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00 - 테라피아 복도]
강현민의 호흡이 거칠게 꺾였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가슴 주머니에 꽂힌, 굳어버린 핏자국이 선명한 메스[1]에 머물러 있었다.
"강 실장님."
내가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음엔 당신 차례입니다. 심장 관리 잘해두십시오. 내 칼이 언제 당신 가슴을 열지 모르니까."
"한지호, 너……!"
강현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턱관절을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으드득하는 소리가 빈 복도에 서늘하게 울렸다. 그의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는 성진의료재단의 우호 지분 2.0%가 내 명의로 신탁되었다는 전자 통지서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핥아대던 이사회의 발가락 끝에서도 얻지 못한 권력의 파편이, 단 한 번의 수술로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방치한 채 뒤를 돌았다. 구걸하듯 매달리는 적의 공포는 비즈니스의 가장 훌륭한 윤활유다.
[알림: 경영 평판 누적 지수 155 포인트 유지 중.]
시각 인터페이스의 푸른 빛이 안구 안쪽에서 조용히 명멸했다. 뇌신경을 짓누르던 미세한 마비감이 평판 지수의 유지로 인해 완전히 무력화되어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사흘 뒤.
혜성대학교병원 본관 최상층, 테라피아(Therapia).
정재계 거물들의 호흡기를 쥐고 흔드는 어둠의 요새이자, 삼중 보안 카드로 무장된 그 거대한 유리 성벽 안으로 나는 정식 전담 외과의로서 발을 들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지는 것은 정적, 그리고 사방을 감시하는 삼엄한 시선들이었다. 대리석 바닥은 구두 굽 소리조차 흡수하도록 특수 설계되어 있었고, 은은한 라벤더 향 뒤에는 소독약 특유의 비린내가 숨어 있었다.
데스크에 서 있던 간호사 세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명백한 적의와 감시의 빛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 과장님. 이사장님의 특별 지시로 오늘부터 테라피아 전담으로 발령 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가장 앞에 선 수석간호사 송민아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무선 인컴을 바쁘게 두드리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내 동선을 강현민에게 보고하는 쥐새끼의 손놀림이었다.
"인사는 됐고. 환자 차트나 넘기지."
내가 차갑게 대꾸하자, 송민아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테라피아의 환자 정보는 1급 보안 사항이라, 이사장님의 개별 결재 없이는 전담 의사라 해도 함부로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절차를 기다려 주시죠."
노골적인 차단막이었다. 강현민이 심어둔 첩자들이 이 거대한 병동을 장악하고 내 손발을 묶으려 들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결재, 제가 이미 받아두었는데요."
단정한 간호사 캡 아래로 단단하게 묶은 머리칼이 보였다. 서채윤이었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테라피아 수석간호사'라는 은빛 명찰이 새로이 빛나고 있었다. 사흘 전 수술의 공로로 초고속 승진을 이뤄낸 결과였다.
서채윤은 송민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태블릿 PC를 데스크 위로 툭 던졌다. 화면에는 승인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송 선생, 이제 비켜서지? 전담 외과의의 업무를 방해하는 건 이사회 징계 사유라는 걸 깜빡한 모양인데."
송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마지못해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채윤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걸으며 낮게 속삭였다. 주변의 귀들을 의식한 듯, 그녀의 목소리에는 인위적인 가시가 돋쳐 있었다.
"환자를 아주 돈줄로만 보시는 천재 의사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 지옥 같은 곳까지 기어 올라왔네요. 영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승진했으면 밥값이나 해, 서 선생.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바이탈[2]이나 한 번 더 체크하고."
"걱정 마세요. 당신이 돈독 올라서 환자 목숨 흘려보내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테니까."
그녀의 얇은 입술 끝에 아주 잠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삼엄한 병동의 공기를 비틀어 놓는, 그녀만의 방식이자 우리만의 기묘한 유대였다. 첩자들의 눈에는 우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불안정한 파트너로 보일 터였다. 정보의 불균형을 유도하기엔 더없이 좋은 구도였다.
***
[15:20:00 - 테라피아 전담의 개인 집무실]
가죽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나는 개인 태블릿을 켜 평판 원장 시스템에 접속했다. 화면 위로 복잡한 숫자들과 그래프가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내 계좌에 반영된 병원 장부의 누적 관리 지표.
그 안에서 이례적인 병목 현상이 발견되었다. 특정 제약사와 우회 연동된 에스크로[3] 계좌의 거래 내역이었다. 자금의 흐름을 역추적하자, 성진의료재단의 내부 망 깊숙한 곳으로 연결되는 비자금 세탁 통로가 드러났다.
강현민과 민태준 이사장이 은예원의 독립 합병 자금을 뒤로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던 흔적이었다. 아주 정교하게 쪼개진 100억 대의 자금 세탁.
"찾았다."
내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이중 장부의 물리적 증거는 강현민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완벽한 가죽끈이 될 터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사흘 전 수술실에서의 잔상이 스쳤다.
이사장 민태준의 친척을 수술할 때, 내 적광안(赤光眼)이 포착했던 기묘한 혈관의 뒤틀림. 그것은 단순한 병변이 아니었다. 극히 드문 확률로 나타나는 가문 유전적 혈관 결함, 즉 뇌간 부위의 미세동맥류 흔적이었다.
"대물림되는 가문 유전이라……."
그렇다면 이사장 민태준의 뇌 속에도 똑같은 시한폭탄이 심어져 있을 터였다. 적광안이 분석해 낸 그 독특한 혈관 분기점의 취약성은 오직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민태준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그의 뇌간 신경 폐색 진행 속도는 이미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노회한 야수가, 결국 내 수술대 위에 목숨을 구걸하며 누워야 할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송민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수술용 소모품 청구서가 들려 있었다.
"한 과장님. 테라피아 병동의 이번 달 특수 무균 거즈와 봉합사 청구서입니다. 결재해 주시죠."
나는 서류를 받아들지도 않은 채,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송 선생."
"네?"
"테라피아 전담 간호사로서 제약사 리베이트와 소모품 수량 부풀리기로 매달 뒷돈을 챙기는 재미가 쏠쏠했겠더군."
송민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절차대로만……."
"절차?"
나는 태블릿을 돌려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개인 명의로 개설한 차명 계좌와, 병원 물품 공급업체로부터 매달 입금된 400만 원씩의 내역이 붉은색 글씨로 깜빡이고 있었다. 원장 대조 시스템을 통해 단 3분 만에 찾아낸 증거였다.
"강 실장이 뒤를 봐준다고 착각하지 마. 그놈은 자기 목에 걸린 칼날 치우기도 바쁜 놈이니까."
"이, 이건 모함이에요! 이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말씀드려 봐."
나는 차갑게 냉소를 터뜨렸다.
"이사장님이 자기 비자금 세탁 경로가 털린 마당에, 너 같은 말단 쥐새끼의 사소한 횡령 따위를 덮어주려고 움직이실까? 5분 주지. 지금 당장 네 발로 이 병동에서 나가라. 짐은 내일 사람 보내서 치워줄 테니."
"한지호……!"
"4분 50초 남았어."
송민아는 미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단 5분 만에 테라피아를 감시하던 강현민의 가장 날카로운 눈 하나가 뽑혀 나갔다.
집무실 밖 복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간호사들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 병동의 규칙이 누구를 중심으로 흐르는지 그들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었을 터였다.
***
[18:00:00 - 이사장실]
쾅!
이사장실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렸다.
민태준 이사장이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책상을 내려쳤다. 그의 손에 쥔 만년필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한지호! 네놈이 감히 내 병동에서 사람을 마음대로 내쫓아? 은예원의 지분 2%를 가졌다고 해서 네가 이 병원의 주인이 된 줄 아는 모양이군!"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미간 사이, 뇌간으로 이어지는 경동맥 부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적광안을 활성화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안면 홍조와 미세한 좌측 안검하수[4]가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가문의 유전적 혈관 결함이 이미 그의 뇌 속에서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사장님, 흥분하시면 혈압이 올라가서 뇌혈관에 아주 해롭습니다. 특히 뇌간 부위 말입니다."
내 나지막한 경고에 민태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에서 붉은색 결재 파일을 꺼내 내 앞에 던졌다.
"주둥이만 살아 숨 쉬는 천재 의사 선생. 네 실력이 정말 신의 영역인지,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사기꾼인지 오늘 증명해 보아라."
파일 겉면에는 황금색 활자로 'CONRAD'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글로벌 석유 재벌이자 성진의료재단의 최대 해외 투자자인 콘래드 회장.
"뇌간 교모세포종[5]. 전 세계의 그 어떤 병원에서도 수술 불가능 판정을 내리고 우리 병원으로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러 들어온 환자다."
민태준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 환자를 살려내라. 수술해서 완치시킨다면 내가 가진 지분 중 추가로 3%를 네놈에게 양도하지. 하지만……."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죽는다면, 네 의사 면허는 박탈될 것이고, 네가 가진 지분 2% 역시 병원에 전액 기부 채납하는 조건이다. 이미 콘래드 가문의 변호인단과 계약서 작성을 마쳤다."
완벽한 사형 선고였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공인된 뇌간의 악성 종양. 수술 칼을 대는 순간 어블레이션[6]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호흡 마비로 사망할 것이 뻔한 절대 금기의 영역.
민태준과 강현민이 파놓은, 거절할 수 없는 죽음의 덫이었다.
"어떻게 하겠나, 한 과장? 이 도전을 피하고 겁쟁이처럼 쫓겨날 텐가, 아니면 수술대 위에서 스스로 파멸할 텐가?"
민태준의 눈에 가득 찬 살의가 나를 짓눌렀다.
나는 천천히 붉은 파일을 집어 들었다. 내 손끝에서 차가운 가죽의 감촉줄이 느껴졌다. 내 영토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 이 늙은 여우의 목줄을 쥘 기회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이사장님."
나는 파일을 품에 안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수술실 준비해 두십시오."
***
[주석] 1. 메스(Scalpel): 수술 시 피부나 조직을 절개하는 데 사용하는 외과용 칼. 2. 바이탈(Vital Signs): 활력 징후. 체온, 맥박, 호흡, 혈압 등 생명 유지의 기본 지표. 3. 에스크로(Escrow):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신용 관계가 불확실할 때, 제3자가 상거래를 중개하는 매매 보호 서비스. 여기서는 비자금 세탁용 우회 계좌를 의미함. 4. 안검하수(Ptosis): 윗눈꺼풀을 올리는 근육의 힘이 약해져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는 현상. 뇌신경 마비의 전조증상일 수 있음. 5. 교모세포종(Glioblastoma): 뇌에 발생하는 가장 흔하고 침습적인 악성 뇌종양. 6. 어블레이션(Ablation): 절제술 또는 소작술. 조직을 고주파나 레이저 등으로 파괴하여 제거하는 치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