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살고 싶나, 이사장님?"

내 목소리는 수술실의 무영등 아래 흐르는 공기만큼이나 서늘하고, 무자비했다.

바닥에 쓰러진 민태준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대리석 바닥을 더러운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가는 제뇌강직(Decerebrate rigidity) 반응. 그의 뇌간을 관통하는 혈관들이 한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 시야 속, 그의 머릿속을 타고 흐르는 붉은 광선들이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과부하된 전선처럼 미친 듯이 점멸했다.

"아, 으…… 윽……."

민태준은 헐떡이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이 부르르 떨리며 내가 들고 있는 종이 끝자락을 건드렸다. 성진의료재단 지분 30% 무상 양도 계약서, 그리고 수술 동의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가 쥘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자, 그의 목을 죌 교수대의 밧줄이었다.

"이 서류에 지장을 찍는 순간,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목숨처럼 아끼던 재단의 통제권은 영원히 내 손으로 넘어오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만년필을 그의 손가락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의 엄지손가락을 움켜쥐고 바닥에 고인 그의 피를 묻혔다. 붉은 피가 도장 밥을 대신했다. 계약서의 서명란과 지분 양도 각서의 하단에 민태준의 피 묻은 지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철컥.

서류를 거두어들임과 동시에 나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이송 팀, 10층 이사장실로. 환자는 급성 뇌간 신경 폐색(Acute brainstem occlusion)[4] 및 뇌간 출혈. 산소 투여 준비하고 당장 하이브리드 수술실로 이송해."

민태준의 눈동자가 서서히 위로 뒤집히며 의식을 잃었다. 거구의 몸이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나는 피가 묻은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본 뒤, 그것을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것은 단순한 양도서가 아니다. 혜성대학교병원을 완전히 내 영토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열쇠였다.

***

"민태준 이사장이 쓰러졌다고?"

성진의료재단 본관 12층, 대회의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것은 은예원의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구급차의 붉은 경광등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비단결 같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예, 은 대표님. 방금 전 10층 이사장실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의식 불명 상태로, 사실상 뇌사 상태에 준하는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비서의 보고에 은예원은 슬림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탐욕과 확신이 교차하고 있었다. 민태준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스스로 무너졌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강현민이 준비해 둔 판은 어차피 깨진 항아리였어. 하지만 이사장이 저렇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얘기가 다르지. 지금 당장 임시 주주 총회를 소집해."

"하지만 아직 이사회 내부 조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 이사장 측 우호 지분도……."

"우호 지분?"

은예원이 콧방귀를 꼈다.

"대가리가 날아간 뱀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 민태준이 쥐고 있던 의결권은 지금 이 순간부터 무효나 다름없어. 해외 투자자 연합과 내가 확보한 우회 지분이면 오늘 이 자리에서 성진의료재단의 임시 이사진 전원을 우리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어. 병원을 통째로 아산재단에 귀속시키는 안건도 오늘 통과시킨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테이블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날카롭게 때렸다.

"이 병원은 오늘부로 우리 자산이 되는 거야. 한지호 그 건방진 의사 놈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한낱 칼잡이에 불과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지."

은예원의 명령과 동시에 대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입은 주주들과 이사진들이 속속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민태준의 부재는 그들에게 새로운 권력의 재분배를 의미했다.

***

오후 2시, 성진의료재단 임시 주주 총회장.

"주주 여러분, 그리고 이사 위원회 임원 여러분. 성진의료재단 이사장 민태준의 유고 상황에 따라, 본 재단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임시 이사 임명 및 자산 매각에 관한 총회를 시작하겠어."

단상에 선 은예원이 마이크를 잡고 선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넓은 회의실 안을 지배했다.

"현재 성진의료재단은 방만한 경영과 내부 비리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에 우리 해외 투자자 연합은 재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산재단과의 합병 및 신임 이사진 임명 안건을 상정합니다. 의결 정족수는 충분히 확보되었으므로……."

"누구 마음대로 정족수가 충분하다는 거지?"

회의실 뒤편의 육중한 이중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친 사내, 한지호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차가운 표정의 서채윤과 태블릿 PC를 든 변호인단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은예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지호 선생. 여기는 주주 총회장입니다. 의사 나부랭이가 들어와서 행패를 부릴 곳이 아닙니다. 당장 보안요원들을……."

"보안요원들이 날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주주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커졌다. 나는 품 안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와 태블릿 PC를 꺼내 이사회 석상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류들이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이게 비즈니스라는 거다, 은 대표."

내가 차갑게 받아치며 스크린을 가리켰다. 화면에 거대한 도표와 계좌 내역들이 떠올랐다.

"강현민이 당신에게 전달하려 했던 이중 제약사 리베이트 거래 내역, 그리고 당신들의 자금 세탁용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1] 정보 파일이다. 당신들이 가상 계좌를 통해 재단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려 한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검찰 특수부에 이미 사본이 송부되었다."

회의실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주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은예원의 이성적인 가면이 처음으로 균열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망울이 분노와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흩어진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공중에 들어 보였다.

"민태준 이사장이 쓰러지기 직전, 내게 무상 양도한 성진의료재단 지분 30%의 양도 계약서다. 그리고 여기."

나는 서채윤이 들고 있던 또 다른 서류철을 빼앗아 테이블에 던졌다.

"혜성대학교병원 치료 환자 및 보호자 단체, 그리고 소액 주주들이 내게 위임한 대행 위임장이다. 합계 지분 28%.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총 58%에 달한다."

의결 정족수의 과반을 훌쩍 넘는 수치였다. 은예원이 해외 자본을 끌어모아 확보했다던 지분은 고작 35%에 불과했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였다.

"말도 안 돼…… 민태준이 지분을 넘겼을 리가 없어! 그 탐욕스러운 노인네가!"

은예원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돈보다 목숨이 더 아까운 법이지. 특히 제 자식새끼와 똑같은 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나는 그녀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사장 친척 수술을 집도할 때 간파했던 미세동맥류(Microaneurysm)[3] 흔적. 그것은 민 씨 가문의 치명적인 유전적 혈관 결함이었다. 민태준 역시 나와 마주했을 때 이미 안검하수(Ptosis)[5]와 동서맥(Sinus Bradycardia)[6] 전조증상을 보이고 있었지. 나는 그의 뇌간 신경 폐색 진행 속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을 가장 가치 있게 활용했을 뿐이다."

은예원의 입술이 사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철저하게 지호가 짜놓은 판 위에서 놀아났음을 깨달았다. 강현민을 이용해 병원을 먹으려던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지호가 쥐고 흔든 메디컬 자산주의의 규칙 앞에 무참히 깨져버렸다.

"안건은 부결이다."

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성진의료재단은 아산재단에 매각되지 않는다. 또한, 은예원 대표를 비롯한 해외 투자 세력의 임시 이사 선임 안건 역시 전면 기각한다. 지금 당장 이 신성한 병원에서 나가시지."

"한지호……!"

은예원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이미 판세는 끝난 뒤였다. 주주들은 이미 지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이사진들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압도적인 사이다 공세 앞에, 병원을 집어삼키려던 여우는 결국 꼬리를 내리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

총회장 밖, 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 뒤로 서채윤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가빴다.

"한지호 선생, 정말 이래야만 했어요?"

그녀가 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민 이사장의 목숨을 담보로 지분을 뜯어내고, 그걸로 정치적인 거래를 하다니요. 당신이 말하는 의술이 고작 이런 더러운 권력 다툼의 도구였단 말입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수술실 밖에서 마주하는 그녀의 인도주의는 언제나 눈이 부셨지만, 동시에 지극히 유약했다.

"서채윤 선생."

내 목소리가 복도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당신은 참 숭고해. 하지만 그 숭고함이 저 부패한 이사회와 은예원 같은 하이에나들로부터 환자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나?"

"그렇다고 해서……."

"메디컬 자산 역시 영리한 인간관계를 다루는 예술이야."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돈과 지분이 지배하는 이 병원이라는 영토에서, 힘이 없는 의사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해. 내가 이 병원의 절대적인 주권을 쥐지 못하면, 결국 또 다른 강현민, 또 다른 민태준이 나타나 환자들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거다. 나는 그걸 막으려는 거야. 내 방식대로."

내 눈에 비친 서채윤의 실루엣 너머로, 수많은 환자의 생명선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그것은 내가 지켜야 할 가치이자, 내가 소유해야 할 제국의 벽돌들이었다.

"우리는 이제 수술실로 간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적광안(赤光眼)[2]으로 민태준의 뇌간을 열고, 그를 살려낼 거다. 그가 살아야 우리가 받아낸 지분이 온전한 가치를 발휘하니까. 나와 함께 가겠나, 아니면 거기서 계속 정의 타령만 하고 있을 건가?"

서채윤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녀는 내 비정함에 치를 떨면서도,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본능을 이기지 못했다.

"……갈게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난 당신의 그 차가운 비즈니스를 돕는 게 아니라, 단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유는 상관없어. 결과만 완벽하면 돼."

우리는 하이브리드 수술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수술실 앞, 붉은색 '수술 중' 표시등이 켜지기 직전이었다.

수술 준비를 위해 스크럽을 하려던 찰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내 전담 비서가 복도 모퉁이를 돌며 뛰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호흡은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한, 한지호 교수님!"

비서가 내 곁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귓속말을 건넸다.

"방금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사장 민태준의 바이탈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뇌 호흡이 전면 마비 직전입니다! 지금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수술대에 올리기도 전에 뇌사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재단 관리권 공백이 발생해 지분 양도 계약 자체가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민태준의 생명선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가 죽으면 내가 쥔 지분 30%는 상속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고, 병원 장악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시간이 없었다. 단 1초의 지체도 용납되지 않는 극한의 위기가 다시 한번 내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

[주석] 1.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 거래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3자에게 거래 대금을 예치해 두는 특정 계좌. 본문에서는 이중 리베이트 자금을 은닉하기 위한 가상 계좌로 활용됨. 2. 적광안(赤光眼): 한지호가 가진 신비한 능력으로, 미세 신경 봉합 시 환자의 손상된 신경망을 형광 붉은 실선으로 투시하는 절대적 가이드 능력. 3. 미세동맥류(Microaneurysm): 모세혈관이나 미세 동맥의 벽이 약해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 터질 경우 치명적인 뇌출혈을 유발함. 4. 급성 뇌간 신경 폐색(Acute brainstem occlusion): 생명 유지 장치를 담당하는 뇌간 부위의 혈관이 급격히 막히거나 터져 발생하는 초응급 질환. 5. 안검하수(Ptosis): 윗눈꺼풀을 올리는 근육의 힘이 약해져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현상. 뇌간 부위의 삼차신경 및 동안신경 압박을 나타내는 전조증상. 6. 동서맥(Sinus Bradycardia): 심장의 박동 수가 분당 60회 이하로 느려지는 상태. 뇌압 상승으로 인한 쿠싱 반사(Cushing reflex)의 일환으로 나타남. 7. 제뇌강직(Decerebrate rigidity): 중뇌나 뇌간의 심각한 손상으로 인해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펴지고 굳어지는 병적 반사 상태.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