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앞으로 당신이 서는 모든 카메라 앞이, 오늘처럼 지옥이 될 테니까.”

차가운 야외 세트장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박민우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충혈된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잘게 흔들렸다. 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를 거칠게 털어내며 뒤를 돌았다. 가로등 불빛이 가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너,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바닥을 긁는 손톱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비참하게 뭉개졌다. 박민우의 절규는 밤공기를 타고 흩어졌다.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수군거림이 수면 위로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기포처럼 사방에서 속삭였다.

도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턱 끝을 굳게 치켜세운 채, 골목 안쪽의 짙은 그늘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세트장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도현의 시야가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스륵.

눈앞에 가상의 붉은 반점이 번지더니, 망막 위에 검붉은 글씨가 불길하게 떠올랐다.

[경고: 기 인수된 리스크의 동시 역류 현상 발생.] [피인수자 '한여름'의 정신적 발작 리스크(45%)와 피인수자 '강태오'의 잠재적 결핍 리스크(30%)가 사용자 서도현의 강박적 자해벽과 충돌합니다.] [현재 정신 동화율: 78% — 위험 수치 돌파.]

“헉……!”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도현은 벽을 짚었다. 거친 시멘트 벽돌의 감각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독한 오한이 전신을 엄습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산소가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들이쉬는 숨은 목구멍에서 턱턱 걸렸고, 내쉬는 숨은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식도를 태웠다.

심장이 늑골을 부술 것처럼 날뛰었다.

이것은 한여름이 매일 밤 약물에 의존하기 직전 느꼈던 극심한 공황의 잔재였다. 거기에 강태오가 밑바닥 인생을 살며 뼈저리게 삼켜야 했던, 세상에 대한 증오와 결핍의 독기가 융합되어 뇌세포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더 버텨야 해. 아직…… 백현석의 목을 따기 전까진 쓰러질 수 없어.’

도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스스로의 감정을 좀먹는 강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오른손톱을 왼손등의 살 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찌르는 듯한 통증만이 이 지독한 환각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붙잡아 둘 유일한 닻이었기 때문이다.

손등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점퍼 소매를 적시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털썩, 하는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도현의 어깨를 억세게 낚아챘다.

“야! 너 왜 이래?! 서도현!”

강태오였다.

그의 야성적인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반항적이고 거만한 태도는 간데없고, 도현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피가 흐르는 손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켜…….”

도현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태오의 손을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도현을, 태오가 한 팔로 단단히 받쳐 안았다.

“밀쳐내지 마, 미친놈아! 숨 쉬어! 천천히 들이마시라고!”

태오의 외침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도현의 시야는 이미 반쯤 암전되어 가고 있었다. 사방이 캄캄한 심해 같았고, 도현은 그 바닥으로 가라앉는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타인의 불행을 삼킨 대가는 이토록 가혹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지옥 불에 밀어 넣는 짓. 그것이 ‘연기 잔고 원장’의 본질이었다.

그때, 목덜미로 따뜻하고 거친 감각이 스며들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촉감. 태오가 자신의 목에 칭칭 감고 있던 낡은 털목도리를 풀어 도현의 목에 아낌없이 둘러주고 있었다. 담배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땀 냄새가 섞인 목도리였다.

“형씨.”

태오가 도현의 어깨를 꽉 쥐며 얼굴을 바짝 밀착했다. 그의 거친 숨결이 도현의 뺨에 닿았다.

“나 같은 놈한테 손 내민 거, 후회 안 한다며. 스타더스트인지 뭔지 하는 대기업 놈들이 내 인생 밟아놓으려는 거 지켜봐 준다며.”

“……태, 오야.”

“형씨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진짜 인생은 누가 건져주냐? 나 평생 길거리에서 양아치 짓이나 하면서 썩으라고?”

태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협을 혐오하고 아첨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야생마 같던 사내의 입에서 나온,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진심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현의 손을 잡겠다는, 목숨을 건 연대 선언이었다.

“일어나. 나 형씨 믿고 내 인생 전부 배팅했으니까. 그러니까…… 죽지 마라, 도현이 형.”

‘형.’

그 한마디가 도현의 귓가를 울리는 순간, 도현의 손등을 파고들던 아귀힘이 스르륵 풀렸다. 평생 타인의 선의를 불신하며, 가스라이팅의 상처 속에서 스스로를 고문해 왔던 도현의 마음속 굳게 닫힌 빗장이 덜컥이며 흔들렸다.

진심.

눈앞의 사내는 진짜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용 가치가 있는 장기말이 아니라, 함께 지옥을 건너갈 유일한 동반자로서.

그 순간, 귓가에 맑은 기계음이 고요한 골목길의 침묵을 깨뜨렸다.

띠링!

[특수 조건 충족: 피인수자 '강태오'의 절대적 신뢰 획득.] [연기 잔고 원장 구석에 비활성화되어 있던 특수 연계 옵션이 감지됩니다.] [‘싱크 공명(Sync-Resonance)’ 옵션, 최초 활성화!]

시스템의 푸른 빛이 붉게 오염되어 가던 도현의 시야를 정화하듯 번져나갔다.

[공명 효과 발생: 피인수자의 리스크 역류 현상이 급격히 감쇄됩니다. 정신 동화율 30%로 하향 안정.] [부작용 경고등이 파란색 안정 모드로 전환됩니다.] [상호 신뢰의 유대로 인해 사용자 서도현의 오리지널 연기력이 하룻밤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합니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납 덩어리 같은 통증이 일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막혔던 기도가 뚫리며 시원한 밤공기가 폐포 깊숙이 흘러 들어왔다.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시야가 이전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선명했다.

단순히 통증이 사라진 수준이 아니었다. 몸 안의 감각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공기 중의 미세한 습도, 가로등 불빛의 미세한 깜빡임, 태오의 가쁜 호흡 템포까지 전부 뇌 스캔을 하듯 정밀하게 읽혔다.

‘이것이…… 싱크 공명인가.’

도현은 목에 둘러진 태오의 목도리를 가볍게 쥐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자, 태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도현을 강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냐, 형씨?”

“……어.”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짓는, 가식 없는 진짜 미소였다. 도현은 손등의 피를 대충 닦아내며 태오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다, 태오야.”

“치, 싱겁기는. 고마우면 내일부터 촬영장에서 제대로 보여달라고. 저 가짜 스타 놈 콧대를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게.”

태오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코를 훌쩍였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불신과 냉소로 가득했던 두 괴물이, 마침내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완벽한 한 팀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쨍그랑!

고급 크리스탈 재질의 재바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재떨이 안에 가득 차 있던 담배꽁초와 하얀 재가 사방으로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한여름이 공식 인터뷰를 했다고?!”

백현석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부드럽고 친근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일그러진 괴물의 낯짝만이 남아 있었다. 그 앞에는 비서와 삼류 기자 김태준이 고개를 숙인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비서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그, 그게…… 오늘 아침 여덟 시 정각에 한여름 배우 측에서 단독 인터뷰를 송고했습니다. 기획사의 가혹한 스케줄 강요와 약물 강제 처방 의혹에 대해 처방전 원본과 모바일 메신저 대화 캡처본을 법적 공증까지 받아서 전부 공개했습니다.”

화면에는 한여름의 고결하고 단호한 얼굴이 담긴 사진과 함께, 스타더스트의 조직적인 아티스트 학대 정황이 낱낱이 적힌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악하고 있었다. 네티즌들의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스타더스트를 향한 불매 운동과 백현석의 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댓글이 수만 개씩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SBC 드라마 제작국에서 공식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신인 배우 서도현과 강태오가 이번 작품의 메인 프로듀싱 라인에 공식 합류하며, 주연 및 주요 조연 캐스팅을 확정 지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박민우 배우의 배역은…… 분량이 대폭 축소되어 서브 캐릭터로 강등되었습니다.”

“뭐라구?!”

백현석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옆에 서 있던 김태준 기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대, 대표님. 저도 어제 세트장에서 서도현이 박민우 씨 멱살 잡는 사진 확보해서 폭행 기사 내려고 세팅 다 해놨었는데…… 갑자기 SBC 측 고위 관계자한테 연락이 와서, 만약 그 기사 나가면 우리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로 민형사상 끝까지 가겠다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이 쓸모없는 새끼들이!”

백현석이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설계한 판이 완벽하게 깨졌다. 서도현이라는 새파란 신인 놈 하나를 짓밟으려다, 오히려 스타더스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한여름 카드가 터져버렸고, 박민우의 위상마저 바닥으로 추락했다.

“서도현…… 감히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던 쥐새끼가 머리가 컸다 이거지?”

백현석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가죽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천천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꽃이 그의 야비한 눈동자를 비추었다. 가스라이팅으로 사람의 영혼을 말려 죽이던 악마의 본성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좋아. 정공법이 안 통한다면, 가장 더러운 방법을 써야지.”

백현석이 개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 하던 그의 손가락이 한 검찰 고위 간부의 이름에서 멈췄다.

“은소율 건, 지금 바로 터뜨려.”

그의 입술 사이로 잔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 * *

같은 시각, SBC 방송국 야외 주차장.

도현의 낡은 밴 차량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기묘한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형씨, 아니 도현이 형. 진짜 대박이다. 인터넷 난리 났어. 한여름 씨 인터뷰 터지자마자 스타더스트 주가 폭락하는 거 봤어?”

강태오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들뜬 모습이 제 나이 또래의 청년 같았다.

도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차분했지만, 가슴속에는 뜨거운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연기 잔고 원장’의 싱크 공명 효과 덕분인지, 몸 상태는 최상이었고 두뇌 회전도 평소보다 배는 빨랐다.

“이제 시작이야, 태오야. 백현석은 이 정도로 무너질 인간이 아니니까.”

“알지. 그래도 일단 첫 판은 우리가 완전히 압승한 거잖아. 촬영장 들어가면 스태프들 눈빛부터 다를 걸?”

태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든든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아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현이 짊어진 왕관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밴 차량이 촬영장 본부 건물이 보이는 입구로 진입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지직—!

차량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경쾌한 음악이 갑작스러운 노이즈와 함께 끊겼다. 이내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긴급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찰은 오늘 오전, 유명 여배우 은소율 씨를 마약 투약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피의자로 전격 체포했다고 밝혔습니다.]

순간, 도현의 손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차량이 급정거했다.

[검찰에 따르면 은 씨는 최근 강남의 모 클럽 등지에서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한 정황이 포착되었으며,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자택에서 신병을 확보했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은 씨는 과거 기획사 관련 스캔들 루머 이후 함묵증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번 수사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뭐?”

옆자리에 앉은 태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현의 시야가 다시 한번 차갑게 굳어갔다. 머릿속의 ‘연기 잔고 원장’이 요동치며 비활성화 상태였던 은소율의 이름 옆에 붉은색 해골 마크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현석의 사법 카르텔을 동원한 비열한 역습이었다. 은소율을 제물로 삼아 판을 다시 흔들려는 수작.

주차장 차창 너머로, 저 멀리 촬영장 본부 입구에 서 있는 백현석의 외제 차가 보였다.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도현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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