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붙어 있는데도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카일 도렌시아는 무너진 첨탑의 잔해 위에 앉아 있었다. 사방 백 리에 살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손짓 한 번으로 쓸어버린 군대가, 그가 배신자라 낙인찍고 태워버린 옛 동료들이,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대륙 최강. 그를 그렇게 불렀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은 최강.

가슴을 짚었다. 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겼는데."

목소리가 낯설었다. 승리했다는 사실은 알았다. 알기만 했다. 기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마지막 남은 적을 죽이던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기쁨을 팔았고, 애정을 팔았고, 두려움까지 팔았다.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래의 대가였다.

세라피나. 그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매끄러운 얼음판 위를 손이 미끄러지듯.

한때는 그 이름 하나에 밤새 뒤척였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죽은 자의 목록에 적힌 한 줄이었다. 그가 이용해 사지로 밀어 넣었고, 아무 감흥 없이 잊었던.

무릎이 꺾였다. 심장이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뛰더니,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무도 펼친 적 없는 책 한 권이 스스로 펼쳐졌다.


표지에는 글자가 없었다. 페이지는 텅 비어 있는데도 눈이 아플 만큼 무언가로 가득했다. 손을 뻗었다. 손이 없었다. 그런데도 뻗었다. 페이지가 넘어갔다. 시간이 역류하는 소리가 났다—찻잔이 깨지는 소리를 거꾸로 돌린 것 같은, 부서진 것이 되돌아가 붙는 소리.


눈을 떴다.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오색 빛이 대리석 바닥에 어른거렸다. 향냄새. 사람 냄새. 수백 명의 어린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소리.

"신입생 여러분, 왕립 아스텔 학원에 입학한 것을 환영합니다."

단상 위, 엄격한 얼굴의 여인이 입을 열고 있었다. 이자벨라 벤저민. 죽은 지 오래된 스승의 얼굴이었다. 젊었다. 아니—카일이 처음 이 학원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카일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이 없었다. 굳은살이 없었다. 마력을 수백 년 흘려보내 검게 물든 흔적이 없었다. 작고, 매끈하고, 떨리는 열다섯 살의 손.
"…돌아왔다고?"

심장이 뛰었다. 이번엔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할 만큼 뜨거운, 두려움. 살아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주변 신입생들이 힐끔거렸다. 혼잣말이 컸던 모양이다.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얼음처럼 명료해지는 걸 느꼈다. 전생의 습관이었다. 상황을 재단하고, 변수를 계산하고, 감정을 뒤로 미루는 것.

'이번엔 다르게 산다.'
전생에서 자신은 이 입학식 직후 잠식자의 계약에 걸렸다. 재능 없는 열등생이던 자신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은 대가로 감정을 하나씩 팔며 천재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폐허에서 죽었다.

이번엔 잡지 않는다. 서고 같은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내 판단으로—
그 다짐이 채 굳기도 전이었다.

단상 옆, 마법 시연을 위해 세워둔 거대한 결계석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 이자벨라의 얼굴이 굳었다.

"물러서라! 전원 뒤로—"
늦었다. 결계석 표면의 룬 문자가 붉게 타오르더니, 억눌려 있던 마력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반투명한 힘의 장막이 돔처럼 부풀어 오르며 시연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파랗던 빛이 순식간에 검붉게 변했다. 마력이 폭주하면 결계는 안쪽의 모든 것을 짓이겨 압축한다. 삼백 명 남짓한 신입생이 그 안에 갇혔다.

비명이 터졌다. 앞줄의 학생 몇이 무릎을 꿇었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압력이었다. 결계가 안쪽으로 조여드는 압력.
카일은 이 광경을 기억하지 못했다. 전생의 입학식에는 이런 사고가 없었다. 회귀가 미래를 바꾼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그가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

이자벨라가 지팡이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폭주한 결계를 밖에서 해체하려면 붕괴 지점을 정확히 짚어야 하는데, 검붉은 장막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 늦으면 절반은 죽는다.'
카일의 머리가 저절로 굴렀다. 결계 구조. 룬 배열. 폭주의 진원. 계산이 필요했다. 완벽한 계산이. 그런데 정보가 없었다.

정신 깊은 곳에서, 책이 스스로 표지를 들썩였다.
—열람하겠는가.

몸이 굳었다. 방금 다짐했다. 의존하지 않겠다고. 오직 내 판단으로.

압력이 한 단계 더 치솟았다. 앞줄의 붉은 머리 여학생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결계 벽이 그 아이 쪽으로 볼록하게 부풀었다. 십 초. 아니, 그보다 짧다.
내 판단으로는 저 애를 못 구한다.

이를 악물었다. 손을 뻗었다—정신 속으로.
책이 펼쳐졌다. 페이지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십오 초 뒤의 미래. 결계 남동쪽 세 번째 룬이 먼저 무너지고, 그 균열을 따라 역방향 마력을 정확한 각도로 흘려 넣으면 폭주가 스스로를 삼키며 소멸한다는 것. 필요한 주문의 음절 하나하나까지, 손목을 꺾는 각도까지, 미래의 자신이 이미 성공시킨 그 해법이 통째로 머릿속에 새겨졌다.

눈을 떴다. 카일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벤저민 교수님, 남동쪽!"

이자벨라가 놀라 돌아보았다. 카일은 쓰러진 학생들을 뛰어넘어 결계의 남동쪽 면으로 달렸다. 손가락 세 개를 붙이고, 정확히 계산된 각도로 결계 표면을 짚었다.

"역행(逆行)—결(結)."
전생에서도 쓴 적 없는 즉흥 조합이었다. 하지만 손이 알고 있었다. 미래의 자신이 성공시킨 그 감각이. 마력이 역방향으로 결계 안에 스며들었다. 검붉은 장막이 순간 멈칫하더니, 세 번째 룬이 계산대로 먼저 무너졌다.

"여기서 각도를 틀어—"
손목을 꺾었다. 폭주하던 마력이 방향을 잃고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결계가 안쪽으로 무너지는 대신, 제 힘을 제 안에서 태웠다. 검붉던 빛이 순식간에 옅어지더니, 파랗게 식으며 흩어졌다.

정적.
돔이 사라진 자리에 삼백 명의 신입생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쓰러졌던 붉은 머리 학생이 눈을 깜박이며 일어났다. 상처 하나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방금, 저 신입생이 결계를 봉합한 거야?"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이자벨라조차 지팡이를 내린 채 카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 경탄이 어렸다가, 아주 미세하게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카일은 그 시선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전원을 구했다. 열다섯 소년이, 노련한 교수도 손대지 못한 폭주 결계를 첫날부터 봉합했다. 시선이 쏟아졌다. 감탄, 놀람, 질투. 전생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종류의 눈빛들.
이제 안도가 밀려와야 했다.
카일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구조에 성공했을 때 마땅히 차오르는 것—가슴이 뜨거워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그 감각을.
오지 않았다.

붉은 머리 학생이 일어나 그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살았다는 안도로 떨고 있었다. 카일은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자기 안을 더듬었다. 매끄러웠다. 아까 회귀 직후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던 그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기쁨.'
책이 가져간 것의 이름을 알았다. 열람의 대가. 위기를 넘긴 그 순간 마땅히 느꼈어야 할 승리의 기쁨. 그것이 통째로 도려내진 채였다. 삼백 명을 살렸는데, 물 한 컵을 옮긴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알기만 하고 느끼지 못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감각을, 카일은 안다. 전생의 마지막 폐허에서, 승리하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그 텅 빈 감각. 그것이 벌써 시작됐다.

한 번이었다. 딱 한 번 열람했을 뿐인데.
'수백 번을 이렇게 살았구나. 나는.'
전생의 자멸이 배신 때문이 아니었음을, 카일은 그제야 살로 이해했다. 아무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가 하나씩 자기를 팔아 텅 비었고, 텅 빈 자에게서 사람들이 떠났을 뿐이다. 회귀는—이 서고는—잠식자의 계약과 다르다. 그들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다. 이건 미지의 힘이다. 하지만 대가의 방식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다시는 안 열어.'
주먹을 쥐었다. 이미 하나를 잃은 손으로. 그 다짐조차 늦었다는 걸 알면서.

주변의 소란이 멀게 느껴졌다. 이자벨라가 다가와 무어라 물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교수의 눈빛이 아까와 달랐다. 경탄이 아니라, 뭔가를 아는 자의 눈이었다. 감정을 판 마법사들의 말로를 본 적 있는 사람의 눈.
그때, 학생들 사이로 한 소녀가 카일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눈매가 날카로운 여학생. 카일은 그 얼굴을 안다. 백 년을 걸쳐 안다. 그가 도구로 쓰고, 사지로 밀어 넣고, 잿더미가 될 때까지 아무 감흥 없이 지켜봤던.
세라피나 로크웰.
살아 있었다. 열다섯의 얼굴로, 따지고 드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똑바로.

이름을 확인하고 카일은 다시 자기 안을 더듬었다. 전생의 마지막에 그랬듯, 이번에도 그 이름에 무언가 걸리기를—죄책감이든 그리움이든, 하다못해 낯익음이라도.
세라피나가 눈앞에 섰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히고, 카일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그러곤 대뜸 입을 열었다.
"당신, 방금 왜 하나도 안 기뻐 보였죠?"
카일의 숨이 멎었다.
"삼백 명을 살렸잖아요. 다들 소리 지르고 우는데, 당신 혼자 무슨 계산서 확인하는 얼굴이었어요. 방금."

소녀의 눈이 그를 파고들었다. 도려낸 자리를, 정확히.
카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을 지어낼 시간은 충분했다. 놀라서 굳었다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고,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었다. 전생의 그였다면 반사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표정을 만들고, 목소리를 다듬고, 상대가 원하는 답을 계산해서 내밀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백 년을 버틴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소녀의 눈앞에서는 그게 되지 않았다.
세라피나가 한 발 더 다가왔다. 키가 카일보다 반 뼘쯤 작았지만, 올려다보는 눈에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내가 방금 저기 쓰러졌던 거 봤어요? 결계 벽이 내 쪽으로 부풀 때,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살았고, 그게 당신 덕분이래요. 고맙다고 하려고 왔어요."
붉은 머리 학생—세라피나였다. 카일은 그제야 아까 결계 안에서 쓰러졌던 아이가 그녀였다는 걸 겹쳐 보았다. 전생의 세라피나는 흑발이었다. 아니, 흑발이었던 것 같았다. 그마저도 이제는 잿더미 목록의 한 줄일 뿐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이상해서요."
세라피나가 팔짱을 풀었다.
"목숨 구해준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예의 아닌 거 아는데. 당신,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방금."

주변의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몇몇 학생이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카일은 그 말이 폐부를 관통하는 걸 느꼈다—아니, 정확히는 그 말이 관통해야 할 자리가 이미 비어 있음을 느꼈다. 아프지 않았다.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 않았다. 그 사실이 도리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받았고."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자기 목소리인데도 남의 것처럼 매끄러웠다.
"이상하게 보였다면 미안하다.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몰라서."
세라피나가 눈썹을 치켰다. 뭔가 더 캐물으려는 얼굴이었다. 그때 이자벨라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섰다.
"로크웰 양, 자리로 돌아가세요. 부상자 확인이 먼저입니다." 그녀는 세라피나를 물린 뒤, 카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이 아까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나를 따라오도록. 이름이?"

"카일 도렌시아입니다."
이름을 대는 순간, 이자벨라의 손가락이 지팡이를 아주 살짝 고쳐 쥐었다. 아는 자만이 알아챌 미세한 경계였다. 카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렌시아." 그녀가 이름을 곱씹었다. "역행결. 방금 그 봉합술 말이다. 어디서 배웠지?"
"…책에서요."
"어떤 책?"
카일은 대답을 골랐다. 사실 그 조합은 어떤 책에도 없었다. 미래의 자신이 성공시킨 감각을 통째로 베껴 온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급해서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거짓이었다. 이자벨라의 눈이 그 거짓을 정확히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카일을 응시하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짜리가 낼 수 있는 마력 밀도가 아니었어. 역방향 간섭은 4급 이상 인가자만 시도가 허락되는 기술이다. 그걸 즉흥으로, 그것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는 건—"
말끝을 흐리는 대신, 그녀는 카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가 아는 어떤 얼굴들이 있다. 힘을 얻고 대신 무언가를 잃은 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걸 해내고도 자기가 뭘 해냈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눈을 하고 있었지. 방금 로크웰 양이 짚은 게 그거다."
카일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이자벨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아니어도, 그 위화감의 정체를.
전생에서 이 스승은 그가 감정을 팔았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알았다면 매장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생의 이자벨라는, 첫날부터 그 냄새를 맡았다.
'벌써.'

카일은 처음으로 계산이 어긋나는 감각을 느꼈다. 회귀했다고 해서 모든 게 전생과 같지 않다. 입학식의 사고가 그랬듯, 이 스승의 눈썰미도 그랬다. 미래는 이미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교수님." 카일은 자세를 낮췄다. 상대가 무엇을 의심하든,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저는 어떤 계약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건 진실이었다. 잠식자와는 아무 거래도 하지 않았다. 서고는 잠식자의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말하면서 카일은 깨달았다. 진실을 말하는데도 목소리가 매끄럽다는 것을. 방금 잃은 게 기쁨뿐이라고 믿었는데—진실을 말할 때 마땅히 실려야 할 떨림, 억울함, 결백을 호소하는 그 힘조차 어딘가 얇았다. 감정 하나가 빠지면, 남은 감정들도 조금씩 색이 바래는 걸까.
이자벨라는 오래 그를 응시했다. 그러곤 뜻밖에도, 지팡이를 완전히 내렸다.
"오늘은 넘어가마. 삼백 명을 살린 학생을 첫날부터 심문할 수는 없으니." 그녀가 돌아서며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도렌시아. 나는 너를 지켜볼 거다. 네가 무엇을 지불하고 그 힘을 얻는지. 그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값인지."
그녀가 부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카일은 그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한 번 열람했다. 그 한 번으로 기쁨을 잃었고, 스승의 의심을 샀고, 세라피나에게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삼백 명을 구한 대가치고는—아니,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대가가 아니었다. 그건 예고편이었다. 전생 전체를 압축한 예고편.
멀찍이서 세라피나가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아직 답을 받지 못한 얼굴로. 그녀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 말하는 게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카일은 읽을 수 있었다.
'다음엔, 진짜 대답 들을 거예요.'
카일은 정신 깊은 곳을 더듬었다. 책은 다시 표지를 닫은 채 잠잠했다. 언제든 다시 펼쳐질 수 있다는 조용한 예감만 남긴 채로.
'다시는 안 연다.'
그렇게 다짐하는 그 순간에도, 카일은 알았다. 이 다짐이 얼마나 무를지. 위기는 또 올 것이고, 그때 누군가의 목숨이 걸리면, 자신은 또 손을 뻗을 것이다. 방금처럼. 오직 판단만으로는 못 구한다는 그 절박함 앞에서.
그리고 그렇게 한 번씩 열 때마다, 그는 세라피나의 이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로—전생의 폐허에 홀로 앉아 있던 그 텅 빈 최강에게로—한 걸음씩 되돌아갈 것이다.
입학식장의 소란이 정리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줄을 맞춰 강당을 빠져나갔다. 카일도 그 대열에 섞였다.

그때, 뒤통수에 닿는 시선이 하나 더 있었다.

돌아보니 강당 이층 회랑, 그늘진 난간 뒤에서 한 남학생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카일은 그 얼굴을 안다. 백 년을 걸쳐 안다.

다미안 크로프트. 전생에서, 저 다정한 미소 뒤로 그를 잠식자들에게 팔아넘긴 자.

그 다미안이,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입학 첫날에, 손에 접힌 종이쪽지 하나를 쥔 채—카일을 향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