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건방진 목이 언제까지 빳빳하게 서 있을 수 있을지, 내가 똑똑히 지켜봐 주마. 촬영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넌 지옥을 보게 될 거야.”
백현석의 목소리는 뱀의 비늘이 쓸리는 것처럼 축축하고 서늘했다.
그가 몸을 돌려 SBC 제3대본 리딩실의 무거운 철문을 밀치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도현은 가만히 멈춰 서서 그의 등 뒤를 응시했다. 시선 끝에 걸린 백현석의 넓은 어깨 위로, 오직 도현의 눈에만 보이는 청색의 투명한 장부가 허공에 일렁였다.
도현은 호흡을 가만히 내쉬며 마음속으로 원장의 붉은 인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백현석이라는 이름 석 자 위에 주저 없이 낙인을 내리찍었다.
쾅-!
귓가에만 들리는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백현석의 머리 위에 붉은색 글자가 선명하게 박혔다.
[※ 특수 기능 작동: ‘파멸 예약 낙인 (Doom Brand)’] - 대상: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백현석’ - 상태: 낙인 부여 완료. 대상의 몰락 시나리오가 원장에 기록됩니다. - 잔여 시간: 몰락까지 앞으로 31일.
‘31일.’
도현의 입꼬리가 가파르게 비틀려 올라갔다. 한 달이다. 백현석이 구축해 놓은 그 견고하고 추악한 성벽이 흙탕물처럼 무너져 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한 달에 불과했다.
도현은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느리게 닦아냈다. 손톱이 살 속을 파고든 자리에 맺힌 붉은 피가 배역 확정서의 모퉁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 숨이 가빴다. 한여름의 공황 장애 리스크를 인수한 대가로 명치끝이 옥죄어오는 통증이 간간이 뇌리를 스쳤지만, 도현은 턱관절을 악물며 그 고통마저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구겨 넣었다.
***
그날 오후 3시,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빛 골목 야외 세트장.
시멘트 가루와 낡은 목재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골목길은 구경꾼들과 스태프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른바 ‘길거리 액션 느와르’라 불리는 단막극의 촬영 현장이었다.
도현은 낡은 점퍼 깃을 올린 채 인파의 뒤편에 섰다. 먼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눈이 시렸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쳐볼 테면 쳐봐!”
찢어지는 듯한 고함과 함께 한 남자가 흙바닥 위를 굴렀다.
강태오.
스물넷의 나이, 정식 프로필 사진 한 장 없이 길거리를 전전하며 단역과 대역을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던 야생의 천재였다. 가죽 재킷을 걸친 태오의 얼굴은 분장인지 진짜 피인지 모를 붉은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덫에 걸린 들개처럼 사나웠고, 턱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에이, 씨발…….”
태오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왼쪽 다리가 미세하게 절뚝거리는 것이 도현의 눈에 포착되었다. 무릎 연골이 이미 닳아 없어질 대로 없어진 상태였다.
“컷! 오케이! 강태오 씨, 방금 좋았어. 근데 다음 테이크는 저기 2층 옹벽에서 떨어지는 신이니까 대역 세팅 좀 바꿀게요!”
감독의 무심한 외침에 태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감싸 쥐는 그의 손가락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도현은 집중했다. 그의 시야가 흐려지며, 연기 잔고 원장의 청색 창이 강태오의 몸 위로 겹쳐지듯 떠올랐다.
[대상: 강태오 (24, 무소속 배우)] - 잠재 재능 등급: S (야성적 몰입, 신체 통제력 극상) - 현재 상태: 좌측 슬관절 반월상 연골 파열 위험, 척추 측만증 진행 중. - 보유 리스크: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소모성 대역 계약 대기 중. 3일 뒤 촬영 중 안전장치 미비로 인한 낙상 사고 발생 예정 -> ‘하반신 마비 리스크 (85%)’.
하반신 마비.
회귀 전, 강태오는 단 한 번의 사고로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며 업계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비운의 배우였다. 그의 재능을 탐낸 백현석이 일회성 대역 계약서로 그를 묶어두고, 사고가 나자마자 폐기물처럼 버렸던 잔혹한 진실이 도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막는다.’
도현은 손가락을 뻗어 허공의 장부를 쓸어내렸다.
[※ 리스크 인수 계약을 발동하시겠습니까?] - 인수 대상: 강태오의 ‘하반신 마비 및 척추 손상 리스크’ 50% - 계약 대가: 대상자의 물리적 부상 지연 및 재능 개화. 인수자(서도현)에게 척추 부근의 영구적 방사통 및 요통 잔존물 20% 누적.
도현은 주저 없이 붉은 인장을 눌렀다.
[계약 체결 완료. 강태오의 불행 리스크가 서도현의 원장으로 이관됩니다.]
순간, 척추 아래쪽에서부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방사통이 도현의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으윽…….”
도현은 신음을 삼키며 벽을 짚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지독한 통증이었지만, 동시에 기묘한 해방감이 전신을 감쌌다.
원장의 우측 하단 구석을 바라보았다. 한여름과의 계약 당시 비활성화되어 있던 ‘싱크 공명(Sync-Resonance)’ 옵션이, 강태오의 리스크가 더해지자 푸른빛을 미세하게 발산하며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발동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했으나, 두 사람의 운명이 도현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엮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도현은 통증을 억누르며 태오가 있는 골목 모퉁이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오는 촬영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골목 구석에서 찌그러진 캔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근처에 스태프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 담배 좀 빌립시다.”
도현이 정적을 깨며 다가갔다.
태오는 고개를 느리게 치켜들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이마 위로 뻗친 머리카락 사이로, 사나운 눈동자가 도현을 꿰뚫어 보았다. 태오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차갑게 읊조렸다.
“꺼져라. 애송이 새끼가 어디서 알짱거려.”
“애송이라.”
도현은 피식 웃으며 태오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가죽 재킷 주머니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 안에는 스타더스트의 로고가 선명히 박힌 흰색 서류 봉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 봉투 안에 든 거, 계약서 맞지?”
태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잔인하게 짓밟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툭-!
“네놈이 뭔데 남의 주머니 사정을 캐물어? 기획사 빽 믿고 들어온 낙하산 새끼 같은데, 몸 사리고 가던 길 가라. 뼈 부러지기 싫으면.”
태오의 목소리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밀려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오히려 태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도현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기괴할 만큼 깊고 형형하게 변했다. 촬영장의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로 수렴하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골목을 지배했다.
“그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네 다리는 영원히 쓰지 못하게 될 거야.”
태오의 신체 조건과 눈빛, 그리고 긴장된 호흡을 분석한 도현의 목소리는 오차 없는 칼날과 같았다.
“뭐?”
“스타더스트가 왜 너 같은 길거리 단역한테 관심을 가졌을 것 같아? 네 연기력? 네 가능성? 아니. 그들은 그냥 싸게 쓰고 버릴 ‘소모품 고기방패’가 필요한 것뿐이야. 안전장치도 제대로 안 된 2층 옹벽에서 네 몸을 던지게 만들고, 사고가 나면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들이밀며 널 쓰레기통에 쳐넣겠지.”
태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스타더스트와의 접촉을, 그리고 바로 오늘 있을 낙상 신의 위험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도현의 눈빛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태오는 본능적으로 도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이 바닥에서 나 같은 놈이 몸뚱이 말고 뭘 더 팔 수 있는데! 이거 안 하면 난 평생 밑바닥이야!”
태오의 턱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절규는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결핍에서 우러나온 비명이었다.
도현은 멱살을 잡힌 채로도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며, 기묘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너의 진짜 캔버스가 되어 주겠다.”
“……뭐?”
“네 그 미친 야성과 날것 그대로의 연기를 고스란히 받아줄 그릇이 되어 주겠다고, 내가. 스타더스트의 노예가 아니라, 내 옆에서 진짜 배우로 서라. 강태오.”
도현의 고요하면서도 압도적인 선언에 태오는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을 스르륵 잃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도현은,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기획사 앞잡이’들과도 달랐다. 온몸을 전율케 하는 진짜 예술가의 광기가 도현의 눈동자 뒤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이, 거기서 뭐 삼류 드라마 찍고 있어?”
골목 입구에서 짝퉁 명품 구두를 찌걱거리며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타더스트의 캐스팅 에이전트이자, 송 실장의 수하인 김 과장이었다.
김 과장은 손에 태블릿과 펜을 든 채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덩치 큰 수행원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강태오 씨, 대표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전속 계약서니까 군말 말고 여기 사인해. 오늘 낙상 신 찍기 전에 서류 정리 확실히 해야 무대 뒤풀이라도 챙겨주지 않겠어?”
김 과장이 태오의 가슴팍에 펜을 툭툭 던지듯 들이밀었다.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갈등하는 눈빛으로 계약서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평생을 꿈꿔왔던 거대 기획사로의 진입 장벽이 눈앞에 있었다. 비록 그것이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잡고 싶은 것이 밑바닥 인생의 본능이었다.
그 순간, 도현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덥석-!
도현의 손이 김 과장이 들고 있던 계약서 뭉치를 낚아챘다.
“어? 뭐야, 이 미친 새끼는? 너 서도현 아니야?”
김 과장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도현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연기 잔고 원장의 분석 능력을 시각 스캔 형식으로 계약서에 동조시켰다. 도현의 시야 속에서 계약서의 텍스트들이 붉은색 독소 조항으로 선명하게 분류되어 떠올랐다.
도현의 입술이 차갑게 열렸다.
“제4조 2항. ‘을의 연기 활동 중 발생하는 신체적 부상 및 사고에 대하여, 갑은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도의적 책임을 제외한 일체의 재정적 보상 의무를 지지 아니한다.’ 도의적 책임? 치료비 몇 푼 쥐여주고 내쫓겠다는 소리지.”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제7조 1항. ‘을의 모든 출연료 및 지적 재산권은 갑에게 영구 귀속되며, 최초 5년간 수익 분배 비율은 갑 9, 을 1로 한다.’ 9 대 1? 이건 계약서가 아니라 현대판 노예 문서야.”
골목길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태오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도현이 읽어 내려가는 조항들은 그가 미처 꼼꼼히 읽지 못했던, 혹은 기획사의 이름값에 눈이 멀어 애써 외면했던 추악한 독소들이었다.
“이, 이 새끼가 어디서 영업 방해야! 야, 뺏어!”
김 과장이 소리를 지르며 수행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덩치 큰 사내들이 주먹을 쥐며 도현에게 다가오는 그 찰나, 도현은 조소하며 손에 쥔 계약서를 크게 치켜들었다.
찌이이익-!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골목에 울려 퍼졌다.
도현은 김 과장의 눈앞에서 계약서를 반으로 찢어발겼다. 그것도 모자라 조각조각 세로로 찢어내며 사방으로 흩뿌렸다. 흰색 종이 조각들이 마치 한겨울의 쓰레기 같은 눈발처럼 골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쳤어? 진짜 미쳤냐고, 이 발연기 찌끄레기 새끼가!”
김 과장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리며 펄펄 뛰었다.
도현은 흩날리는 종이 조각 사이로 김 과장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
“가서 백현석한테 전해라. 강태오는 스타더스트의 개 노릇 할 생각 없다고. 그리고 이딴 사기 계약서로 애들 등쳐먹는 짓거리도 이번 달이 마지막일 거라고.”
“이, 이…… 건방진 새끼가!”
김 과장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수행원들에게 소리쳤다.
“쳐라! 저 새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놔!”
사내들이 도현의 덜미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가죽 재킷을 입은 거구의 그림자가 도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퍼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김 과장의 수행원 한 명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강태오였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털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무릎 통증은 도현이 리스크를 인수한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가벼워진 몸으로 날리는 그의 펀치는 야수 그 자체였다.
“내 손님한테 손대지 마라. 이 양아치 새끼들아.”
태오의 목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김 과장은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흩어진 계약서 조각들을 허겁지겁 긁어모으는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너, 너희들 후회할 거야! 스타더스트를 상대로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김 과장이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골목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골목 안에는 이제 도현과 태오, 두 사람만이 남았다.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는 고요 속에서 태오는 아주 느리게 도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아까의 사나움 대신,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과 경외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태오가 밭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현은 척추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통증을 견디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가 통하겠네.”
도현이 손을 내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골목 입구에서 마른 흙더미가 밟히는 소리와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느리게 박수를 치며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차가운 선글라스 너머로 빛나는 오만한 눈빛.
스타더스트의 간판스타이자, 백현석의 가장 강력한 심복.
박민우였다.
그의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골목의 유일한 출구를 완벽하게 가로막아 섰다.
박민우는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어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도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리딩실에서 쥐새끼처럼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뭘 하나 했더니…… 여기서 우리 회사 밥그릇을 깨부수고 있었네, 서도현 씨.”
박민우의 목소리가 골목의 차가운 시멘트 벽에 부딪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도현은 내밀려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천재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촬영장의 공기가 일순간에 진공 상태처럼 팽팽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