 개통: 1,000억 원 (즉시 인출 가능)]

"1,000억이라니……."

지켜보던 서채윤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보는 신도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시장에 투매로 나온 혜성바이오홀딩스 주식을 전부 긁어모은다. 민태준과 은예원이 던지는 족족, 밑바닥에서 우리가 다 받아먹는 거야. 주가가 폭락할수록 우리는 더 싼값에 병원의 지분을 독점하게 된다."

이것이 내 비즈니스다. 적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던진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

***

[오전 10:30 - 테라피아 로비 현관]

"비켜! 당장 안 비켜?!"

테라피아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가죽 가방을 양손에 무겁게 움켜쥔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혜성병원 재무처장 박진우와 강현민의 심복이었던 기획조정실 임원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어디 가십니까, 박 처장님?"

로비 중앙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서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뒤로는 건장한 체구의 병원 자체 경비팀 보안요원 대여섯 명이 바리케이드를 치듯 서 있었다.

"서, 서 선생! 지금 병원이 부도나기 직전이야! 채권단이 들이닥치기 전에 본사 자산을 보존 처분하러 가는 길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비켜!"

박 처장이 가방을 뒤로 숨기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극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자산 보존 처분이 아니라 도주 자금 확보겠지요."

내가 천천히 걸어가며 그들 앞에 섰다. 내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에는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실시간 해외 송금 내역이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이 가방 안에 든 무기명 채권들과 비밀 장부, 그리고 지금 막 싱가포르의 유령 계좌로 송금하려던 120억 원. 전부 강현민이 예전에 은예원에게 넘기려고 조작했던 이중 제약사 리베이트 자금[1]이지?"

박 처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시에 가셨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강현민이 멍청해서 흔적을 남긴 게 아니다. 내가 그놈의 계좌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하고 있었을 뿐이지."

나는 태블릿의 화면을 그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강현민이 은예원에게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익명의 이중 제약사 리베이트 거래 내역과, 해당 자금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는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1] 정보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이 에스크로 계좌의 실소유주 명의는 아산재단 산하의 페이퍼 컴퍼니로 되어 있지만, 최종 인출권자는 바로 당신들로 등록되어 있더군. 병원이 도산하는 틈을 타서 이 비자금을 세탁해 해외로 튀려던 속셈이었겠지."

"이, 이건 모함이야! 증거 있어?!"

임원 중 한 명이 악을 쓰며 내달리려 했다.

찰칵.

그 순간, 로비 유리문이 열리며 짙은 청색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남색 공수처 및 검찰 로고를 본 박 처장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입니다. 박진우 처장님을 비롯한 혜성병원 이사회 임원진 여러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그들의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가죽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며 지퍼가 열렸고, 그 안에서 수십억 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과 이중 계약서 뭉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지호……! 네놈이 우리를 팔아넘겨?!"

질질 끌려가는 박 처장이 나를 향해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 모습을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했지. 이 병원에서 쓸모없는 암세포들은 내 손으로 직접 도려낸다고."

옆에 서 있던 서채윤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적어도 내 방식이 이 병원을 지키는 유일한 최선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는 표정이었다.

***

[오전 11:15 - 이사장실]

쾅!

이사장실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리며 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최고급 카펫 위에는 깨진 양주병과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민태준 이사장은 핏발 선 눈으로 대형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 주식 그래프는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급락하던 주가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수직 상승하여, 오히려 전일 대비 12% 폭등한 상태로 굳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누가 매물을 다 받아 간 거야?! 아산재단에서 던진 물량만 해도 수백만 주인데, 어떻게 주가가 다시 치솟는단 말이냐!"

민태준은 광기에 젖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검푸르게 변해 있었고, 오른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아래로 처지는 안검하수(Ptosis)[4]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샀다."

내 목소리에 민태준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한지호……! 네놈이 무슨 돈으로 그 물량을 삼켜?! 천억이 넘는 돈이다! 일개 의사 나부랭이가 만질 수 있는 액수가 아니야!"

"내가 살려낸 환자들이 기꺼이 내 보증인이 되어주더군. 민태준, 당신이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할 때, 나는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신용을 샀다. 그 차이가 지금 이 결과를 만든 거지."

나는 걸어가 그의 책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취득한 혜성바이오홀딩스의 지분율 현황이 떠 있었다.

[한지호 우호 지분율: 38.4%] [성진의료재단 민태준 지분율: 21.1% (가압류 진행 중)]

"이제 이 병원의 최대 주주는 나다. 당신이 기획한 고의 도산 시나리오는 파산 신청 접수 단계에서 주주총회 특별 결의로 기각될 예정이지. 당신은 이제 이사회에서 완벽하게 축출되었다."

"커흑……! 으, 으윽!"

민태준이 가슴을 움켜쥐며 책상을 짚었다. 그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거친 천명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조용히 내 능력을 개방했다.

'적광안(赤光眼).'

내 시야가 순식간에 흑백으로 반전되며, 민태준의 전신을 흐르는 혈관계가 붉은 광선으로 투사되기 시작했다.

그의 뇌간(Brainstem) 부위, 특히 기저동맥(Basilar artery) 분지점에서 비정상적으로 팽창하여 터질 듯 꿈틀거리는 형광빛 붉은 점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름 4mm 내외의 초미세동맥류(Microaneurysm)[2]였다.

"……역시 대물림이었군."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3년 전, 내가 집도했던 민태준의 친척 수술에서 발견했던 그 기이한 뇌혈관 기형. 그것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 혈관 벽 결함이었다. 민태준 역시 동일한 부위에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친척의 머리를 열었을 때 봤던 것과 똑같은 미세동맥류가 지금 당신 뇌간 기저동맥에서 터지기 직전이다."

"무, 무슨 소릴…… 컥!"

"분노로 인해 수축기 혈압이 210mmHg를 넘어섰군. 얇아진 혈관 벽이 그 압력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민태준의 눈동자가 극도로 축소되며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흐르는 붉은 광선이 기이하게 팽창하더니, 이윽고 불꽃이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비주얼 가이드가 내 시야에 잡혔다.

파열(Rupture).

"아, 아아아아악!"

민태준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목 근육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제뇌강직(Decerebrate rigidity) 반응과 함께, 그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민태준은 사지를 덜덜 떨며 내 구두 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입가를 피로 물들인 채 그가 필사적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가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차 있었다.

급성 뇌간 신경 폐색(Acute brainstem occlusion)[3] 및 뇌간 출혈.

단 10분 이내에 미세 감압술을 집도하지 않으면 즉사하거나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치명적인 상태였다. 그리고 이 병원에서, 아니 이 나라에서 이 고난도의 뇌간 봉합 수술을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외과의는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는 민태준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천천히 주머니에서 수술 동의서와 지분 무상 양도 계약서를 꺼내 그의 눈앞에 펼쳤다.

"살고 싶나, 이사장님?"

내 목소리는 수술실의 무영등 아래 흐르는 공기만큼이나 서늘하고, 무자비했다.

***

[주석] 1.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 거래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3자에게 거래 대금을 예치해 두는 특정 계좌. 본문에서는 이중 리베이트 자금을 은닉하기 위한 가상 계좌로 활용됨. 2. 미세동맥류(Microaneurysm): 모세혈관이나 미세 동맥의 벽이 약해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 터질 경우 치명적인 뇌출혈을 유발함. 3. 급성 뇌간 신경 폐색(Acute brainstem occlusion): 생명 유지 장치를 담당하는 뇌간 부위의 혈관이 급격히 막히거나 터져 발생하는 초응급 질환. 4. 안검하수(Ptosis): 윗눈꺼풀을 올리는 근육의 힘이 약해져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현상. 뇌간 부위의 삼차신경 및 동안신경 압박을 나타내는 전조증상. 5. 동서맥(Sinus Bradycardia): 심장의 박동 수가 분당 60회 이하로 느려지는 상태. 뇌압 상승으로 인한 쿠싱 반사(Cushing reflex)의 일환으로 나타남.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