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리딩실에서 쥐새끼처럼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뭘 하나 했더니…… 여기서 우리 회사 밥그릇을 깨부수고 있었네, 서도현 씨.”

박민우가 선글라스를 천천히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비아냥거렸다. 그의 뒤편으로 늘어선 양복 사내들의 그림자가 좁은 골목 바닥을 길게 분할했다.

도현은 가만히 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강태오의 관절염과 억압된 분노 리스크를 인수한 대가로, 뼈마디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작열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의 안색은 창백할지언정 단단히 굳어 있었다.

“밥그릇을 깬 건 우리가 아니라, 그쪽 과장님 손버릇 같은데요.”

도현이 바닥에 흩어진 계약서 조각을 구두 끝으로 툭 차며 대꾸했다.

“뭐?”

박민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늘 대중의 찬사와 소속사의 과보호 속에서 군림해 온 그에게, 일개 신인 배우의 대거리란 생경한 모욕에 가까웠다.

“서도현, 너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지?”

도망쳤던 김 과장이 박민우의 한 걸음 뒤로 숨으며 씩씩댔다.

“민우 씨, 이 새끼들이 계약서 찢고 폭력까지 썼습니다! 태오 저 깡패 새끼는 물론이고, 저 서도현이라는 놈도 한패예요!”

박민우가 손을 가볍게 들어 김 과장의 주둥이를 막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도현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현의 눈빛. 기이할 정도로 맑으면서도, 그 심연에 시퍼런 칼날을 품은 듯한 기색이 박민우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김 과장. 서도현 씨가 폭력을 썼겠어? 이 바닥에서 연기 좀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불쌍한 신인인데.”

박민우가 도현에게로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고급 캐시미어 코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골목의 퀴퀴한 곰팡이 내를 덮어버렸다.

“근데 말이야. 서도현 씨. 연기라는 게 말이지, 대본 몇 줄 외워서 리딩실에서 소리 좀 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카메라 앵글에 맞춰 통제하는 기술이야. 넌 그게 안 돼서 사방에 짖고 다니는 거고.”

“기술이라.”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스타더스트의 대스타께서 가르침이라도 주시게요?”

“가르침까지는 아니고.”

박민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골목 모퉁이 너머를 가리켰다.

“마침 저 아래 공터에서 SBC 특집 단막극 야외 세트가 돌아가고 있거든. 리허설 카메라 세팅도 다 끝났고, 메인 감독 가기 전에 서브 디렉터들이 현장 지키고 있어. 어때? 진짜 '카메라 앞'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해볼래?”

도현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야외 세트장. 수많은 스태프와 보조 출연자들이 지켜보는 공개된 장소다. 박민우는 철저히 자신에게 유리한 홈그라운드로 도현을 끌어들여, 카메라 앞에서의 연륜 차이로 밟아버릴 생각이었다.

“도현아, 가지 마라. 저 새끼 잔머리 굴리는 거다.”

뒤에 서 있던 강태오가 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끝이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현은 도리어 태오의 거친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야 우측 하단에 떠오른 반투명한 푸른빛의 장부, ‘연기 잔고 원장’을 응시했다.

[보유 계약: 강태오 (리스크 인수율 30%)] [특수 옵션: 싱크 공명 (Sync-Resonance) - 비활성화 (조건 미충족)]

아직 비활성화 상태인 싱크 공명 옵션이 미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도현은 직감했다. 박민우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는 순간, 이 잠겨 있는 옵션맥이 터질 것이다.

“좋습니다. 가시죠.”

도현의 대답에 박민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 *

SBC 단막극 <거리의 포화> 야외 세트장.

임시로 가설된 골목길 세트에는 차가운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을 조각내고 있었다. 현장을 정리하던 서브 연출자들과 스태프들이 갑작스러운 박민우의 등장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박민우 씨 아니야? 오늘 촬영 없으시잖아요?”

조감독 한 명이 허리를 굽히며 다가왔다. 박민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거드름을 피우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후배 녀석이 카메라 연기를 너무 배우고 싶어 해서요. 마침 세트 불도 켜져 있겠다, 가볍게 동선 연습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조명만 좀 살려주세요.”

“아, 민우 씨가 하신다면야 당연히 괜찮죠! 바로 카메라 모니터 켜겠습니다!”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짜 가로등 불빛이 노란색 음영을 만들어내며 세트장을 비추었다.

박민우가 도현을 향해 턱짓했다.

“씬 넘버 14. 배신당한 중간 보스가 자신을 찌르러 온 길거리 양아치를 대면하는 장면이야. 내가 보스, 네가 양아치. 대사는 딱 세 줄씩만 가자. 즉흥 연기(Improv)로.”

과장된 제안이었지만, 도현은 묵묵히 세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도현이 가로등 불빛 아래 서자,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오던 태오의 무릎 통증이, 기이하게도 차가운 투지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박민우가 도현과 3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슬레이트 칩니다! 레디…….”

조감독의 목소리가 고요한 세트장에 박혔다.

“액션!”

큐 사인과 동시에 박민우의 몸짓이 변했다. 그는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만한 걸음걸이로 어깨를 젖히며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했다. 손가락 끝의 떨림, 고개를 까딱이는 각도까지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결국 왔네. 쥐새끼 같은 놈.”

박민우의 목소리는 묵직하게 깔렸지만, 어딘가 모르게 연극 무대 특유의 발성법이 섞여 있었다. 매체 연기치고는 톤이 지나치게 높고 인위적이었다. 대중에게 ‘완벽한 스타’로 포장된 그의 한계였다.

박민우는 도현이 자신의 기에 눌려 대사를 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의 확신이 차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들어 박민우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첫 번째 시선.

도현의 눈동자가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을 한낱 ‘지나가는 가구’ 정도로 취급하는 극도의 무관심이었다.

“……!!”

대사를 이어가려던 박민우의 호흡이 일순간 턱 막혔다.

자신을 압도하려던 온갖 화려한 몸짓들이, 도현의 그 냉담한 눈빛 하나에 부딪혀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몸짓으로 전락해 버린 탓이다.

도현은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곧 가장 강력한 리액션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메라 모니터를 보던 조감독의 동공이 커졌다.

“어, 어라……? 민우 씨 호흡이 꼬이는데?”

조감독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박민우는 당황했다. 상대가 받아쳐 주어야 다음 대사 톤을 높여 기선제압을 할 텐데, 도현은 그저 심해(深海)처럼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조바심이 난 박민우가 대사를 서둘렀다.

“말이 없군. 겁에 질려 혀라도 잘린 건가?”

그 순간, 도현이 움직였다.

짝-!

도현의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세트장을 찢었다.

두 번째 시선.

도현의 눈동자에 시퍼런 contempt(경멸)가 서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밑바닥 인생의 서러움을 겪어보지 못한 온실 속의 화초를 바라보는, 날것 그대로의 경멸이었다.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세트장 구석구석까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너, 연기 참 못한다.”

“……뭐?”

박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도현의 눈빛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현실감에, 박민우는 배역의 인물이 아닌 ‘인간 박민우’로서 긁히고 말았다.

“대본대로 안 해? 이 새끼가……!”

박민우가 이성을 잃고 도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세 번째 시선.

도현의 동공이 기괴할 정도로 확장되며,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은 먹이를 찢어 발기기 직전의 맹수가 뿜어내는 살의(殺意) 그 자체였다.

도현이 박민우의 뻗은 손목을 낚아챘다.

악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박민우는 마치 뱀에게 물린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굳어버렸다.

도현의 숨결이 박민우의 귓가에 닿았다.

“어설픈 흉내 내지 마. 진짜 길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놈들은…… 이렇게 눈을 뜨거든.”

도현의 목소리에는 강태오가 평생을 견뎌온 가난과 차별의 한(恨), 그리고 도현 자신의 회귀 전 파멸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순간, 도현의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등이 격렬하게 점멸했다.

[※ 경고: 싱크 공명(Sync-Resonance) 임계치 도달!] [보유 리스크의 왜곡된 감정이 시전자의 정신 영역을 침식합니다.] [싱크율 85%…… 90%……!]

도현의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강태오가 느꼈던 억울함,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도현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도현은 이를 악물고 그 통증을 카메라 앞에서의 ‘표정’으로 승화시켰다.

지독할 정도로 아름답고, 잔인할 정도로 처절한 표정이었다.

“……아.”

박민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도현의 눈빛에 깃든 압도적인 광기에 짓눌린 박민우는,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할리우드식 연기 톤이 완전히 조각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호흡은 산산이 부서졌고, 다리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툭.

박민우의 무릎이 힘없이 바닥으로 꺾였다.

스타더스트의 최고 배우가, 길거리 세트장 한복판에서 신인 배우의 눈빛 하나에 무참히 패배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의 눈가에 수치심과 공포로 얼룩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컷!!”

조감독의 다급한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세트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은 물론, 구경하던 보조 출연자들까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조감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짝, 짝, 짝…….

조감독의 박수를 시작으로, 세트장 여기저기서 억눌렸던 감탄사가 터져 나왔.

“이거…… 대박이다. 방금 동선이랑 눈빛 교환 봤어?”

“박민우가 완전히 밀렸는데? 저 신인 누구야? 소름 돋았어.”

스태프들의 수군거림이 가시가 되어 박민우의 심장에 박혔다.

* * *

한편, 세트장 구석의 어두운 조명 그림자 뒤편.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사내가 커다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조용히 내렸다.

스타더스트의 사주를 받고 도현의 뒤를 밟았던 삼류 황색 언론 기자, 김태준이었다.

그는 카메라 액정 화면을 확인하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에는 도현이 박민우의 손목을 낚아채고, 이내 박민우가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크으, 대박이네. 이거 앞뒤 다 자르고 ‘신인 배우 서도현, 선배 박민우에게 폭언 및 현장 갑질 폭행’으로 타이틀 뽑으면 포털 사이트 메인은 따놓은 당상이구만.”

김태준은 흥분으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노트북을 켜고 기사 송고 세팅을 시작했다.

그의 비열한 눈빛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뱀처럼 번뜩였다.

* * *

세트장 한가운데.

박민우는 여전히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충혈된 눈으로 도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분노와 굴욕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너…… 너 같은 쥐새끼가 감히 나한테 이런 수치를 줘? 네놈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 백 대표님이 너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박민우가 악에 받쳐 비명을 질렀다.

도현은 그런 박민우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가 그의 캐시미어 깃을 움켜쥐었다.

억세게 멱살을 틀어쥔 도현의 손길에 박민우의 비명이 컥, 하고 목구멍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도현이 얼굴을 가까이 밀착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저승사자처럼 차갑고 깊었다.

“박민우 씨.”

도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박민우의 귓전을 때렸다.

“백현석의 개로 사는 게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뭐, 뭐?”

“당신이 오늘 나한테 보여준 건 연기가 아니라, 주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개의 재롱잔치였어요. 잘 기억해 두세요.”

도현이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박민우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앞으로 당신이 서는 모든 카메라 앞이, 오늘처럼 지옥이 될 테니까.”

그 서늘한 선언과 함께, 도현은 박민우를 툭 던지듯 놓아주고는 뒤를 돌았다.

강태오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도현의 뒤를 따랐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박민우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절규가 야외 세트장의 밤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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