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호…… 이 개새끼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강현민이 비명을 지르며 민태준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병원을 위해 한 일이 얼마인데! 이 늙은이가 죽을 날 받아놓더니 노망이 났나 보군!"
경비원들이 황급히 달라붙어 강현민의 팔을 꺾어 제압하려 했지만, 발악하는 그의 광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청문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서, 나는 서채윤이 건네준 주식 긴급 가압류 및 양도 계약 서류를 받아 들었다.
만년필의 촉이 종이 위에 닿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 정교한 손놀림 끝에서 강현민이 평생을 바쳐 모아 온 혜성병원의 영토가, 마침내 내 소유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민태준과 울부짖는 강현민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제 이 병원의 주인은 나다."
광기에 젖은 비명과 경비원들의 거친 숨소리가 청문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고 흩어졌다. 강현민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서너 명의 보안요원이 달라붙어서야 그의 상체가 바닥으로 짓눌렸다. 꺾인 팔 각도에서 오는 비명이 비굴하게 울려 퍼졌다.
"이거 놓아!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손을 대! 민태준! 당신 똑바로 말해! 나한테 약속했던 이사장 자리는 어떻게 하고 이깟 수술쟁이 놈한테 빌빌대는 거야!"
민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겨우 인공호흡기를 붙들고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의 늙고 주름진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급격히 떨어진 바이탈 사인은 그가 처한 육체적 한계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만년필 뚜껑을 가볍게 돌려 닫았다. 금속성의 맑은 마찰음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기묘하게 고요하게 울렸다.
"시끄럽군."
내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폭풍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사람처럼, 단 한 조각의 감정적 동요도 섞이지 않은 어조였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강현민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에 내 냉소적인 얼굴이 비쳤다.
"강현민 부원장.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품 안에서 얇은 태블릿 PC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고 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했을 데이터를 띄웠다. 파란 광선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차갑게 비췄다.
"이게 뭔지 알겠지?"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 배열과 함께, 해외 페이퍼 컴퍼니의 명의로 개설된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1] 정보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계좌로 흘러 들어간 수십억 원 상당의 제약사 리베이트 자금의 흐름도가 붉은 선으로 도식화되어 있었다.
"너…… 너 이걸 어떻게……!"
강현민의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해외 투자자인 아산재단의 은예원 대표에게 상납하려던 진짜 장부다. 병원 자산을 임의로 유출하고, 이중 계약을 통해 리베이트를 챙긴 증거지. 네가 그토록 신뢰하던 에스크로 계좌의 보안망이 생각보다 허술하더군. 평판 원장 시스템의 병목 연동 지출을 조금만 추적해도 이런 썩은 찌꺼기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는데 말이야."
"한지호, 너 이 유령 장부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냐? 이건 법적 효력이 없어! 출처가 불분명한 해킹 자료일 뿐이야!"
강현민이 침을 튀기며 발악했다.
"효력이 있고 없고는 검찰이 판단하겠지. 하지만 이사회는 다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청문실 테이블에 얼어붙은 채 앉아 있는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혜성대학교병원 정관 제24조. 이사진이 재단에 중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히거나 도덕적 위해를 가했을 경우, 소유 주식에 대한 긴급 가압류 및 강제 처분 권한을 이사회 의결로 집행할 수 있다. 서채윤 선생."
내 부름에 서채윤이 서류 봉투에서 법원의 긴급 가압류 결정문과 이사회 연명 서명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류가 떨어지는 소리가 단두대의 칼날처럼 서늘했다.
"강현민 부원장이 보유한 재단 주식 5%. 이것은 그가 저지른 배임 및 횡령에 대한 담보로 즉시 가압류된다. 그리고 본 계약서에 따라, 해당 지분은 병원 정상화를 위한 긴급 자금 확보 목적으로 본인, 한지호에게 전량 강제 조율 양도된다."
"말도 안 돼! 이사회 승인도 없이 그딴 계약이 성립할 것 같아?!"
강현민이 목청을 높였지만, 이사들 중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사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했다. 이미 그들의 손끝 역시 리베이트의 단맛에 젖어 있었기에, 내 손에 들린 태블릿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미 과반수의 이사들이 서명했네, 강 부원장."
민태준 이사장이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패배감과 함께 살기 위한 처절함이 묻어났다.
"한 과장…… 아니, 한 지호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네. 자네의 그 더러운 탐욕 때문에 재단 전체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사장님!!! 당신마저 나를 버리는 겁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짓을 했는데!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강현민의 절규는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경비원들이 그의 몸을 조용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그의 악에 바친 비명줄이 복도 멀리서 메아리쳤다.
청문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서명된 서류를 거두어 품에 넣었다.
이로써 기존에 확보했던 2%의 지분에 더해, 강현민의 5%가 고스란히 내 손에 들어왔다. 총 지분 7%.
단순한 의사 한 명이 가질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이사회에서 독자적인 발언권과 안건 상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명확한 '지분 세력'으로의 독립이었다. 거대한 성진의료재단의 벽에 마침내 나만의 확고한 영토를 구축한 것이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숨을 헐떡이는 민태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색은 잿빛이었다.
"이사장님, 약속하신 수술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제 지분이 완전히 등기부상에 등록되는 순간 메스를 잡을 겁니다."
민태준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의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휠체어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문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뒤따라오는 서채윤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그 리듬을 흐트러뜨렸다.
***
시간: 오후 8시 15분. 장소: 혜성대학교병원 본관 최상층, 원장실 내부 전용 컴퓨터 단말기 앞.
청문회가 끝난 뒤, 병원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강현민의 체포 소식은 아직 언론에 타지 않았지만, 병원 내부 행정망은 이미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나는 원장실의 무거운 가죽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에는 일반 의료진의 권한으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이사장 전용 비밀 의료 기록'의 로그인 창이 떠 있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나는 고도로 보안이 설정된 네트워크 서버에 접속을 시도했다. 과거 강현민이 병원 전산망을 조작할 때 흘렸던 우회 포트와 백도어 경로를 역이용했다. 내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카롭게 두드렸다.
[접근 제한 구역 - 이사장 주치의 전용 시스템]
붉은 경고창이 떴지만, 이내 내 지문 인식과 가압류한 지분 권한을 연동한 마스터 키를 입력하자 잠금이 해제되었다. 화면 가득 민태준의 비밀 진료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내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내 시야가 변하기 시작했다. 안구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감이 치올랐다. 망막을 타고 흐르는 전류. '적광안(赤光眼)'이 스스로 활성화되며 모니터 너머의 MRI 영상과 3D 혈관 조영 이미지를 투시하기 시작했다.
화면 속 민태준의 뇌저 동맥 지도가 붉은 형광 실선으로 재구성되었다.
단순한 영상 데이터가 아니었다. 적광안은 실시간으로 환자의 유전적 정보와 혈관의 취약점을 시각화하여 내 뇌리에 직접 때려 박았다.
"역시 대물림이었군."
나는 1화에서 이사장의 친척인 안선재를 수술할 때 간파했던 독특한 형태의 희귀 미세동맥류(Microaneurysm)[3] 흔적을 떠올렸다. 당시 안선재의 뇌저 혈관에서 발견된 미세한 혈관 벽의 균열과 꽈리 모양의 팽창. 그것은 단순한 개별 병증이 아니었다. 민씨 가문 특유의 유전적 혈관 결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민태준의 뇌간 부위를 투시하는 내 적광안에는 훨씬 더 참혹한 붉은 광선들이 얽혀 있었다.
"급성 뇌간 신경 폐색 진행증(Acute brainstem occlusion)[4]."
단순한 뇌졸중이 아니었다. 뇌의 생명 유지 장치를 담당하는 가장 깊숙한 곳, 뇌간(Brainstem)으로 향하는 주요 미세 혈관들이 서서히 막혀가고 있었다.
적광안이 가리키는 붉은 광선들은 뇌간 부위에서 불규칙하게 끊어지며 스파크를 일으키듯 점멸하고 있었다. 신경 세포의 변성이 이미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길어야 한 달. 아니, 보름도 버티기 힘들겠군."
민태준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 주주들과 이사회가 그의 건강 이상을 눈치채는 순간, 성진의료재단의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그의 후계 구도는 파탄이 날 테니까. 그래서 교묘하게 일반 뇌경색 처방전만 남겨두고, 진짜 기록은 이 비밀 단말기 속에 은닉해 두었던 것이다.
"안검하수(Ptosis)[5]에 동서맥(Sinus Bradycardia)[6]까지 오고 있었던 건, 단순히 늙어서가 아니라 뇌간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나는 냉정하게 진단했다. 민태준의 목숨줄은 이제 완벽하게 내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그가 아무리 노회한 정객이라 한들, 이 메스를 쥔 내 손을 거치지 않고선 단 한 달도 생명을 연명할 수 없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 과장님."
서채윤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신속하게 단말기 화면을 전환해 일반 환자 차트로 바꾸고, 적광안의 스위치를 내렸다. 안구에 스며들었던 붉은 빛이 사라지자, 극심한 피로감과 함께 관자놀이에 둔탁한 통증이 찾아왔다.
'경영 평판 누적 지수'를 소모해 신경 역류의 마비 증세를 억제했지만, 과도한 투시는 늘 육체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가볍게 미간을 짚었다.
"원장실엔 무슨 일이지?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서채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쌉싸름한 원두 향이 원장실의 삭막한 공기를 아주 조금 희석시켰다.
"청문회장에서 그렇게 기운을 쓰셨으니, 카페인이라도 보충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녀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는 깊은 우려와 함께, 날카로운 분석력이 깃들어 있었다.
"과장님, 지금 안색이 엉망이에요. 또 그 증상이죠? 수술할 때마다 손을 떨거나 미간을 찌푸리는 거."
"쓸데없는 참견이군. 내 몸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아뇨, 모르는 것 같아요."
서채윤이 단호하게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 책상 모퉁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팔짱을 꼈다.
"한 과장님은 꼭 스스로를 다치게 만드는 아픈 사람 같아요. 남들의 숨통을 조이고, 지분을 뺏어오고, 완벽한 수술로 적들을 굴복시키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죠.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말이에요. 스스로를 치료할 생각은 전혀 안 하면서요."
나는 실소했다.
"치료? 내게 필요한 치료는 오직 하나뿐이다. 이 병원을 통째로 내 소유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 어떤 권력도, 자본도 내 메스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는 독립된 의료 영토를 구축하는 것뿐이지. 인간적인 신뢰나 감상적인 구호 따위는 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 서 선생."
"알아요. 철저한 비즈니스맨이시라는 거."
서채윤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 속에 담긴 온기가 차가운 내 심장 언저리를 미세하게 건드렸다.
"지분 계산 기계로 살아도 좋아요. 과장님 실력이면 그 오만함도 능력으로 인정받을 만하니까요. 하지만 커피 마실 때만큼은 제발 인간의 법률을 좀 따라 주면 안 될까요?"
"인간의 법률?"
"네. 뜨거운 걸 한 입에 털어 넣지 않고,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는 법률이요. 기계도 과열되면 고장 나잖아요. 과장님이 고장 나면, 당장 내일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누가 살리나요?"
그녀의 말은 묘한 타협안처럼 들렸다.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두는 그녀의 숭고한 신념과, 오직 비즈니스로만 움직이는 나의 냉혹함이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하나의 교차점에서 우스꽝스럽게 악수를 나누는 꼴이었다.
나는 묵묵히 종이컵을 들었다. 뜨거운 커피를 입술에 대고, 그녀의 말대로 아주 조금씩 불어가며 삼켰다.
"……나쁘지 않군."
혼잣말처럼 내뱉은 내 말에, 서채윤이 만족스러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
시간: 오후 9시 30분. 장소: 이사장실 VIP 병동 특별 접견실.
민태준은 산소마스크를 벗어 던진 채,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태블릿 화면 속에서 실시간 화상 연결로 나타난 여인이 있었다.
은예원. 아산재단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냉혹한 해외 자본의 대리인.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했고,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민 이사장님, 결국 강현민 카드가 완전히 날아갔군요."
은예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지호…… 그 미친 의사 놈이 강현민의 리베이트 장부와 에스크로 계좌를 통째로 털어갔네. 게다가 이사회 지분 7%를 확보해 독립 세력을 구축했어. 이대로 두면 내 목줄까지 그놈 손에 쥐어질 판이야."
민태준의 목소리가 분노와 공포로 덜덜 떨렸다. 평생을 병원 왕국의 군주로 군림해 온 그에게, 일개 외과의사에게 휘둘리는 지금의 상황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한지호 과장의 실력과 정치적 책략은 제 예상 시나리오를 가볍게 뛰어넘는군요."
은예원이 턱을 괴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잔인한 사냥꾼의 본능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에게 순순히 지분을 더 넘겨주고 혜성병원의 왕좌를 바치실 건가요? 아니면……."
"그럴 순 없지!"
민태준이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왼쪽 눈꺼풀이 급격하게 아래로 처지는 안검하수 증상이 다시 도졌다. 호흡이 가빠졌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독사처럼 번뜩였다.
"내 평생의 업적을 그 애송이 놈에게 통째로 넘겨주느니, 차라리 이 영토를 내 손으로 파괴하겠네."
"파괴라뇨?"
은예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혜성대학교병원을 고의로 도산(Bankruptcy)시킬 걸세."
민태준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파멸적이었다.
"재단의 부채 비율을 의도적으로 끌어올리고, 주력 채권들을 일시에 회수 조치하겠네. 병원이 부도 위기에 직면하면 주가는 휴지조각이 되겠지. 한지호가 기를 쓰고 모은 그 지분 7%도 순식간에 쓰레기더미로 변할 걸세."
"그리고요?"
"병원이 법정 관리에 들어가고 파산 절차를 밟을 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네의 아산재단이 헐값에 이 병원을 통째로 인수하게. 자네들은 국내 최고의 의료 인프라를 거저먹는 것이고, 나는 사후 계약을 통해 아산재단의 지분을 보장받아 이 영토의 지배권을 우회적으로 유지하는 거지. 어떤가, 은 대표?"
화면 너머의 은예원이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으로 휘어졌다.
"대담하고 잔인한 제안이군요, 이사장님. 한 의사를 잡기 위해 집 전체를 태워버리시겠다니."
"그놈의 메스 끝에 내 목숨이 붙어있을지언정, 내 왕국을 바칠 수는 없네!"
민태준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좋습니다. 거래를 성사시키죠. 즉시 저희 쪽 펀드를 움직여 혜성병원의 채권 압류 및 고의 도산 시나리오를 가동하겠습니다."
은예원의 확답과 함께 화상 통화가 종료되었다.
민태준은 깊은 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묻었다. 그의 입가에 비열한 승리감의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내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경고: 혜성대학교병원 긴급 임시 이사회 소집 통보 - 안건: 재단 채무 불이행에 따른 파산 보호 신청 및 구조조정의 건]
그리고 연이어 날아온 금융 시장의 속보 찌라시 메시지.
- [단독] 국내 최대 사립 의료원 '혜성병원', 수천억대 채권 회수 불능으로 부도 위기 직면…… 아산재단 인수설 대두.
화면을 바라보는 내 눈이 다시 한 번 차갑게 식어 내렸다.
민태준, 늙은 여우가 결국 제 집을 불태워 사냥꾼을 불러들이는 최악의 자폭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손끝에 가해지는 압력에 액정 화면 위로 내 차가운 눈동자가 비쳤다.
"집을 불태우겠다면, 그 불길 속에 너를 가장 먼저 던져주지."
내 목소리가 어둠이 짙게 깔린 원장실 안을 서늘하게 채웠다.
***
[주석] 1. 에스크로 계좌(Escrow Account): 거래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3자에게 거래 대금을 예치해 두는 특정 계좌. 2. 미세동맥류(Microaneurysm): 모세혈관이나 미세 동맥의 벽이 약해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 터질 경우 뇌출혈을 유발함. 3. 급성 뇌간 신경 폐색(Acute brainstem occlusion): 생명 유지 장치를 담당하는 뇌간 부위의 혈관이 급격히 막히는 치명적인 질환. 4. 안검하수(Ptosis): 윗눈꺼풀을 올리는 근육의 힘이 약해져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현상. 뇌신경 마비의 전조증상일 수 있음. 5. 동서맥(Sinus Bradycardia): 심장의 박동 수가 분당 60회 이하로 느려지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