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기계적인 음성이 좁은 차 내부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 버렸다.

여배우 은소율, 마약 투약 혐의로 전격 체포.

운전대를 쥔 도현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가죽 커버가 짓눌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과 겹쳤다. 차창 너머, 촬영장 본부 건물 입구에 서 있던 검은색 마이바흐가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백현석의 얼굴이 뇌리에 박혔다. 한여름의 인터뷰로 스타더스트의 주가가 폭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터뜨린 사법 카르텔의 역습이었다.

“소율 씨가 마약이라고? 말도 안 돼. 그 누나가 어떤 사람인데……!”

조수석에 앉은 강태오가 스마트폰 화면을 거칠게 문지르며 소리쳤다. 그의 굵은 목줄기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턱근육을 단단히 맞물린 채 차 문을 열고 내렸다. 3월의 차가운 야외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기괴할 정도로 맑아졌다.

본부 건물로 들어서는 도현과 태오를 향해 스태프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수군거림과 은밀한 눈빛들이 얽히며 복도는 흡사 가시밭길 같았다. 대기실 문을 열기도 전에, 복도 저편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셨어? 아주 상전들이 나셨네.”

임 감독이었다. 그는 메인 모니터 앞에 삐딱하게 앉아 씹던 껌을 종이컵에 뱉어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대본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스타더스트의 간판, 박민우가 보였다.

박민우는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은소율의 체포 소식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서도현 씨, 그리고 강태오 씨. 지금 바깥 상황 돌고 도는 건 알지? 은소율 건으로 투자사고 제작사고 아주 난리가 났어. 여배우 하나 때문에 드라마 엎어지게 생겼다고.”

임 감독이 대본을 테이블 위로 팽개치며 쏘아붙였다.

“그래서 오늘 촬영 스케줄 전면 수정한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감정 씬들 다 뒤로 미루고, 박민우 배우 단독 씬이랑 너희 둘이 부딪히는 액션 대치 씬부터 몰아서 찍을 거야. 아, 참고로 대사 몇 줄 날아갔으니까 새로 나온 쪽대본 확인해.”

조감독이 허겁지겁 다가와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인쇄물을 내밀었다. 도현은 쪽대본을 받아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훑어내린 종이 위에는, 기존에 태오와 도현이 가지고 있던 감정선과 서사가 완전히 난도질당해 있었다. 주인공인 박민우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도현과 태오는 그저 길거리에서 으르렁거리는 삼류 양아치 A, B 수준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감독님, 이건 캐릭터의 뼈대를 완전히 뭉개는 대본 아닙니까?”

태오가 참지 못하고 한 걸음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거친 호흡이 좁은 대기실 안을 흔들었다.

“야, 강태오.”

박민우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신인이면 신인답게 주는 대본 대로 대사나 쳐. 지금 네까짓 감정선 챙겨줄 만큼 현장이 한가해 보여? 은소율 그 약쟁이 년 때문에 흙탕물 튀게 생긴 마당에, 주연 배우인 내가 분량 채워서 중심 잡아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약쟁이 년’이라는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태오의 주먹이 터질 듯이 쥐어졌다. 당장이라도 박민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발을 내딛는 태오의 어깨를, 도현이 가로막았다.

도현의 손아귀 힘이 태오의 어깨뼈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눌렀다.

“참아, 태오야.”

낮고 차분한, 그러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도현은 박민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쳤다.

“대본 수정본, 잘 받았습니다. 감독님 의도대로 가죠.”

“도현이 형!”

태오가 황당하다는 듯 도현을 바라보았지만, 도현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도현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것은 굴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잔혹한 살기였다.

도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암전되며, 머릿속에서 거대한 황금빛 장부가 스르륵 펼쳐졌다.

[연기 잔고 원장 (Acting Ledger)]

현재 보유한 한여름의 리스크 인수 마일리지는 45%. 그리고 강태오와의 계약 상태가 장부 중앙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도현은 장부의 하단, 어두운 구석에 비활성화된 채 굳어 있던 붉은색 체인 형태의 아이콘으로 시선을 돌렸다.

2화에서 한여름과의 계약을 맺을 당시, 원장 구석에서 아주 잠깐 명멸하다가 사라졌던 정체불명의 옵션.

[특수 연계 옵션: 싱크 공명 (Sync-Resonance)] - 활성화 조건: 계약 대상자와의 깊은 정서적 교감 및 공동의 적대 대상에 대한 극도의 투쟁심 공유. - 현재 강태오의 충성도: 92% (우레 같은 신뢰) - 현재 한여름의 잔류 싱크율: 48%

‘지금이다.’

도현은 심장 부근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스스로를 좀먹는 완벽주의적 강박, 백현석을 향한 피 끓는 증오, 그리고 동료들을 지키겠다는 집착이 뜨거운 도화선이 되어 장부의 시스템을 관통했다.

키잉—!

귀를 찌르는 이명이 일며, 비활성화되어 있던 붉은 체인 아이콘이 깨지듯 갈라졌다. 이내 황금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광폭한 에너지가 도현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싱크 공명(Sync-Resonance)’ 옵션이 최초로 개방되었습니다!] [대상자 ‘강태오’와의 감정 및 연기 시너지 싱크율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됩니다.] [주의: 싱크 공명 상태에서는 대상자의 억압된 트라우마와 분노가 시전자에게 2배로 역류합니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길거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업계에서 무시당하고 짓밟혀 왔던 강태오의 서러움, 날것 그대로의 분노가 도현의 이성 속으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도현은 그 통증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 고통은 자해가 아니다. 상대를 압도하기 위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벼리는 과정이었다.

“태오야.”

도현이 피 가죽이 맺힌 손으로 태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숨 쉬어. 그리고 내 눈만 봐.”

태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도현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기이한 진동과 압도적인 공기감에 태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싱크 공명이 발효되는 순간이었다. 태오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억울함이 사라지고, 굶주린 이리의 야성적인 안광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리허설 들어간다.”

도현은 쪽대본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대기실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울렸다. 박민우는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았고, 임 감독은 메가폰을 쥔 채 하품을 삼켰다.

“자, 대충 동선만 맞춰봐. 어차피 여긴 민우 독백 뒤에 너희가 리액션만 따주는 씬이니까.”

임 감독의 무성의한 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도현과 태오가 세트장 중앙, 낡은 가로등 모형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현장의 공기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스태프들이 손에 쥐고 있던 장비들을 멈칫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무력해 보이던 신인 배우들의 어깨에서,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먼저 대사를 쳤다. 쪽대본에 적힌 가벼운 양아치의 대사가 아니었다. 원작 대본에서 가장 날카롭고 깊이 있는, 캐릭터의 본질을 꿰뚫는 대사였다.

“……여기가 네가 말한 마지막 종착지냐?”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세트장 사방의 벽을 타고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눈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 같았다. 스스로를 파괴할 듯한 자해적 강박이 고스란히 분노와 오기로 치환되어 뿜어져 나왔다.

태오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싱크 공명으로 연결된 태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전율이었다.

“그래. 더 갈 곳도 없잖아. 형이나 나나, 이미 버려진 목숨인데.”

태오의 목소리에 야성적인 한(恨)과 억압된 슬픔이 묻어났다. 대본에 적힌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었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끝내 살아남고자 발악하는, 날것 그대로의 짐승이 그곳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서로의 눈빛을 극도로 자극하며 연기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인터랙티브 연기 배틀.

“컷, 컷! 잠깐만!”

임 감독이 당황한 듯 벌떡 일어섰다.

“야! 대본대로 안 해? 대사가 왜 멋대로 바뀌어? 그리고 박민우 배우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왜 너희 둘이 앵글을 다 독식해?”

박민우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리허설일 뿐인데도, 도현과 태오가 만들어내는 공기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이 들어갈 틈새조차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연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밑바닥부터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감독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임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임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이 씬의 본질은 삼류 양아치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는 두 인간의 처절한 연대입니다. 그래야 뒤이어 등장하는 박민우 선배님의 캐릭터가 가진 냉혹함이 극대화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대본의 허점을 꿰뚫고 작품의 질을 극상으로 끌어올리는 배우의 눈.

임 감독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도현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스태프들도 숨을 죽인 채 도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현장의 주도권은 이미 감독이 아닌, 세트장 중앙에 선 서도현에게 넘어가 있었다.

“……좋아. 그럼 방금 톤 그대로 본 촬영 간다. 카메라 세팅 다시 해! 투샷 타이트하게 잡아!”

임 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민우는 입술을 깨물며 세트장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의 눈에 질투와 당혹감이 가득 찼다. 자신이 빛나야 할 무대에서, 완벽한 병풍으로 밀려나 버린 톱스타의 비참한 몰골이었다.

“레디……”

조감독의 슬레이트가 허공에 섰다.

도현과 태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싱크 공명의 붉은 선이 두 사람의 심장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도현은 태오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보여주자, 진짜 연기가 뭔지.”

태오가 이빨을 드러내며 거칠게 웃었다.

“탁!”

“큐!”

카메라 빨간 불빛이 켜지는 순간, 공간 전체가 얼어붙었다.

[극중극 콘티: 골목길 대치 씬] - S# 42. 야외 골목길 (밤) - 카메라, 도현(태수 역)의 타이트한 바스트 샷으로 시작. - 도현의 눈빛, 갈 곳 없는 분노와 스스로를 좀먹는 슬픔이 뒤섞여 형형하게 빛난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땀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진다.

“네가 날 배신했어도, 난 널 안 버려.”

도현의 대사가 떨어지는 순간, 카메라 너머의 촬영 감독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대사 한 마디에 담긴 감정의 밀도가 렌즈를 깨뜨릴 것처럼 강렬했다.

카메라 기어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태오(동철 역)의 얼굴을 담는다.

태오는 도현의 압도적인 눈빛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쳐 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며, 억눌린 눈물이 차올랐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형. 나 때문에 형까지 죽어!”

태오가 도현의 멱살을 잡았다. 찢어질 듯한 목소리, 손가락 끝의 떨림, 그리고 거친 호흡. 두 배우의 리액션이 실시간으로 공명하며 촬영장 전체의 공기를 지배했다.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굳어 버렸다. 박민우는 세트 구석에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저 연기 속으로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단 1인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주연급 아우라를 뿜어내는 두 조연의 투샷. 그것은 연출의 편향과 대본의 난도질을 비웃듯,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압살적인 명장면이었다.

“컷! 오케이! 완벽해!”

임 감독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울려 퍼졌다.

몇 초간의 정적 뒤, 현장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촬영 감독은 흥분한 얼굴로 도현과 태오에게 엄지를 치켜세웠고, 조감독들은 소름 돋은 팔을 비벼댔다.

강태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현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배우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형…… 우리 해냈어.”

“그래. 잘했다, 태오야.”

도현은 태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쁨과 성취감. 조연의 한계를 부수고 현장을 지배했다는 승리감이 온몸을 채웠다.

하지만 그 따뜻한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징—! 징—!

도현의 바지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머릿속의 ‘연기 잔고 원장’이 기괴한 경고음을 울리며 붉은빛으로 점멸했다.

[경고: 계약 대상자 ‘은소율’의 리스크 수치 폭등!] [위험도: 95% (사회적 타살 직전)]

도현이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와 SNS 핫토픽 창이 순식간에 피처럼 붉은 헤드라인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실시간 속보] 배우 은소율, 재벌 3세 스폰서 및 마약 파티 참석 폭로 찌라시 유포. [충격] 은소율, 과거 함묵증 핑계로 수사 회피 시도 정황 포착? 기획사 비공개 문건 폭로.

인터넷 세상 전체가 은소율이라는 이름을 난도질하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현장의 박수 소리가 도현의 귀에서 소름 끼치도록 멀어졌다. 원장 화면 구석, 은소율의 이름 위에 새겨진 붉은 해골 마크의 카운트다운이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백현석이 쳐놓은 덫이 마침내 은소율의 목을 완전히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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