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향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아드리안이 직접 꺾어 왔다는 붉은 장미 한 다발. 그가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는 순간, 카리엘은 목덜미에서 서늘한 칼날의 감촉을 다시 느꼈다.
"이번 검증의 계절은 그대에게 특별할 거요, 카리엘."
전생에도 똑같은 문장을 들었다. 똑같은 미소. 똑같은 각도로 기운 고개.
"내가 다른 후보들과 그대를 구별하지 않을 거라 걱정하는 모양인데." 아드리안이 장미 한 송이를 뽑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황후 폐하께서도 그대를 무척 궁금해하시오. 만찬에서 직접 소개하겠다 하셨지. 아무에게나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오."
카리엘은 장미를 받아 들었다. 손끝에 가시가 박혔다. 붉은 방울이 맺혔지만 그녀는 웃었다.
"과분한 말씀이에요, 전하."
그리고 눈을 감았다.
*역독.*
기억의 문이 열리는 감각은 언제나 얼음물에 심장을 담그는 것 같았다. 조각 하나가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전생, 이 방과 똑같은 배경.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장미를 내밀던 바로 그 밤. 그때도 그는 '황후 폐하께서 궁금해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 뒤, 그녀는 흰 탑의 밀실에서 델피네 앞에 무릎 꿇려 있었다.
*황후가 궁금해한다는 건, 이미 나를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는 뜻이었어.*
조각의 가장자리가 검게 오그라들며 타들어갔다. 그 그을음 사이로 심장을 죄는 통증이 밀려왔다. 카리엘은 숨을 삼켰다.
"괜찮소?" 아드리안이 물었다.
"가시에 찔렸을 뿐이에요."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드리안은 계속 말했다. 다정하게, 부드럽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카리엘의 머릿속에서 뒤집혔다.
*"그대를 지켜주겠소."* — 전생에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나를 흰 탑에 유폐했지.
*"우린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잖소."* — 이해했다면, 왜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관을 붙였을까.
*"믿어도 좋소, 카리엘."* — 믿으라던 그날 밤, 흰 수의가 이미 재단되어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겉으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그가 놓는 패를 전부 읽어 내려갔다. 아드리안은 지금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안심한 사냥감이 도망치지 않으니까. 미소는 덫의 미끼였고, 장미는 그 미끼에 뿌려진 향수였다.
"전하의 은혜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답이라니." 그가 그녀의 손등을 스치듯 만졌다. "그저 검증의 계절을 무사히 지내주면 되오. 아무 일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조용히.* 그 단어가 갈고리처럼 걸렸다. 전생의 그도 이 말을 즐겨 썼다. 조용히 있으라, 나서지 말라, 눈에 띄지 말라—그건 처분하기 쉬운 상태로 그녀를 붙들어 두려는 주문이었다.
아드리안이 떠난 뒤, 카리엘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손에 쥔 장미를 내려다봤다. 짓이겨진 꽃잎에서 검붉은 물이 배어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금 연 조각의 대가였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무언가 뜨겁게 맥동했고, 시야 가장자리가 잠깐 뿌옇게 흐려졌다. 기억과 현실이 겹치는 위험한 순간. 그녀는 탁자 모서리를 붙잡았다.
*한 번 더.*
위험한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조각이 있었다. 전생, 흰 탑의 밀실. 델피네 앞에 끌려갔던 그 밤.
*역독.*
어둠 속에서 방 하나가 열렸다. 촛불 하나, 그림자에 잠긴 여인의 옆얼굴. 델피네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두 번 접힌 밀서가 있었다. 봉랍이 찍혀 있었다. 카리엘은 그 문양을 필사적으로 눈에 새겼다. 얽힌 넝쿨과 가시, 그 위에 작은 왕관. 낯선 문양. 그러나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만찬 초대장.*
깨달음과 함께 조각의 가장자리가 화르륵 타올랐다. 이번엔 절반 넘게 검게 소멸했다. 그리고 통증이 왔다—목에 칼날이 닿던 그 냉기가, 처형의 공포가 그대로 되살아나 그녀의 온몸을 얼렸다. 카리엘은 무릎을 꿇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한 박자 건너뛰었다.
"카리엘 님!"
문이 열리고 시엔나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카리엘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또 그러셨어요? 대체 뭘 하시길래—"
"됐어." 카리엘은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물이나 가져와."
시엔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카리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드리안 앞에서는 완벽하게 숨겼던 그 떨림이, 지금은 감춰지지 않았다.
"손이 이 지경인데 됐다니요." 시엔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낯빛이 종잇장 같아요. 의원을 부를게요."
"부르지 마." 카리엘이 날카롭게 잘랐다.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지?"
"네?"
"고작 시녀가 후보에게 이만큼 매달릴 이유가 없어. 무슨 대가를 바라는 거야? 나중에 내가 태자비가 되면 뭘 얻어내려고?"
시엔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에 오래된 화상 흉터가 붉게 얽혀 있었다.
"제가 얻어낼 게 있어서 이러는 걸로 보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됐어요. 물 가져올게요."
시엔나가 나갔다. 카리엘은 그 흉터를 눈으로 좇았다. 저 화상은 어디서 생겼을까. 왜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하려다 말았을까. 계산이 습관인 그녀의 머릿속에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답이 나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어차피 모두가 나를 배신해. 저 여자도 언젠가는.*
그녀는 그 생각으로 불안을 눌렀다.
*
그날 오후, 카리엘은 궁정 후보들의 다과회에 불려 나갔다. 열두 가문의 딸들이 대리석 회랑에 모여 서로를 재고 있었다. 카리엘이 들어서자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어머, 아르덴가의 영애 아니세요." 밀리아 가문의 딸이 부채를 펼쳤다. "전하께서 직접 장미를 들고 방까지 찾아가셨다면서요? 소문이 벌써 궁 전체에 퍼졌어요."
"부럽기도 해라." 다른 후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런데 아르덴가는 요즘 형편이 좋지 않다던데. 영지 세수가 반토막 났다는 이야기가……."
"그런 가문에서 어떻게 태자비 후보가 됐는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요."
카리엘은 찻잔을 들었다. 그녀들의 눈빛에 익숙했다. 전생에도 이 회랑에서 똑같은 조롱을 들었고, 똑같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녀 곁에 서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이 고립이 아드리안의 총애로 메워질 거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이번엔 안다. 아드리안의 총애야말로 그녀를 고립시키는 도구였다는 걸. 그가 유독 그녀를 아끼는 척할수록, 다른 후보들과 그 가문들은 그녀를 적으로 돌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립된 여자는, 나중에 사라져도 아무도 편들지 않는다.
*완벽한 처형 대상이었어. 지지 기반도, 편들 사람도 없는.*
"제 가문 형편까지 걱정해 주시다니." 카리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다들 저를 이렇게 주목해 주시니, 검증의 계절이 외롭지 않겠어요."
밀리아 가문의 딸이 부채 뒤에서 눈을 좁혔다.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께서 조용히 지내라 하셨거든요. 저는 이만."
그녀는 회랑을 걸어 나왔다. 등 뒤로 다시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러나 이번엔 그 소리가 그녀를 흔들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계산을 마쳤으니까.
*이 궁 안에 내 편은 없다. 아드리안도, 델피네도, 저 후보들도. 황실은 나를 죽이는 기계야. 여기 남아 총애를 구걸하는 순간 나는 전생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살길은 하나였다. 황실 밖. 제국 사법권이 닿지 않는 곳. 기록되고 서명된 계약만이 진실이 되는 곳.
*북부 대공.*
카리엘은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이름을 되뇌었다.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 국경 조약법의 관리자. 감정도 혈통도 명분도 통하지 않고, 오직 이행 가능한 조건만 받아들이는 남자. 전생에 그녀는 그와 말 한 번 섞은 적 없었다. 그러니 역독으로 열 조각도 없다. 완전한 미지의 도박.
하지만 그래서 더 안전했다. 아드리안이 계산할 수 없는 패, 델피네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 그녀가 스스로 만들어낼 유일한 활로.
*
방에 돌아온 카리엘은 서랍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두통은 여전히 관자놀이를 짓눌렀지만, 손끝의 떨림은 멎어 있었다. 그녀는 펜을 잉크에 담갔다.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 대공은 연민에 움직이지 않는다. '살려달라'는 애원 따위 그의 책상에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이다. 필요한 건 조건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황실 견제. 그녀가 줄 수 있는 것—황궁 내부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정보, 그리고 델피네 가문의 봉랍 문양이 찍힌 밀서의 존재.
그녀는 첫 줄을 썼다.
*북부 대공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 각하께. 저는 각하께 감정이 아니라 조건을 제안합니다.*
펜 끝이 양피지를 긁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카리엘은 한 문장을 완성할 때마다 그것을 계약서처럼 다듬었다. 애원을 지우고, 이익을 세웠다. 그가 서명할 이유를 만들었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낮게 억눌린 목소리가 문틈을 타고 흘러들었다. 여인의 목소리. 부드럽지만 얼음처럼 서늘한.
"……그 아이 말이야. 아르덴가의."
카리엘의 펜이 멈췄다.
"검증의 계절 내내 눈을 떼지 마라. 방에 누가 드나드는지, 무엇을 쓰는지, 어디로 서신을 보내는지—전부.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내게 가져와."
델피네였다.
"그 여자를 감시하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카리엘은 손에 쥔 펜을 내려다봤다. 잉크 한 방울이 양피지 위로 떨어져, '조건'이라 쓴 글자를 검게 번지게 했다.
카리엘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랐다. 방금 쓰던 밀서가—그것이 델피네의 눈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회귀 이전보다 더 빨리 죽는다. '무엇을 쓰는지, 어디로 서신을 보내는지 전부.' 감시망은 이미 그녀의 펜 끝까지 뻗어 있었다.
*멍청하게 여기서 쓰다니.*
그녀는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벽난로에 던져 넣으려다 손이 멈췄다. 태우면 재가 남는다. 재를 뒤지는 것 또한 감시의 일부일 터였다. 델피네는 그런 것까지 헤아리는 여자였다. 전생에 그녀를 흰 탑까지 몰아넣은 두뇌가, 고작 벽난로 하나를 놓칠 리 없었다.
카리엘은 양피지를 접었다. 두 번. 그리고 세 번째로 접으려다, 손끝이 얼어붙었다.
*두 번 접힌 밀서.*
역독 속 델피네의 손에 들려 있던 그 밀서. 두 번 접혀 봉랍이 찍힌 형태. 지금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우연일까. 아니면—전생에 그녀가 델피네 앞에 끌려간 그날, 그 밀서가 바로 이 순간의 산물이었을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어긋났다. 시간의 순서가 뒤틀리는 감각. 그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남용한 역독이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갉아먹고 있었다. 방금 본 델피네의 옆얼굴과, 지금 문밖으로 멀어진 발소리가 겹쳐졌다. 어느 쪽이 전생이고 어느 쪽이 지금인지, 잠깐 분간이 서지 않았다.
*정신 차려.*
카리엘은 자기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통증이 시야를 붙들어 맸다. 벽난로의 불꽃이 다시 또렷해졌다. 창밖의 눈발이, 탁자 위 잉크병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접은 양피지를 코르셋 안쪽, 심장 위에 밀어 넣었다. 이건 재로 남기지 않는다. 몸에 지녀 직접 전한다. 감시자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유일한 곳.
그때 문이 열렸다. 카리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시엔나였다. 물병을 든 채였다.
"물……"
시엔나의 시선이 카리엘의 가슴께에서 멈췄다. 코르셋 안으로 사라진 양피지의 모서리가, 옷섶 사이로 희게 삐져나와 있었다. 시엔나의 눈이 그것을 정확히 포착했다.
카리엘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봤어.*
방금 복도에서 델피네가 명령한 감시자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방에 누가 드나드는지 전부 보고하라던 그 목소리. 그리고 지금, 이 방에 가장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은—손목에 화상 흉터를 가진,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 시녀였다.
계산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시엔나가 델피네의 사람이라면. 그녀의 과한 친절이, 물러서지 않는 집착이, 전부 감시를 위한 위장이었다면. 그렇다면 방금 코르셋에 밀어 넣은 밀서의 존재는 이미 노출된 셈이었다.
"물은 탁자에 둬." 카리엘은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지지 않도록 힘을 줬다. "그리고 나가."
시엔나는 물병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문을 닫았다. 등 뒤로.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카리엘 님."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방금 복도에서 황후 폐하를 뵈었어요."
카리엘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시엔나가 한 발 다가섰다. "이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매일 밤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처형장의 칼날이 다시 목덜미를 스쳤다. 역독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현실에서.
"그래서." 카리엘은 천천히 물었다. 손끝이 코르셋 위 양피지의 위치를 가늠했다. "너는 뭐라고 대답했지?"
시엔나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다시 발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여럿이었다. 무장한 자들의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곧장 이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