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갈래 백합 한가운데 눌러 찍힌 인장 위로, 카리엘의 손끝이 오래 멈춰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회귀 첫날, 처형 조각을 되짚었을 때 목덜미를 스쳤던 그 미세한 위화감. 칼날의 냉기 속에서도 눈이 놓지 않던 판결문 맨 아래의 도장. 그때 그녀는 그것이 아드리안의 것이라 여겼다. 여기고 죽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인장은 창을 든 사자였다. 사자가 아니라—꽃이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백합.
"찾았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 인장이 왜 낯설었는지."
시엔나가 등불을 들어 올렸다. 무채색으로 바랜 그녀의 시야에서, 그 불빛만이 흐릿하게 번졌다.
"전생 판결문의 인장이야. 나는 그게 아드리안의 것이라 믿고 광장에 세워졌어. 그런데 아니었어." 손톱이 문서 가장자리를 눌렀다. "처음부터 이 손이 나를 죽였어. 황태자가 아니라. 황후가."
"아드리안은."
"칼이었지.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어머니는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카리엘은 문서를 내려놓았다. "성군이 될 아들에게는 흠집이 없어야 하니까. 그래서 그 어머니가 흠집을 대신 만들었어. 반역이라는 이름의 흠집을. 그리고 거기에 내 목을 끼워 넣었어."
방위비를 유용한 승인 사슬. 삼 년 앞서 지출된 조작 증언 비용. 자애 기금 속에 숨은 은닉 자금. 그 모든 종이의 맨 끝에서, 세 갈래 백합이 웃고 있었다.
전모의 절반이 손안에 있었다.
절반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 문서를 미완성으로 볼 거야." 카리엘이 사슬의 첫 고리를 짚었다. "여기, 자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방위비가 어느 조항을 근거로 유용됐는지—그 시작점을 증명하는 조항이 없어. 부호로만 적혀 있어. 조약 원문이 있어야 이 부호가 무슨 뜻인지 심사대에서 통한다고."
"그 원문이 어디 있는데."
카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끝이 저절로 심장께로 올라갔다.
그곳. 세 번 되짚어도 열고 싶지 않던 그곳.
"흰 탑."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북동쪽 방. 벽에 새겨져 있어. 전생에 나는 그 방에서 사흘을 갇혀 있었어. 벽에 조약 문구 절반이 새겨져 있는 걸 봤어. 읽으려고 했지. 다 읽기 전에—끌려 나갔어. 광장으로."
시엔나의 등불이 흔들렸다.
"거긴 네가 죽은 곳이야."
"알아."
"거긴 델피네의 성역이야. 그 여자가 나를 옆방에 처넣고 로벨 가문을 태운 곳이라고." 시엔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붕대 감긴 손목이 등불 자루를 쥐어틀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거잖아."
"조각 속에서는 벽 문구가 흐려. 내가 끝까지 못 읽었으니까 봉인도 반쪽이야."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비뼈 안쪽이 무겁게 눌렸다. "직접 두 눈으로 봐야 해. 실물로. 그래야 이 사슬이 완성돼. 그래야—두 번 죽지 않아."
***
정오 심사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카를슈타인 상단의 문서로 위장한 두 사람은, 대공 관할 조사권을 방패 삼아 흰 탑 회랑에 들어섰다. 조약법 제3조. 방위 협정 관련 문서를 조사할 권한. 위병이 통행패를 검사하는 동안, 카리엘은 종이의 냉기가 손바닥에 닿는 것을 느꼈다. 감정 대부분을 태워버린 뒤로, 공포조차 흐릿했다. 다만 심장만은 저 혼자 빨라졌다. 몸이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동쪽 방의 철문 앞에서, 카리엘의 걸음이 멎었다.
"여기."
문을 밀자 곰팡이와 재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전생 화재 때 그을린 벽. 창살 하나 없는 좁은 방. 바닥에 남은 검은 얼룩을 보는 순간, 봉인 하나가 저절로 열렸다—목에 닿던 밧줄, 물어뜯던 이 사이의 피 맛, 창살 너머 시엔나의 비명.
세상이 기울었다. 무채색의 벽이 회오리쳤다.
"카리엘!"
시엔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붕대 아래 흉터가 손등에 닿았다.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시엔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가 나를 여기서 끌어냈어. 이번엔 내가 네 팔을 잡을게. 조각으로 도망치지 마. 눈앞을 봐. 벽을 봐. 나를 봐."
거친 손이었다. 화상이라 속였던, 실은 밧줄이 뼈까지 파고든 손. 그 감촉이 회오리치던 조각을 붙들어 눌렀다. 카리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이 다시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무채색이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혼자였다면 이 방에서 조각에 삼켜졌을 것이다.
"됐어." 카리엘이 벽으로 다가섰다. "됐어."
그을음 아래, 긁어낸 글자들이 있었다. 누군가 손톱으로 새긴 반쪽짜리 문구. 전생의 그녀가 다 읽지 못하고 끌려간 그것.
시엔나가 등불을 바싹 붙였다. 카리엘은 손수건에 물을 적셔 그을음을 문질렀다. 재가 벗겨지며 글자가 드러났다.
「…국경 방위 예산 제9조 항목은 황실 승인 없이 전용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한 전용은 반역에 준하여…」
그리고 그 아래, 전생에 그녀가 미처 읽지 못한 나머지 절반.
「…승인 주체가 황실 인장을 위조하거나 대리 날인한 경우, 최종 책임은 실제 인장 보유자에게 귀속된다.」
카리엘의 손이 멈췄다.
실제 인장 보유자에게 귀속된다.
방위비를 유용한 그 승인란의 세 갈래 백합. 그 인장의 보유자. 이 문구가 그 부호를 열쇠처럼 풀었다. 사슬의 첫 고리가 채워졌다. 자금은 방위 예산 제9조에서 흘러나왔고, 그것을 최종 승인한 손은—황후 델피네. 이제 심사대에서 어떤 궤변도 이 연결을 끊을 수 없었다.
"이거야." 카리엘의 입술이 떨렸다. "이 벽이 종이의 부호를 증명해. 전모가 완성됐어."
시엔나가 밀랍 판을 벽에 대고 문구를 떴다. 손이 빨랐다.
"베꼈어. 가자. 여기 오래 있으면—"
"오래 있을 것 없어요."
문가에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자애로운 목소리. 카리엘은 그 목소리를 안다. 검증의 계절 내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던 목소리. 후보 명단에 그녀의 이름을 올린 목소리.
황후 델피네가 등불 두 개를 앞세우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 갈래 백합이 수놓인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 그 손에, 카리엘의 가슴에 달린 것과 똑같은 금장미 브로치가 빛났다.
"이 방을 참 좋아하는구나, 카리엘." 델피네가 부드럽게 웃었다. "전생에도, 이번에도. 사람은 죽은 자리로 자꾸 돌아오는 법인가 봐."
***
전생에도, 이번에도.
카리엘의 척추를 얼음이 훑고 지나갔다. 저 여자도—알고 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 방이 무엇인지 안다.
"밖에 위병을 세워 두었어." 델피네가 손끝으로 문틀을 쓸었다. "삼 년 전, 로벨 가문의 딸이 여기서 불타 죽을 때도 위병이 문 앞을 지켰지. 아무 소리도 새 나가지 않았어. 이 탑은 그런 곳이란다. 무엇을 태워도, 무엇을 지워도, 밖에선 알지 못하는 곳."
시엔나가 앞으로 나섰다. 붕대 감긴 손목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황후 폐하."
델피네의 미소가 아주 잠깐 얼어붙었다. 그러나 곧 다시 부드러워졌다.
"살아 있는 것이 더 안됐구나. 태워 없앤 줄 알았던 것이 자꾸 걸어 나오면—두 번 손을 써야 하니까." 그녀가 카리엘을 향해 돌아섰다. "네가 손에 쥔 그 밀랍 판. 그 벽의 문구. 아주 영리하게 찾았어. 하지만 얘야,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그 종이는 벽에 붙은 낙서와 다를 게 없단다.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르면—또 사고사가 되겠지. 검증 후보가 흰 탑을 무단 침입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나 슬픈 일이니."
옛날의 카리엘이라면 여기서 무릎이 꺾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카리엘은, 팔려나가지 않으려 두 달을 발버둥 친 여자였다.
"폐하께서 잊으신 게 있습니다." 카리엘이 품에서 반으로 접힌 문서를 꺼냈다. 검은 잉크가 무채색 시야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저는 오늘 흰 탑에 침입한 검증 후보가 아닙니다. 북부 대공령 조약법의 대등 협상가입니다. 제3조. 방위 협정 관련 문서에 대한 대공의 조사 권한. 저는 그 권한을 위임받아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합법적으로."
델피네의 눈이 문서 위에서 가늘어졌다.
"조약법 당사자는 제국 사법권 밖에서 보호받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이 방에 가두시면—그건 검증 후보를 다치게 하는 사고가 아니라, 대공령 조사관을 감금한 조약 침해가 됩니다. 대공은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계약으로 움직입니다. 조약이 침해되면, 북부는 이 일을 사고사로 넘겨주지 않아요. 문서로 심판대에 올립니다."
"애송이의 종잇조각으로 이 탑을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거니."
"믿지 않습니다." 카리엘은 반쪽 문서를 들어 올렸다. "제 서명 아래에, 대공의 서명이 함께 있습니다. 이 조사관이 정오까지 카를슈타인 상단으로 귀환하지 않으면, 대공은 조약 침해로 간주해 즉시 제국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미 절차가 걸려 있어요, 폐하. 저를 태우시면—탑째로 심판대에 오르는 건 제가 아니라 폐하십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델피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손끝이 문틀을 떠나, 브로치를 매만졌다. 아주 미세하게. 계산이 어긋난 자의 손짓이었다.
"…판을 읽을 줄 아는 아이라고 들었지."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과연."
"저는 폐하께 하나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카리엘이 한 걸음 다가섰다. "전생에, 판결문 맨 아래 찍혀 있던 인장. 저는 그게 황태자의 것인 줄 알고 죽었습니다. 아니었지요. 세 갈래 백합이었습니다. 폐하의 것이었습니다."
델피네의 입가가 아주 잠깐, 삐끗했다.
"성군이 될 아들에게 흠이 있어선 안 되니까. 그래서 흠을 대신 만드셨습니다. 반역이라는 이름의 흠을. 제 목을 거기 끼워 넣으셨고요. 아드리안은 그저 시키는 대로 칼을 휘두른 손이었을 뿐. 설계도를 그린 손은 처음부터 폐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델피네가 옆으로 비켜섰다. 문이 열려 있었다. "가 보렴. 정오까지 돌아가야 한다며. 종잇조각을 소중히 안고."
그것은 후퇴가 아니었다. 카리엘은 그 미소 뒤에서, 다음 판이 이미 놓이는 소리를 들었다.
***
두 사람은 흰 탑을 빠져나왔다.
밀랍 판이 카리엘의 품속에서 무겁게 뛰었다. 이제 전모는 하나도 빠짐없이 맞물렸다. 방위 예산 제9조의 전용 금지. 위조·대리 날인 시 실제 인장 보유자에게 귀속되는 최종 책임. 그 인장은 세 갈래 백합. 자애 기금에 숨은 은닉 자금. 삼 년 앞서 지출된 조작 증언 비용. 로벨 가문의 몰살과 시엔나의 밧줄 흉터. 그리고 판결문의 그 도장.
황후 델피네가 황태자의 성군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역을 조작하고, 카리엘을 희생양으로 세운 전모.
여섯 조각의 종이가,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됐어." 시엔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걸 대공에게 넘기면, 심사대에서—"
회랑 끝에서 발소리가 밀려왔다. 여럿이었다. 정연한 군화 소리.
창을 든 태자궁 위병들이 회랑을 가득 메우며 다가왔다. 그 앞에, 흰 예복을 걸친 황태자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전생의 그 얼굴로.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입으로.
"카리엘 폰 아르덴." 아드리안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목소리에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황실 문서를 위조하고 국경 방위 예산을 유용해 반역을 도모한 혐의로, 그대를 체포한다."
카리엘의 품속에서 밀랍 판이 얼어붙었다.
위조하고. 유용해. 반역을.
그것은 그녀가 방금 손에 쥔 죄목이었다. 델피네의 죄목이. 뒤집혀, 그녀의 이름 위에 얹혀 있었다.
"삼심의 절차는 생략한다. 사안이 명백하다." 아드리안이 두루마리를 말아 쥐었다. 그 뒤 회랑 그늘에서, 세 갈래 백합의 검은 드레스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형 집행은—내일 정오. 로제라움 광장에서 참수로 한다."
전생과 똑같은 말이었다.
전생과 똑같은 정오였다.
두 번째 처형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