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 위 다미안의 미소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가 종이쪽지를 소매 안으로 접어 넣고 그늘 뒤로 물러서는 순간, 발소리 하나가 카일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당신, 방금 왜 하나도 안 기뻐 보였죠?"
세라피나였다. 붉은 머리 끝에 아직 결계석 파편의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카일의 소매를 붙들지도, 앞을 막지도 않았다. 그저 반걸음 옆에 서서 옆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카일은 대열의 흐름에 발을 맞췄다. "삼백 명이 다칠 뻔했으니까. 안심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야."
"거짓말."

한 마디였다. 그녀는 그 위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결계가 봉합되던 순간, 다들 주저앉아서 웃거나 울었어요. 살았다고. 그런데 당신은—" 세라피나가 걸음을 멈췄다. 카일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방금 계산기 두드리다 답 나온 사람 같았어요. 맞았네, 그러고 손 터는 사람."
강당 문으로 밀려 나가는 학생들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어깨를 부딪치고 사과했다. 세라피나는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카일의 정신 깊은 곳에서 책의 표지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지금 열면 그녀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답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대답을 골라 건네면 이 자리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전생의 그는 늘 그렇게 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미래에서 미리 읽어 와, 관계를 정확한 각도로 접어 서랍에 넣었다.
카일은 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삼백 명을 살린 손. 아무 열기도 남지 않은 손.
"기뻐야 하는 걸 알아." 그가 낮게 말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어. 뭔가를 잃어버려서."
"뭘요?"

"모르겠어." 절반은 거짓, 절반은 진실이었다. 이름은 안다. 기쁨. 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세라피나는 그 어정쩡한 대답을 오래 씹었다. 미간이 좁아졌다가, 다시 펴졌다.

"난 나를 이용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문맥에 없던 말이었다. 카일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입학 전에 우리 집에 사람이 왔었거든요. 후원해 줄 테니 나중에 자기 파벌에서 표를 던지라고. 재능을 빌려주면 이름값을 갚아주겠다고요.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나를 도구로 쓰겠다는 거였어요." 그녀가 카일을 정면으로 봤다. "그래서 정했어요. 나는 누구의 도구도 안 될 거예요. 방패도, 사다리도, 알리바이도. 절대로."
카일은 대꾸하지 못했다.
전생에서, 그녀는 그의 방패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녀를 방패로 세웠다. 어느 전장에서 카일은 미래를 열람해 자신이 죽을 자리를 알았고, 그 자리에 세라피나를 대신 세웠다. 그녀는 자기가 왜 거기 서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었다. 그때의 카일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미 팔아치운 뒤라, 그녀의 죽음을 손실 항목으로만 기입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네 말이 맞아서."

세라피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 밖의 순순함이 오히려 그녀를 경계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사람." 그녀가 돌아섰다. "다음엔 진짜 대답 준다면서요. 오늘도 반만 줬어요. 외상 달아둘게요."
그녀의 붉은 머리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카일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다행히, 아직 그에게 남아 있었다.

*
기숙사 배정표는 이튿날 아침 게시판에 붙었다.

카일은 서관 3층 끝방을 받았다. 룸메이트는 없었다. 아래쪽 실습조 편성표에서 그는 자기 이름을 찾았다. 3조. 함께 묶인 이름을 훑던 그의 눈이 두 곳에서 멈췄다.
세라피나 로크웰. 그리고 다미안 크로프트.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학원의 조 편성은 입학 성적순 지그재그 배분이었다. 우연이 맞았다. 우연이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첫 실습 과제는 '불안정 마력원 안정화'였다. 강의실 중앙에 놓인 은빛 구체는 내부의 마력이 제멋대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표면에 실금을 그었다. 조원 넷이 협력해 세 시간 안에 구체를 안정 상태로 되돌리면 통과. 마력원이 폭발하면 실패, 감점.
"이거 어제 결계석이랑 원리가 비슷한데." 다미안이 구체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다정한 웃음. 백 년 전과 똑같은 각도. "카일, 너 어제 봉합했잖아. 그냥 네가 하면 안 돼?"

"그럼 나머지 셋은 팔짱만 끼고 있으라고?" 세라피나가 팔을 걷었다. "그건 통과가 아니라 무임승차예요."
네 번째 조원은 겁먹은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는 구체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 있었다.

카일은 구체를 관찰했다. 서고를 열면 3초 만에 정답 절차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몇 번 마력을 주입하고 어느 지점을 봉인하면 되는지. 하지만 그건 어제 잃은 기쁨의 다음 조각을 지불하는 일이었다. 그리고—그건 조원들의 손에서 문제를 통째로 빼앗는 일이기도 했다.
'서고 없이. 지식만으로.'

전생의 대마도사에게는, 미래를 안 보고도 이런 과제를 푸는 지식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 지식을 자기 손으로만 쓸 것이냐, 남을 가르쳐 함께 쓸 것이냐였다.
"팽창 주기가 일정해." 카일이 입을 열었다. "12초에 한 번. 폭발하는 게 아니라, 안에 갇힌 마력이 나갈 길을 못 찾아서 벽을 두드리는 거야. 문을 열어주면 돼."

"열면 터지지 않아요?" 겁먹은 소년이 물었다.
"한 번에 열면 터지지. 수축하는 순간에, 아주 작은 통로를 내면—" 카일은 세라피나를 봤다. "네가 반대편에서 흡수 결계를 유지해 줄 수 있어? 나오는 마력을 받아내는 거야. 나는 통로를 만들고, 다미안은 12초 주기를 세서 신호를 줘. 너는," 그가 소년을 봤다. "결계 안정화 룬을 하나씩 그려서 세라피나한테 넘겨."

역할이 나뉘자 소년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내가 봉합만 하면 5분인데." 다미안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넷 중 하나만 성적을 받겠지." 카일이 잘랐다. "이건 조 과제야."

수축의 순간, 카일은 손끝으로 구체 표면에 실낱같은 균열을 유도했다. 세라피나의 흡수 결계가 파랗게 피어났다. 다미안이 숫자를 셌다. 여섯, 일곱, 여덟. 소년의 룬이 하나씩 결계에 박혔다.
세 번째 주기에서 마력원의 실금이 스스로 아물기 시작했다. 표면이 잔잔해졌다. 은빛이 고르게 돌아왔다.

"안정됐어." 세라피나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강의실 앞쪽에서 감독 교사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십이 분. 다른 조들은 아직 한 시간을 넘기고도 씨름 중이었다. 3조의 마력원 안정도 수치가 기록판에 떴다. 97퍼센트. 전 조 최고치.

카일은 손을 털었다. 승리의 짜릿함은 없었다. 그 자리가 비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대신, 옆에서 소년이 자기가 그린 룬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세라피나가 결계를 걷으며 카일 쪽을 흘긋 봤다. 어제와는 다른 눈이었다.
서고를 열지 않았다. 감정 하나를 더 지불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겼다.

이 감각을, 카일은 백 년 만에 처음 겪었다.
*

문제는 정리 시간에 터졌다.
조원들이 도구를 반납하러 흩어졌을 때, 카일은 다미안이 강의실 뒤편 창가에 혼자 남는 걸 봤다. 창틀에 접힌 종이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다미안이 그걸 꺼내 폈다. 등을 돌린 채였지만, 카일의 각도에서는 종이 위쪽 글자가 보였다.
『재능이 없어도 상위권에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대가는 당신이 가장 안 쓰는 것 하나뿐.』

카일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 문장을 안다. 전생에 자신에게 온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가장 안 쓰는 것 하나'. 잠식자들은 감정을 그렇게 불렀다. 안 쓰는 것. 남아도는 것. 팔아치워도 표 안 나는 것.

다미안이 저걸 받으면, 백 년 전의 배신이 다시 시작된다. 그를 잠식자에게 팔았던 그 손이, 이번엔 스스로 잠식자에게 끌려간다.
"그거 이리 내."

카일이 쪽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미안이 화들짝 종이를 접어 쥐었다. 다정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뭐야, 갑자기."
"그건 함정이야. 대가로 감정을 가져가. 처음엔 하나, 그다음엔 전부. 끝엔 아무것도 안 남아. 내가 봤어. 나는 그게 어떻게 끝나는지—"

"뭘 봤다는 건데?" 다미안이 뒷걸음질 쳤다. "너 지금 남의 종이 뺏으려는 거잖아."
"다미안, 이건 네가 판단할—"

"거기까지."
세라피나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그녀가 반납대에서 돌아와 있었다. 카일의 뻗은 손과 다미안의 굳은 얼굴을 번갈아 봤다.
"카일. 그 종이가 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아직 읽지도 못했잖아요."

"글자가 보였어. 저건 위험한—"
"위험한지 아닌지, 왜 당신이 정해요?"

강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세라피나가 카일 앞으로 반걸음 나섰다. 어제 회랑에서와 똑같은 각도로, 이번엔 남을 위해서.
"다미안이 그걸 받든 태우든, 그건 다미안 거예요. 당신이 무서운 걸 봤든 뭘 봤든, 그건 당신 머릿속 얘기고. 남의 손에서 종이를 뺏는 건—"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그 사람을 도구 취급하는 거예요. 내가 어제 말했죠. 나는 그런 사람이 제일 싫다고."
카일의 뻗은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도구 취급. 그 말이 명치에 박혔다. 전생 내내 그가 동료에게 한 짓이 정확히 그거였다. 세라피나를 방패로 세운 것도, 다미안이 배신할 걸 알면서 감시만 하며 이용가치가 다할 때까지 곁에 둔 것도. 그는 늘 '너희를 위해서'라고 믿었다. 그게 배려라고. 미래를 아는 자의 책임이라고.
그러나 배려의 얼굴을 한 그의 손은, 언제나 상대의 선택권을 먼저 도려냈다.

카일은 손을 거뒀다. 천천히. 손가락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미안."
다미안이 눈을 깜빡였다. 카일이 사과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다미안 자신도, 그 쪽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기에 더 놀랐는지도 몰랐다.

"네 거야." 카일이 말했다. "네가 정해. 다만—" 그가 다미안의 눈을 봤다. 백 년 전 그를 판 눈. 그러나 지금은 그저 겁먹고 지친 열다섯의 눈이었다. "그 대가라는 게 정말 안 쓰는 거라면, 왜 저쪽은 그렇게까지 그걸 원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봐. 안 쓰는 거면 저들이 왜 모으겠어."
다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도망치듯 강의실을 나갔다.

세라피나가 카일을 봤다. 경계는 여전했지만, 그 밑에 다른 게 깔려 있었다.
"물러날 줄도 아네요."
"어제까진 몰랐어." 카일이 정직하게 말했다. "방금 배웠어."

그녀는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외상 목록에서 한 줄쯤 지워진 걸음걸이였다.
카일은 빈 강의실에 홀로 남았다. 은빛 마력원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서고를 열지 않고 이겼다. 오늘 남의 선택을 빼앗지 않고 물러섰다. 두 개의 작은 성공. 백 년 만에 처음 걸어보는 다른 길.

그 길이 얼마나 짧을지는, 그날 밤에 알게 됐다.
*
서관 3층 끝방. 문을 열려던 카일의 손이 굳었다.


문틈에 종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낮에 다미안이 창틀에서 꺼낸 것과 완전히 같은 재질, 같은 접힘. 카일은 그것을 뽑아 펼쳤다.

윗줄은 낮의 그 문장이 아니었다. 필체는 같았지만, 이번 것은 카일 한 사람만을 위해 쓰인 문장이었다.

『전생의 계약, 이번에도 하시겠습니까?』


복도의 마법등이 지지직 흔들렸다. 카일은 종이를 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전생. 그 단어를 아는 자가, 이 학원 안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