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도연의 오른손을 제 뺨에 밀어붙였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뇌수까지 스며들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두 손가락, 온기라고는 한 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기괴한 감촉에 대고 지원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그 순간이었다.
도연의 차가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의 일렁임이 지원의 눈꺼풀 안쪽을 강타했다. 단순한 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게 얼어붙은 영혼의 잔상이었고, 그 잔상이 심장에 닿는 순간 5년 동안 단단히 닫혀 있던 기억의 빗장이 우지끈 부러져 나갔다.
머릿속이 번쩍하며 눈앞의 신림당 풍경이 가차 없이 찢겨 나갔다.
*콰르릉! 과작!*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지독한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5년 전, 그 폭우가 쏟아지던 밤의 도로였다. 찌그러진 차체 내부, 자욱한 연기 사이로 뒤엉킨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원은 제 눈앞에 펼쳐진 환영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환영 속의 도연은 도망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깨진 앞유리 파편이 목덜미와 어깨를 사정없이 도려내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와중에도,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지원을 완전히 감싸 안고 있었다. 찌그러진 철근이 그의 등을 짓누르고, 유리 파편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도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원아…… 한지원, 정신 차려……."
도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오직 지원의 감긴 눈꺼풀에만 머물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아득하게 울릴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급대원들이 차 문을 뜯어내고 자신을 끌어내려 할 때까지, 도연은 지원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묻은 채 그 가혹한 짐짝 같은 고통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 내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을 덮쳐오던 가해자의 그림자가 실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도연의 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버려두고 홀로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다는 비열한 오해는, 진실의 빛바랜 장막 뒤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아…… 아아……!"
지원의 입술에서 젖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늘 그녀를 괴롭히던 지독한 발작. 그 발작이 시작될 때마다 안개 속에서 날카롭게 산산조각 나며 종말처럼 쏟아지던 푸른 유리 파편의 정체. 그것은 자기를 해치려던 괴물이 아니었다. 사고의 순간, 도연의 등 뒤로 가차 없이 쏟아져 내리던 차량의 앞유리창,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파편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도연의 마지막 방어벽이었다.
가장 끔찍했던 트라우마의 실체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했던 사랑의 흔적이었다.
지원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폐부 깊숙이 고여 있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온전한 숨이 차올랐다. 오해가 완전히 해소되는 순간,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던 공황의 사슬이 산산이 조각나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그 대가는 도연의 육체에 고스란히 내려앉고 있었다.
"도연아…… 강도연……!"
지원이 초점을 잃어가는 도연의 눈동자를 붙잡았다.
도연의 유독 차갑게 식어 아무리 비벼도 피가 돌지 않던 오른손 새끼손가락. 1화에서부터 그를 괴롭히던 그 지독한 저림 현상은, 우림리의 차가운 기후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수의 계약'이 시작되면서 그의 영혼과 육체가 파멸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가장 가혹하고 정직한 신체적 전조 증상이었다. 첫 번째 손가락이 굳어버린 것에 이어, 이제 그의 손은 세 번째 사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스스슥.*
기이한 마찰음과 함께 도연의 오른손 중지 끝이 급격하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붉은 핏기가 밀려나고, 석고 인형처럼 하얗게 굳어가는 마비의 낙인이 손가락 마디를 타고 무섭게 기어 올라갔다.
"비가…… 멈추지 않는구나."
신림당의 문턱에 선 박혜순이 젖은 우비를 벗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는 슬픔과 체념, 그리고 완고한 규칙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 혜순의 시선이 도연의 오른손을 지나 피아노 건반 밑바닥으로 향했다.
"내가 경고했지 않느냐. 이 짓을 시작하면 남는 것은 껍데기뿐이라고."
혜순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아래쪽의 틈새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무죽죽하게 말라붙은 흔적이 끈적하게 엉겨 있었다.
"건반 밑바닥에 숨겨진 붉은 수액 흔적…… 그게 뭔지 아느냐? 너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미련한 자들이 제 살과 피를 깎아 건반에 바친 흔적이다. 대가를 치른 자들의 종말은 예외 없이 이 건반 밑바닥에 피눈물로 고이는 법이지."
혜순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이제 세 번째다. 중지마저 굳어버리면, 너는 더 이상 피아니스트가 아니야. 손가락 두 개만 남은 병신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단 말이다!"
도연은 혜순의 외침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지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오른손 중지는 이미 마디 중간까지 완전히 감각을 잃고 굳어 버렸다. 손가락뼈가 안쪽에서부터 비틀리며 굳어가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도연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안 돼…… 싫어……."
지원은 도연의 하얗게 굳어가는 중지를 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의 온기를 전부 불어넣어서라도 그 마비의 사슬을 녹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온기는 초자연적인 계약의 섭리를 거스르지 못했다. 손끝에서 전달되는 것은 오직 굳어가는 뼈마디의 서늘함뿐이었다.
지원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치솟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몸을 부수고 있는 이 남자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언제나 받기만 했던 구원의 서사를 이제는 제 손으로 깨뜨려야 했다. 도연의 독점적인 희생 아래 편안히 숨 쉬는 삶 따위, 그녀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었다.
지원은 눈물을 닦아내며 도연의 가슴팍을 밀치고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상처받은 피해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길어 올린, 결연하고 단단한 의지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강도연, 똑똑히 들어."
지원의 목소리가 신림당 내부의 빗소리를 뚫고 명징하게 울려 퍼졌다.
"네 손가락을 제물로 바쳐서 얻는 평온 따위, 나한테는 지옥보다 끔찍해. 네가 날 위해 죽어가겠다면, 나는 네 손을 잡고 같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거야."
도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지원아, 너는……."
"이제 내가 너를 살릴 거야."
지원은 피아노 건반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도연의 마비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포개었다.
"네가 치는 모든 건반에 내 손가락을 얹을 거야. 고통이든, 마비든, 지옥이든…… 이제는 같이 나눠 가져. 혼자서 다 짊어지고 멋지게 사라질 생각 하지 마."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가혹한 우림리의 비틀린 계약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대등한 구원자로서의 천명이었다. 이인조의 구원 의지가 탄생하는 순간, 신림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음울한 공기가 미세하게 짓눌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창문 틈새로 들이치는 안개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우림리의 법칙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명이 깊어질수록 거세지는 에너지에 반비례하여, 도연의 오른손에는 기어이 세 번째 사슬이 완성되고 있었다.
*뚜둑.*
뼈가 맞물리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도연의 오른손 중지가 완전히 하얗게 석화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은 엄지와 검지, 단 두 개뿐이었다. 세 개의 손가락이 마비되어 구부러지지도 않는 기괴하고 처절한 형태의 손. 도연은 자신의 망가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의 절벽 끝이었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도망쳐, 지원아!"
도연이 평생 참아왔던 진심을 터뜨리며 소리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찢겨 나갔다. 냉랭하게 닫아걸었던 그의 가면이 완전히 박살 나며,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날것의 감정이 폭발했다.
"내가 더 아파도 상관없어! 손가락 따위 전부 부서져서 다신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된다 해도 괜찮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제발 내 곁에서 아프지 말고 숨만 쉬어!"
그것은 자학적인 회피로 일관하던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이기적이고도 절박한 소유욕이었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파멸하겠다는,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폭우가 신림당의 창문을 깨부술 듯이 사납게 두드려 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물러설 곳 없는 절벽 끝에서, 서로를 향한 갈망이 극점에 달한 순간이었다.
도연은 왼손으로 지원의 뒷덜미를 거칠게 감싸 쥐었다. 마비된 오른손의 한기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틈새를 메웠다. 지원이 피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빗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한복판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영혼의 언약을 맺듯이 처절하고 뜨겁게 겹쳐졌다.
숨결이 엉키고, 서로의 눈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려 짠맛을 남겼다. 그것은 구원을 향한 서막이자, 비틀린 운명을 향해 던지는 가장 아름다운 반역이었다.
창밖에 번개가 내리치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면에 길게 늘어뜨렸고, 피아노의 건반들은 여전히 낮은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다음 파멸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 숨결은 뜨겁고도 시렸다. 도연의 왼손 손가락들이 지원의 어깨깃을 부스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가는 동안, 그의 오른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은 채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세 개의 손가락은 죽은 나뭇가지처럼 아무런 반동도 없이 그의 옆구리춤에 대롱거렸다.
"하, 미련한 것들."
혜순의 갈라진 목소리가 두 사람의 밭은 숨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거친 손이 가죽 끈을 쥔 채 바르르 떨렸다. 혜순의 눈에 고인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닌,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섭리에 대한 공포였다.
"우수의 계약은 장난이 아니다. 비가 내리는 한, 이 마을의 피아노는 누군가의 온전한 파멸만을 먹고 자라지. 둘이서 나누어 갖겠다고? 그건 나누는 게 아니라, 둘 다 구렁텅이로 기어 들어가는 짓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반 도크 깊은 곳에서부터 기괴한 진동이 신림당의 바닥을 흔들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타악기 소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피아노 줄이 제풀에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커흑!*
도연의 상체가 앞으로 꺾였다. 그의 척추를 타고 차가운 전류 같은 충격이 내리쳤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듯, 그의 팔이 강제로 피아노 건반 위로 끌려갔다.
"도연아!"
지원이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초자연적인 인력은 인간의 힘을 가볍게 비웃었다. 굳어버린 세 손가락 옆에서, 아직 살아 움직이던 오른손 검지가 건반의 옥타브 위로 강제로 펼쳐졌다. 건반이 스스로 아래로 내려앉으려 무겁게 머리를 숙였다. 네 번째 손가락의 마비가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지원은 망설이지 않고 제 몸을 건반 위로 던졌다. 도연의 손가락과 건반 사이, 좁은 틈새로 그녀의 양손을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건반 모서리가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 돼. 치지 마. 내가 감당할 테니까, 차라리 내 머리를 다시 깨부숴!"
건반이 지원의 손등을 짓누르는 압력과 도연의 손가락을 끌어당기는 계약의 힘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하얀 건반을 적시고, 건반 밑바닥의 묵은 핏자국과 섞여 들어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신림당의 낡은 목조 문이 완전히 부서질 듯 젖혀졌다.
*쾅!*
문이 벽구석에 부딪히며 거친 파편을 흩뿌렸다. 들이치는 빗줄기 너머로, 우산을 거꾸로 쥔 사내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구겨진 가죽 재킷에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 손길, 그리고 비열하게 찌그러진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한태만이었다.
그의 뒤로는 우림리 노인회의 감시자들이 장대비 속에서 귀신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외지인의 난입을 방조하면서도, 제물의 도망을 막겠다는 기괴한 합의가 서려 있었다.
"야, 한지원. 여기 숨어서 소꿉장난하고 있었냐?"
태만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액정이 산산조각 난 지원의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피를 흘리며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손, 그리고 기괴하게 마비된 도연의 손가락들에 머물렀다.
"소문이 진짜였네. 이 미친 동네에 오면 가짜 광증이 싹 낫는다는 게."
태만의 눈에 탐욕스러운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지원의 목덜미를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너 때문에 날아간 투자금이 얼마인지 알아? 대가리 좀 나았으면 군말 말고 따라와. 그리고 저기 반병신 된 피아니스트 새끼."
태만이 발끝으로 피아노 다리를 거칠게 걷어찼다. 기괴한 불협화음이 신림당의 천장으로 무겁게 흩어졌다.
"손가락 두 개 남았다며? 그거 마저 부러지기 전에 이 년 완전히 고쳐 놔. 그래야 내가 서울 데려가서 본전을 뽑을 거 아니야."
도연의 두 눈이 서슬 퍼런 살기로 번뜩였다. 마비된 손가락 끝에서 고통 대신 분노가 차오르며, 그의 남은 손가락들이 건반을 부수어 버릴 듯 힘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 서 있던 노인회의 노인들이 쇠갈퀴를 쥔 채 한 걸음 더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이 도연의 마지막 남은 손가락들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더욱 사납게 창문을 두드렸고, 사방을 포위한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벼랑 끝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