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렸다.
아드리안이 문지방에 서서 웃었다. 아침 햇살이 그의 금발을 훑고 지나가, 전생에 그녀가 사랑했던 그 얼굴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다정하고, 걱정스럽고, 조금은 미안한 듯한 미소. 카리엘은 그 미소를 정확히 알았다. 처형 사흘 전, 흰 탑의 좁은 창을 통해 그가 지어 보였던 것과 똑같은 미소였다.
깃펜을 내려놓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얻은 유일한 성취였다.
"놀라게 했나. 미안하다."
그가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시종 하나가 뒤따라 은쟁반을 들고 섰지만, 아드리안이 손짓하자 조용히 물러갔다. 둘만 남기고 문이 닫혔다. 전생이었다면 카리엘은 이 순간을 은밀한 배려로 여겼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목격자를 지우는 습관임을 알았다.
"방금 나갔던 걸로 아는데요, 전하."
"돌아왔지. 할 말을 반쯤 두고 갔거든."
아드리안은 화장대 곁으로 다가와, 그녀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나무를 가볍게 두드렸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전생의 카리엘은 그 버릇을 몰랐다. 셋째 해 겨울, 그가 판결문을 검토하며 똑같이 손가락을 두드리던 모습을 흰 탑 조각으로 열람한 뒤에야 알았다.
"검증의 계절이 시작됐어. 열두 가문의 눈이 이 별궁을 향해 있지. 다들 너를 재고 있을 거다."
"저를요?"
"어리숙한 척은 그만둬. 넌 아르덴 백작의 딸이고, 후보 중 가장 오래 나와 알고 지낸 사람이야." 그가 몸을 숙였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약속하러 왔다. 이 계절 동안, 다른 가문이 뭐라고 떠들든 너를 내 약혼자로 대할 거야. 예우도, 보호도.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나만 믿어.
그 말이 방 안의 공기를 한순간 얼렸다. 카리엘의 명치 안쪽에서, 좀처럼 열리지 않던 조각의 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나만 믿어'라고 그가 말했던 그 밤의 조각. 유독 무겁게 잠긴 채 열리기를 거부하던 그것이, 같은 말을 듣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붙든 건 다른 조각이었다.
전생의 셋째 해, 궁정 무도회. 아드리안은 지금과 똑같은 각도로 몸을 숙였고, 똑같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너를 재고 있어.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그 무도회로부터 두 달 뒤에 반역죄 고발장이 접수됐다. 카리엘이 확인한 조각들이 그 순서를 증언했다. 달콤한 약속은 언제나 처분 직전에 나왔다. 안심시켜야 저항하지 않으니까.
똑같은 대사였다. 3년의 시차를 두고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전하."
카리엘은 웃었다. 열여덟의 얼굴에 딱 맞는, 물기 어린 안도의 미소였다. 그녀는 그 표정을 스물한 살의 정신으로 정교하게 조립했다.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입술 끝은 떨리게. 감격한 후보가 지어야 할 완벽한 표정.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아요."
"그래야지." 아드리안이 만족스럽게 등받이에서 손을 뗐다. "저녁에 어머니의 다과회가 있다. 긴장하지 마. 어머니는 너를 아끼셔."
어머니는 너를 아끼셔.
카리엘의 시야 한구석에서, 흰 수의에 찍힌 봉랍이 번졌다. 아르덴 가의 쌍두 매가 아니었다. 가시덤불에 감긴 세 갈래 백합. 황후 델피네의 문장. 판결문에 그 인장을 찍은 손이 아꼈다는 그 어머니의 손이었다.
"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아드리안은 그 대답에 흡족해하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카리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하나, 저 남자와 그 어머니가 짜 놓은 그물의 크기를 재는 냉정한 눈금뿐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저 미소를 믿고 죽었다. 이번 생에는 저 미소를 되받아 웃어 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오늘 아침 얻은 유일한 승리였고,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카리엘은 백지 앞으로 돌아왔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무도회의 대사와 오늘 아침의 대사가 정말 같았는지, 기억이 아니라 조각으로 대조해야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명치 안쪽으로 손을 뻗듯 의지를 모았다. 셋째 해 무도회의 조각. 샹들리에 불빛, 현악의 선율, 그의 낮은 속삭임.
조각이 열렸다.
칼날이 목에 닿았다. 순서와 상관없이, 역독은 늘 처형의 냉기를 먼저 불러왔다. 심장이 한 박자 멈췄다가 급하게 뛰었다. 폐가 조여들어 숨이 얕아졌다. 그녀는 화장대 모서리를 붙잡고 버텼다. 그리고 무도회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 각도, 손짓—오늘 아침과 정확히 일치했다. 확인 완료.
조각이 닫혔다. 냉기가 물러갔다.
숨을 고르며 눈을 떴을 때, 카리엘은 무언가가 어긋난 것을 느꼈다.
어제였다. 회귀한 첫날 아침, 그녀는 거울 속 열여덟의 얼굴을 보며 아주 잠깐—목에 흉터가 없다는 사실에 손끝이 저릿할 만큼 기뻤었다. 죽지 않았다는 감각. 살아 있다는 온기. 그 순간의 기쁨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기쁨의 질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기억났다. 흉터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때 손끝이 저릿했던 그 느낌, 목구멍이 뜨거워지던 그 온기—그 감각만 안개 낀 유리창처럼 흐렸다. 사건은 남았는데 감정이 지워졌다. 마치 누가 어제의 기쁨 한 조각을 조용히 도려낸 것처럼.
카리엘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역독의 대가. 신체의 통증만이 아니었다. 미래를 미리 읽을 때마다, 아니—조각을 열어 판을 유리하게 바꿀 때마다, 그녀가 가진 감정 기억이 조금씩 소각되고 있었다. 방금 열람이 무도회 하나였는데, 값으로 어제의 기쁨 한 조각이 사라졌다.
"……이래서였나."
그녀는 오래전 어느 조각에서 이 능력이 왜 사람을 점점 믿지 못하게 만드는지 궁금했었다. 이제 알았다. 기쁨과 신뢰의 기억이 먼저 타 없어지니까. 사건은 남고 온기는 사라지니까. 조각을 열수록, 그녀는 세상을 손익만 남은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멈추면 될 일이었다. 조각을 열지 않으면 대가도 없다.
그러나 조각을 열지 않으면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처형대로 걸어가는 셈이었다. 이 능력이 없으면 그녀는 다시 저 미소를 믿을 것이다.
카리엘은 깃펜을 들었다. 첫 줄을 썼다. '무도회 대사 = 아침 대사. 안심시키고 처분한다.' 종이에 옮기는 데는 값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는 조각을 최대한 아끼고, 이미 아는 것은 전부 종이로 옮긴다. 감정을 태워 얻은 정보를, 감정 없는 종이에 봉인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셈법이었다.
정오가 지나, 카리엘은 별궁을 나섰다.
검증의 계절 첫날, 후보들에게는 궁 서고 열람이 허락되었다. 명분은 '제국의 역사와 예법을 익힌다'는 것이었다. 카리엘이 원한 것은 예법이 아니었다.
서고의 먼지 냄새 속에서, 그녀는 봉토 지도와 조약 문서철을 뒤졌다. 열두 가문의 봉토 경계, 황실이 각 가문을 쥐고 있는 방식. 어느 가문이든 세금·군권·후계 승인에서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델피네가 처형장의 종이 한 장으로 카리엘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 구조 때문이었다. 황실 사법권 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물이 늘 그녀보다 컸다.
한 곳만 빼고.
『국경 조약법 대강』이라 적힌 낡은 문서철을 펼쳤을 때, 카리엘의 손끝이 멈췄다. 북방 얼음 요새 지대. 이민족과 마수를 막는 최전선. 그곳을 다스리는 북부 대공은 독자 법체계인 국경 조약법의 관리자였고, 이 법에는 황제조차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조약법의 원칙은 단 하나. 기록되고 서명된 계약만이 진실이다. 감정도, 명분도, 혈통도 무의미하다. 대공과 계약을 맺은 자는 제국 사법권 밖에서 보호받는다.
제국의 칼날이 닿지 않는 유일한 그늘.
문서철 여백에 대공의 이름이 있었다. 레온하르트 폰 카를슈타인. 카리엘은 그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전생 어느 연회에서 스쳤던 남자. 황실을 못마땅해하며 북부로 돌아가던 냉정한 얼굴. 그때는 무례한 변방 귀족으로 여겼다. 지금은 달랐다.
델피네가 그녀를 처리 대상으로 확정하기 전에, 저 문을 열어야 했다. 문제는 그가 감정도 명분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직 서명된 계약. 그녀가 조약에 유용한 자산임을 증명해야만 그가 협상 탁자에 앉을 것이다.
카리엘은 문서철을 덮고 서고를 나왔다.
별궁으로 돌아오니, 시녀 하나가 다과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시녀였다. 카리엘이 들어서자 그녀는 얼른 찻잔을 채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먼 길 다녀오셨어요. 목 축이세요, 아가씨."
김이 오르는 찻잔. 시녀의 눈에는 걱정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순수한 호의였을 것이다. 아무 계산 없는.
카리엘의 손이 찻잔을 향하다 멈췄다.
이 아이는 누가 붙였지. 별궁 시녀 배정은 궁내부 소관이고, 궁내부는 황후 소관이다. 이 차는 어느 부엌에서 우려졌지. 누가 이 아이에게 오늘 나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지. 저 걱정스러운 눈빛은 진짜인가, 아니면 다과회 전에 내 상태를 살피라는 지시를 받았나. 어제의 기쁨을 잃은 감각처럼, 이 아이의 호의도 언제 독으로 변할지—
"물려도 될까."
카리엘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건조했다. 시녀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혹, 차가 마음에 안 드시면……."
"아니.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 물려."
시녀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쟁반을 거두어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카리엘은 물러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찻잔을 향하다 멈춘 그 손. 아이의 눈에 담긴 것은 아마 진짜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녀도 알았다. 알면서도 밀어냈다. 손을 내미는 것부터 저울에 올리는 이 습관을, 그녀는 멈추지 못했다.
전생의 그녀는 아드리안의 손을 저울에 올리지 않고 잡았다가 죽었다. 이번 생의 그녀는 아무 죄 없는 시녀의 찻잔조차 저울에 올린다. 어느 쪽이 사는 길인지는 분명했다. 다만 사는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흐릿해진 어제의 기쁨을 통해 어렴풋이 느꼈다.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다과회가 있었고, 그다음엔 대공에게 닿을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밤이 깊었다.
다과회는 무사히 넘겼다. 델피네는 자애로운 미소로 카리엘의 손을 쓰다듬으며 "오랜만이구나, 아이" 하고 말했고, 카리엘은 값이 정해지지 않은 패답게 적당히 수줍고 적당히 무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위협도 도구도 아닌 좁은 길. 성공이었다.
별궁 서재로 돌아온 카리엘은 아버지가 남긴 문서를 꺼냈다. 대공가와 아르덴 백작가 사이에 오갔으나 끝내 발효되지 않은 옛 통상 협정 초안. 아버지의 필체가 여백에 남아 있었다. 이것이 명분이었다. 위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문서. 카리엘은 대공에게 이렇게 접근할 수 있었다. 부친의 유업인 이 협정을 재검토하고 싶다는 서한. 국경 조약법의 관리자에게 조약 이야기로 다가가는 것—그가 유일하게 귀를 여는 언어였다.
카리엘은 백지에 서한을 써 내려갔다. 애원도, 동정도 없었다. 조건과 이익만 담았다. 아르덴 백작가가 대공령에 제공할 수 있는 통상 이점, 그 대가로 요구할 조항. 감정을 지운 문장. 대공이 신뢰하는 유일한 종류의 언어.
마지막 줄에 서명을 마쳤을 때, 촛불이 흔들렸다.
카리엘은 서한을 봉하려 봉랍을 데웠다. 붉은 밀랍이 종이 위로 떨어지고, 아르덴 가의 인장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이 편지가 내일 궁 밖 상인 경로로 나가면, 사흘 안에 북부에 닿을 것이다. 첫 문이 열린다.
그때, 문틈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촛불이 크게 휘청였다. 카리엘은 반사적으로 손을 멈추고 문 쪽을 보았다. 서재 문은 분명 닫아 두었다. 그런데 문과 바닥 사이의 좁은 틈으로,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와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소리도 없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그 그림자가 움직였다. 문 아래 틈으로 무언가가—손가락이—뻗어 들어왔다. 아니, 손가락이 아니었다. 얇고 긴 금속 집게였다. 그 끝이 바닥에 놓여 있던 것을 향했다.
카리엘의 눈이 커졌다.
봉인을 기다리며 잠깐 책상 아래로 밀려 떨어진 서한 봉투. 대공에게 보낼 그 편지가, 문틈으로 뻗어 든 집게에 물려 소리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