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하나뿐입니다, 이사장님."
내가 내민 붉은 가죽 파일이 민태준 이사장의 집무실 유리 테이블 위로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졌다. 가죽 표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CONRAD'라는 이름이 실내의 은은한 할로겐 조명을 받아 누런 이빨처럼 번뜩였다.
민태준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맹독을 품은 살모사처럼 나를 응시했다. 그의 얇은 입술이 비틀려 올라가며 기괴한 미소를 그려냈다. 비자금 세탁용 에스크로 계좌의 누수를 깨닫고 완전히 독이 오른 상태였지만, 내 거침없는 반응에 잠시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수술실 준비해 두십시오. 늦어지면 환자의 연수(Medulla)가 종양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겁니다."
"좋은 기백이군, 한 지호 과장."
민태준이 거친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건 단순한 도전이 아니다. 네놈이 쌓아 올린 그 알량한 명성과 손에 쥔 지분 2%, 그리고 의사 면허까지 전부 단 한 번의 메스질에 걸린 목숨줄이라는 것을."
그의 옆에 서 있던 강현민이 비열한 비웃음을 흘렸다.
"한 과장,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뇌간 교모세포종[1]이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존스 홉킨스에서도 손을 떼고 호스피스로 보낸 환자야. 네가 신이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수술실에서 환자가 숨을 거두는 순간 네 인생도 거기서 종말이다."
나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 뒤로 보이는 추악한 권력욕과 질투의 냄새가 역겨울 뿐이었다. 나는 파일을 품에 안고 뒤를 돌아섰다. 가죽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뇌리로 스며들었다.
이들이 파놓은 깊고 어두운 함정. 하지만 내게는 이 늙은 여우들의 목줄을 단숨에 쥘 기회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 것에 불과했다.
***
사흘 뒤, 깊은 밤의 신경외과 연구실.
창밖으로 서울 도심의 인공적인 불빛들이 스며드는 어두운 방 안, 오직 3D 홀로그램 분석기만이 푸르스름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입체 영상은 콘래드 회장의 뇌 스캔 자료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홀로그램 주위를 천천히 돌며 화면을 응시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더럽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화면 속, 뇌의 가장 깊숙한 생명 유지 중추인 뇌간(Brainstem) 부위가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악성 뇌종양 중에서도 가장 침습성이 강한 교모세포종이 뇌간의 미세 신경망을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었다.
종양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암세포가 정상적인 신경 섬유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어디서부터가 종양이고 어디서부터가 호흡을 담당하는 신경인지 분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메스[2]를 깊게 대거나 어블레이션[3]을 시도하는 순간, 연수의 호흡 중추가 마비되어 환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터였다.
강현민 일당이 왜 이 수술을 내게 강제로 떠넘겼는지 확실하게 이해가 갔다. 이것은 의학적인 도전이 아니라, 정교하게 기획된 '합법적 살인 링'이었다. 내가 수술대 위에서 환자를 죽이도록 등 떠밀어, 완벽하게 매장하려는 음모.
"어디 한 번 들여다볼까."
나는 왼쪽 눈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안구 뒤쪽에서부터 터질 듯한 열감이 뿜어져 나오며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적광안(赤光眼).
환자의 손상된 신경망을 형광 붉은 실선으로 투시하여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봉합 경로를 안내하는 신의 감각이 깨어났다. 홀로그램 영상 너머로 콘래드의 실제 뇌 실질 구조와 얽히고설킨 붉은 광선선로들이 겹쳐 보였다.
웅웅거리는 이명과 함께 시야 구석에 황금빛 경고 문구가 명멸했다.
[경고: 목표 조직의 침습도 및 신경 손상도가 분석 한계를 초과했습니다.] [적광안 최적 경로 탐색 오차 확률: 88%] [과도한 투시 시도 시 뇌신경계 역류(Retrograde Flow) 발생 위험: 95%] [경고: 현재 상태에서 강행 시 극심한 두통 및 사지 마비 페널티가 즉시 발생합니다.]
"오차율이 88%라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붉은 실선들이 일정한 궤도를 그리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교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종양 세포의 밀도가 너무 높아 신경 신호 자체가 왜곡되어 전달되는 탓이었다. 이대로 메스를 잡았다가는 수술 성공은커녕, 내 뇌가 먼저 타버려 사지가 마비될 판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 병원을 내 완벽한 독립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 콘래드라는 거물의 목숨줄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열쇠였다.
"시스템 개방."
나는 머릿속으로 차갑게 명령했다. 과거 이사장 친척 수술을 성공시키고 확보한 성진의료재단 지분 2%와 가치 관리 원장에 누적된 경영 평판 지수를 연동할 차례였다.
[VIP 신용 담보 보조 장치 시스템을 작동합니다.] [보유 지분 가치 및 병원 내부 평판 연동 완료.] [사용자 신용 등급: A- 등급으로 개방됩니다.] [마비 역류 억제 필터 활성화. 평판 지수를 소모하여 실시간 피드백 보정을 시작합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붉은 노이즈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끊어지고 흔들리던 형광 붉은 실선들이 점차 정렬되며, 뇌간의 복잡한 그물망 사이로 단 하나의 정밀한 '바늘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머리를 깨뜨릴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렸지만,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버텼다. 가쁜 호흡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삼켰다. 차가운 땀방울이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 정도로 나를 멈출 수는 없어."
겨우 찾아낸 선로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순간,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
"미쳤어요? 한 과장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서채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콘래드 회장의 차트 사본이 들려 있었다. 평소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극도의 불안과 분노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차트, 제가 방금 확인했어요. 뇌간 교모세포종에 이미 연수 압박 증상까지 시작됐어요. 이건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 테이블 데스[4]예요! 이사장이 파놓은 함정인 걸 알면서 왜 수락한 건가요?"
나는 충혈된 적광안의 빛을 거두며 홀로그램 분석기를 껐다. 푸른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나는 서채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서 선생. 목소리가 크군. 밤이 깊었어."
"지금 목소리 크기가 문제예요? 과장님이 죽게 생겼다고요! 그 잘난 지분 2%랑 면허까지 다 빼앗기고 쫓겨나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무모한 짓?"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공기가 우리 사이를 메웠다. 내 냉혹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서채윤은 흠칫하며 숨을 들이켰다.
"서 선생은 여전히 나이브하군. 인간이 고통받을 때, 그 가치가 가장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건가?"
"그게 무슨……."
"콘래드라는 노인이 이대로 죽으면, 그 가문의 수십 조 자산은 딴 데로 흘러가겠지. 하지만 내 손으로 살려낸다면? 그 가치는 온전히 내 평판과 자산으로 치환된다. 나는 이 수술을 숭고한 인류애로 하는 게 아니야. 철저하게 거액의 수수료와 이 병원의 지분을 통째로 삼키기 위한 비즈니스로 임하는 거지."
서채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환자의 목숨을 자산 가치로만 계산할 수 있죠? 당신은 의사잖아요!"
"의사이기 전에 생존자다. 나를 배신하고 쫓아냈던 이사진들의 대가리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나 역시 그들이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인 '돈과 권력'으로 무장해야 해."
나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를 두드려 하나의 계약서 초안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수술의 퍼스트 어시스트(First Assist)는 서 선생이 맡아줘야겠어."
"내가 왜 당신의 미친 도박에 동조해야 하죠?"
"이걸 봐."
태블릿 화면에는 서채윤의 이름으로 개설될 예정인 '메디컬 펀드 수혜 지정서'가 띄워져 있었다.
"내가 이번 수술을 성공시키고 민태준에게서 뜯어낼 성진의료재단 지분 중 0.1%를 이 펀드로 신탁하겠다. 치료비가 없어서 수술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소아마비 환자들, 네가 그렇게 살리고 싶어 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네 마음대로 치료할 수 있는 무한정 자금줄이지. 어때, 비즈니스로서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서채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의 주먹 쥔 손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 차가운 자산주의적 태도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그녀의 이성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지독해야 살아남는 법이지. 서 선생, 대답은?"
서채윤은 고개를 들이받을 듯 단호하게 치켜세웠다.
"좋아요. 그 더러운 돈, 내가 받아서 가장 가치 있게 써주겠어요. 대신 약속해요. 반드시 살려내요. 내 눈앞에서 환자가 죽는 꼴은 절대로 못 보니까."
"거래 성립이군."
나는 차갑게 웃었다. 계약서 위로 그녀의 동의 서명이 각인되었다. 동맹은 굳건해졌다.
***
수술 하루 전, 본관 12층 소회의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는 민태준 이사장과 강현민, 그리고 재단 법무팀 소속 변호사 세 명이 배석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최종 수술 동의서가 놓여 있었다.
"한 과장, 서명해라."
민태준이 칠흑 같은 만년필을 툭 던지며 말했다.
"이미 콘래드 가문 측 변호인단과 조율을 마쳤다. 수술 실패 시 네놈의 의사 면허 박탈 및 지분 기부 채납 조건은 양측 합의하에 효력이 발생한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검지로 펜대를 툭툭 치며 비웃음을 담아 민태준을 응시했다.
"이사장님. 계약이란 쌍방이 대등한 리스크를 짊어져야 비즈니스가 성립하는 법입니다. 저만 모든 목숨줄을 걸고, 재단은 구경만 하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뭐라?"
강현민이 즉각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호! 네가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따위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이 수술을 거부하겠다는 뜻이냐?"
"아니, 수술은 합니다."
나는 품 안에서 내 개인 변호사를 통해 작성한 특약 합의서를 꺼내 테이블 한가운데로 던졌다.
탁.
"하지만 조항을 추가해야겠습니다. 첫째, 수술 중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환자가 사망하거나 영구적 장애를 입을 경우, 집도의 한지호에게는 어떠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으며 의사 면허 박탈 조항은 무효로 한다. 둘째."
나는 민태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수술 실패에 따른 대외적 신뢰도 하락 및 콘래드 가문이 제기할 수 있는 위자료와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모든 배상책임—최소 5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은 전적으로 혜성대학교병원 재단이 연대하여 책임진다."
"미쳤군! 미쳤어!"
민태준의 안면 근육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우리가 왜 5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리스크를 책임져야 한단 말이냐? 수술은 네놈이 집도하는 것인데!"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차갑게 받아쳤다.
"전 세계 어느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시한부 환자를 내밀며 내 목을 치려 한 건 이사장님과 강 과장입니다. 내 실력을 믿지 못해 안달복달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한 푼의 리스크도 지지 않겠다? 그런 비겁한 태도로 어떻게 이 거대한 의료 재단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 자식이……!"
강현민이 멱살이라도 잡을 듯 다가왔지만,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오직 민태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왼쪽 눈의 능력을 개방했다. 붉은 광선이 민태준의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 그의 뇌 구조를 실시간으로 투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뇌간 부위, 기저동맥(Basilar Artery)의 분지점 근처가 보였다. 아주 미세하게 꽈리 모양으로 부풀어 올라 맥동하고 있는 혈관벽의 결함이 적광안의 붉은 시야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과거 그의 친척 안선재를 수술할 때 간파했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 미세동맥류[5] 흔적.'
민태준 역시 언제 머릿속 시한폭탄이 터져 쓰러질지 모르는 시한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의 숨겨진 약점이 내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펜을 굴리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 요즘 가끔 뒷목이 뻐근하고 오른쪽 눈꺼풀이 가라앉는 안검하수[6] 증상이 오지 않으십니까? 머릿속 시한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이, 남의 뇌수술 걱정이나 하고 계실 때가 아닐 텐데요."
민태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호흡이 턱 막히는 소리가 고요한 회의실에 작게 울려 퍼졌다. 자신의 극비 건강 상태, 주치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뇌혈관 결함을 내가 정확히 짚어내자 극도의 공포가 그의 위선을 찢고 흘러나왔다.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사인하십시오, 이사장님."
나는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제가 이 수술을 성공시키면 재단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실패하면 재단은 500억의 빚더미와 함께 파산의 길로 걷게 될 겁니다. 선택은 이사장님의 몫입니다."
회의실 안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현민과 법무팀 변호사들은 영문을 몰라 민태준의 눈치만 살폈다. 민태준은 땀에 젖은 이마를 짚으며,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었다. 지호의 제안을 거절하면 콘래드 가문과의 계약 자체가 파기되어 재단의 대외 신용도가 즉시 붕괴할 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치부까지 저 악마 같은 의사 놈이 쥐고 있다.
스윽.
결국 민태준은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특약서 위에 서명했다.
도장이 찍히는 순간, 나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완벽한 기 싸움의 완승이자, 이사장의 숨통을 조일 첫 번째 사슬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수술 당일 — 09:15, 테라피아 VIP 수술실]
수술실 내부의 공기는 극도로 건조하고 차가웠다. 삼중 보안 장치를 거쳐 들어온 이곳에는 오직 나와 서채윤, 그리고 극소수의 정예 마취과 스태프들만이 존재했다.
수술대 위에는 콘래드 회장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 있었다. 그의 두개골은 이미 수술을 위해 삭도된 상태였다.
"마취 유도 시작하겠습니다."
마취과 과장이 프로포폴과 근이완제 흡입 마취 가스를 주입하기 위해 약물 주입 펌프의 버튼을 눌렀다.
나는 수술 장갑을 강하게 조여 끼며 메스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내 영토를 넓히고 저 간악한 카르텔을 무너뜨릴 사냥이 시작되는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
삐—————!
고막을 찢을 듯한 예리한 경고음이 수술실 전체를 강타했다. 바이탈 모니터의 수치들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환자 혈압 급하강! 120에서 순식간에 50까지 떨어집니다!"
마취과 의사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맥박수 35! 싸이누스 브라디카디아(Sinus Bradycardia, 동서맥) 발생! 어시스톨(Asystole, 심정지) 직전입니다!"
"뭐라고?"
서채윤이 비명을 지르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직 본격적인 마취 유도제가 다 들어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절개도 시작하지 않은 환자의 생체 신호가 이토록 급격하게 무너질 리가 없었다.
삐- 삐- 삐-!
[경고: 환자의 혈압 조절 시스템 일체에 원인 불명의 급격한 쇼크 자극 주입 감지!] [약물 주입 라인 내 이상 화학 물질 유입 위험!]
적광안의 붉은 시야 너머로, 환자의 정맥 라인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링거 수액 속에서 정체불명의 푸르스름한 독극물 반응이 투시되어 보였다.
누군가 마취 시스템과 수액 백에 손을 써 둔 것이다. 수술이 시작되기도 전에 환자를 테이블 데스로 몰고 가려는 가장 비열하고 잔혹한 암살 공작이었다.
"한 과장님! 어떻게 해요? 심장이 멈춰가요!"
서채윤의 다급한 외침 속에서, 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메스를 쥔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
[주석] 1. 교모세포종(Glioblastoma): 뇌에 발생하는 가장 흔하고 침습적인 악성 뇌종양. 2. 메스(Scalpel): 수술 시 피부나 조직을 절개하는 데 사용하는 외과용 칼. 3. 어블레이션(Ablation): 절제술 또는 소작술. 조직을 고주파나 레이저 등으로 파괴하여 제거하는 치료법. 4.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하는 일. 5. 미세동맥류(Microaneurysm): 모세혈관이나 미세 동맥의 벽이 약해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증상. 터질 경우 뇌출혈을 유발함. 6. 안검하수(Ptosis): 윗눈꺼풀을 올리는 근육의 힘이 약해져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현상. 뇌신경 마비의 전조증상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