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솨아아아―.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온 낙수들이 스테인리스 싱크대 바닥을 사정없이 때렸다. 도연은 거칠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물물이 손등을 적시고 손가락뼈 사이사이로 흘러내렸지만, 감각은 오직 네 갈래로만 갈라져 들어왔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지독할 정도로 시린 통증이 네 손가락을 마비시킬 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가장자리에 매달린 새끼손가락만은 예외였다. 도연은 왼손을 뻗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었으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타인의 부러진 뼈를 만지는 것처럼 둔탁하고 이질적인 감촉만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단순한 저림이 아니야.’

우림리에 첫발을 디뎠던 날부터 유독 차갑게 식어 내리던 손가락이었다. 아무리 비벼도 피가 돌지 않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잔잔한 통증만을 보내오던 그 부위. 그것은 다가올 비극을 알리는 전조였고, 우수의 계약이 육체에 새긴 첫 번째 낙인이었다.

지원의 고통을 거두어 간 대가는 정직하고 가혹했다.

도연은 젖은 손을 털지도 못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빗소리가 겹쳐 흘렀다. 손가락 하나가 완전히 죽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 하나의 상실은 건반 위 세상의 10분의 1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도연은 입술을 깨물며 오른손을 외투 주머니 속에 억지로 우겨넣었다. 주먹을 쥐려 해도 새끼손가락 혼자 축 늘어져 주머니 안감을 쓸었다. 그 이물감에 피가 마르는 듯한 고독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표정을 지워냈다.

달칵.

싱크대 옆의 낡은 나무 문을 열고 홀로 나섰다.

LP 바 신림당의 어두운 조명 아래, 지원이 서 있었다. 아까의 발작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호흡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연의 대속 연주가 그녀의 영혼을 덮쳤던 끔찍한 공황을 깨끗이 씻어낸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가라앉지 않았다. 넓은 홀의 중앙에 꼿꼿이 선 채, 그녀는 문을 열고 나오는 도연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도연은 주머니에 꼽아 넣은 오른손에 힘을 주며 왼손으로 그녀의 가죽 지갑을 내밀었다.

“이거. 아까 떨어뜨렸어.”

지원이 흙먼지가 조금 묻은 지갑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도연의 왼손등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고마워.”

지원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으나 단호했다. 그녀는 지갑을 받아 쥐고도 도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어깨 너머로 깊게 박혀 있는 오른손의 행방을 좇고 있었다.

“손은 왜 그래?”

지원의 질문이 정적을 깨뜨렸다.

“추워서.”

도연은 상투적인 대답을 던지며 시선을 비꼈다.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 애썼지만, 주머니 속에서 제어되지 않는 새끼손가락이 자꾸만 허벅지를 건드리는 탓에 신경이 곤두섰다.

“우림리 비는 원래 차가우니까.”

“거짓말.”

지원이 한 걸음 다가왔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숨결이 스산한 공기 속에서 하얗게 흩어졌다.

“너 아까 피아노 칠 때, 마지막에 손 뗐을 때부터 계속 그러고 있어. 오른손, 주머니에서 한 번도 안 꺼냈잖아.”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봐.”

도연은 지갑 속에서 흘끗 보았던 처방전과 한태만의 문자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의 어조는 의도적으로 더 차갑고 딱딱해졌다. 타인을 밀어내는 데 가장 익숙한 그의 방어기제였다.

“한태만한테 연락 왔었어. 네 지갑 속 전화기로.”

지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고통에서 구원받아 맑아졌던 안색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도연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지만, 짐짓 덤덤한 척 말을 이어갔다.

“여기가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뜻이야. 그 인간이 네 뒤를 쫓고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이 내 손가락 따위에 참견할 시간 있으면, 어떻게 도망칠지나 생각해.”

독설에 가까운 거절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화를 내며 돌아섰을 모진 말들이었다.

하지만 지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가에 어린 물기가 단단한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도연의 차가운 눈빛 너머에 도사린, 자신을 향한 지독한 염려를 읽어내고 있었다. 5년 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을 떠났던 그 밤의 도연과 지금의 도연이 겹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가장 아픈 순간에, 가장 차가운 안면을 쓰고 자신을 밀어냈다.

“넌 항상 그래.”

지원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채 두 뼘도 되지 않았다.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 눈은 왜 그렇게 슬픈 건데? 왜 나한테서 도망치지 못해 안달이면서, 내가 아플 때는 그런 연주를 해주는 거야?”

“……착각하지 마. 그냥 손이 풀려서 친 것뿐이니까.”

“아홉 손가락으로?”

지원의 날카로운 지적이 도연의 심장을 찔렀다.

지원은 바닥에 놓인 피아노를 흘볏 바라보았다. 아까 전,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완벽하고도 기이한 선율. 건반을 누르는 무게와 타건의 타점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으면서도, 오차 없이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내던 그 비현실적인 음악.

“아까 연주할 때, 네 오른손 끝이 이상하게 떠 있었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도 평생을 건반 앞에서 보낸 사람이야. 연주자의 손 모양만 봐도 어디가 굳어 있는지 보여.”

지원의 집착에 가까운 시선이 도연의 주머니를 꿰뚫을 듯이 닿았다.

도연은 주머니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굳어버린 자리에 지독한 냉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화에서 느꼈던 그 저림은 애교였다. 지금의 감각은 뼈마디가 통째로 얼어붙어 부서져 내리는 듯한 혹독한 한기였다. 그 차가움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으면 들킨다. 그녀가 자신이 치른 대가를 알게 된다면, 두 번 다시 연주를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지원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이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는, 지금 그녀의 의심을 완벽하게 꺾어놓아야 했다.

도연은 천천히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움직이지 않는 새끼손가락을 약지 뒤쪽으로 교묘하게 겹쳐 숨기며, 그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의 건반 뚜껑이 열려 있었다.

“네가 내 손을 걱정할 만큼, 내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어.”

도연이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왼손이 먼저 건반 위에 올라섰고, 이어 문제의 오른손이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새끼손가락을 완전히 허공으로 들어 올린 채, 남은 네 손가락만을 건반 위에 얹은 기이한 형태였다.

지원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손끝을 주시했다.

도연은 심호흡을 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쓰지 않는 편곡. 그것은 피아노의 오랜 역사 속에서 왼손잡이 연주자나 장애를 가진 연주자들이 고안해 낸 극단적인 타협책이었다. 도연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5도 화음의 배치를 수정했다. 새끼손가락이 담당해야 할 고음역대의 멜로디를 약지와 중지의 도약으로 메우고, 왼손의 아르페지오를 넓게 펼쳐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방식이었다.

띵-.

첫 음이 울렸다.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리듬에 맞춰, 지극히 서정적이고 아련한 멜로디가 신림당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도연의 아홉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렸다. 새끼손가락이 부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율은 풍성했고, 오히려 한 손가락이 비어 있기에 생기는 독특한 여백이 음악에 깊은 슬픔과 황홀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그것은 찬란한 슬픔의 찬가였다. 빗방울이 땅에 닿아 부서지듯, 건반에서 튕겨 나온 음표들이 지원의 귓가를 스치고 그녀의 가슴속 깊은 심연으로 내려앉았다. 한태만의 위협도, 5년 전의 죄책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음악이라는 거대한 안개 속으로 녹아내려 사라지는 듯했다.

지원의 눈동자가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고, 잔뜩 긴장해 있던 미간이 천천히 풀려갔다. 도연이 들려주는 음악은 그녀에게 불어닥친 삶의 폭풍을 잠재우는 유일한 약이었다.

하지만 황홀함은 가늘게 떨리는 도연의 오른손 끝에서 균열을 일으켰다.

도연은 필사적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약지와 엄지를 무리하게 넓혀 화음을 잡느라 손등의 힘줄이 터질 듯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건반 위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마치 시든 나뭇가지처럼 허공에 어설프게 들려 있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모습이 조명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손가락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각도가 아니었다. 아무런 긴장도, 흐름도 없이 그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는 무기물에 가까운 상태.

지원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선율의 황홀함에 가려져 있던 기이한 위화감이 그녀의 예리한 눈에 마침내 포착되었다.

연주가 마지막 종지부를 향해 치달았다. 도연은 왼손의 묵직한 베이스 음으로 곡을 마무리지으며, 오른손을 서둘러 건반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스윽.

그러나 그의 손이 주머니 입구에 닿기 전, 빛보다 빠른 손길이 그의 손목을 가로막았다.

지원의 차가운 손가락이 도연의 오른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

도연의 신형이 굳어졌다.

지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길이 도연의 오른손 손등과 손가락 마디마디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무언가 확신한 듯한 그녀의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 그리고 거대한 의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도연은 거칠게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다.

“놔.”

“못 놓아.”

지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손아귀의 힘은 완강했다. 그녀는 도연이 차마 숨기지 못한, 힘없이 처져 있는 오른손을 손목째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도연의 상체가 허물어지듯 그녀 쪽으로 쏠렸다. 지원은 도연의 오른손을 온전히 잡아 올려 자신의 가슴팍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진동이 도연의 손목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손끝이, 도연의 완전히 마비되어 돌처럼 굳어버린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지원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뜨거웠으나, 도연의 새끼손가락은 그 어떤 자극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차갑고 무거운 이물질처럼 그녀의 손바닥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창밖의 빗소리가 더욱 거세게 울부짖으며 유리창을 때렸다.

지원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도연의 감각 없는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차가운 낙인이, 두 사람의 얽힌 운명을 잔인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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