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복도의 마법등이 다시 지지직 흔들렸다. 카일은 종이를 접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오래 서 있었다.

『전생의 계약, 이번에도 하시겠습니까?』

필체는 낮에 다미안이 창틀에서 꺼낸 쪽지와 같았다. 종이 결의 접힘도, 잉크가 마르며 번진 오른쪽 아래 얼룩도 똑같았다. 같은 손에서 나왔다. 그런데 낮의 쪽지는 재능 없는 열다섯을 노린 미끼였고, 이건 달랐다. 이건 백 년의 시간을 알고 쓴 문장이었다.

카일은 종이를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 잉크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았다. 손끝에 닿은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번졌다. 몇 시간 안에, 어쩌면 몇십 분 안에 여기 꽂혔다는 뜻이다.

그는 문틈을 살폈다. 종이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지 않고 문틀에 걸려 있었다. 밖에서 지나가던 손이 꽂아 넣은 것. 이 층에 방을 배정받은 신입은 여덟이다. 그중 오른손잡이가 쓰는 필기 각도로 잉크가 눌린 흔적—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살짝 기운 글자. 그리고 이 종이.

카일은 종이를 코 가까이 댔다. 곰팡이 냄새. 신입에게 배부하는 새 양피지가 아니었다. 오래 눅눅한 곳에 보관됐던 물건이다. 학원에서 눅눅한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지하.

*

전생의 기억을 뒤졌다. 서고를 열지 않고, 그냥 머릿속에 남은 것만으로.

아스텔 학원의 지하에는 봉인된 금서고가 있었다. 아르카나 탑이 위험 등급으로 분류한 문헌을 보관하는 곳. 전생의 카일은 4학년이 되어서야 그곳에 발을 들였고, 그때는 이미 감정을 절반 넘게 팔아버린 뒤라 벽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쓸모없는 낡은 그림'으로 손실 항목처럼 지나쳤다.

그런데 지금, 그 종이의 곰팡이 냄새가 그를 그리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카일은 방으로 들어가 등을 껐다. 세라피나에게 말할까 잠깐 생각했다. 다미안은 안 된다—그 애는 이미 쪽지를 쥐고 흔들리는 중이었다. 세라피나라면. 아니.

그는 낮에 배운 것을 떠올렸다. 물러날 줄도 아네요. 세라피나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도, 결국 그녀의 밤을 내 목적에 쓰는 일이었다. 위험을 아직 알지도 못하는데 방패로 세우는 짓. 전생에 늘 하던 그것.

혼자 간다. 다치면 나 하나.

카일은 어둠 속에서 마력을 손끝에 모아 미약한 탐지선을 뽑았다. 실 한 가닥 굵기의 은빛 마력이 문틈으로 빠져나가 복도를 훑었다. 발자국의 잔열—누군가 방금 지나간 온기가 계단 쪽으로 이어지다 흩어졌다. 계단 아래로.

*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자물쇠가 아니라 마법 봉인으로 잠겨 있었다. 오래된 방식. 4급 이상 인가자만 다룰 수 있는 역방향 간섭이 필요한 봉인이었다.

카일은 무릎을 꿇고 봉인의 무늬를 읽었다. 여기서 서고를 열면 이 봉인이 어떤 순서로 풀리는지, 어디를 먼저 건드려야 하는지 그림처럼 보일 것이다. 한 번의 열람. 감정 하나. 낮에 다미안 앞에서 물러섰던 그 손이 다시 근질거렸다.

안 돼.

그는 눈을 감고, 손으로 봉인의 결을 더듬었다. 마력의 흐름이 시계 방향으로 감기고 있었다. 잠금점은 세 개. 봉인술의 기본—역방향으로 되감으려면 가장 바깥의 잠금점부터가 아니라 가장 약하게 진동하는 안쪽부터다. 전생의 지식이 아니라, 전생 이전에 열다섯의 그가 밤새워 익힌 기초. 그가 진짜로 배운 것.

손끝에서 은빛 실이 봉인의 안쪽 잠금점을 살살 되감았다. 딸깍. 두 번째. 딸깍. 세 번째에서 봉인이 저항했다. 마력이 역류하며 손등을 찢을 듯 밀어냈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힘을 빼는 대신 흐름에 맞춰 실을 놓았다. 저항을 이기려 하지 않고, 그 리듬에 올라탔다.

봉인이 소리 없이 풀렸다.

문이 손가락 하나 너비로 열렸다. 아래에서 차고 눅눅한 공기가 올라왔다. 그 종이에서 나던 곰팡이 냄새. 맞았다.

*

지하 통로는 마법등 대신 벽에 박힌 발광석이 드문드문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백 년 전에도 켜져 있었을 흐린 청록색 빛. 카일은 벽을 짚으며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아치가 있었고, 아치 너머가 금서고였다.

책장이 아니었다. 예상과 달랐다. 문헌은 안쪽에 있고, 입구 벽 전체가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벽화.

카일은 발광석 하나를 떼어 손에 들고 벽을 비췄다.

인물상이었다. 무릎 꿇은 사람이 두 손으로 유리병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병 안에는 빛 같기도, 액체 같기도 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위로 형체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손을 뻗어 병을 받아 가는 구도. 무릎 꿇은 자의 등 뒤로 똑같은 자세의 인물들이 줄지어 그려져 있었다. 열, 스물, 셀 수 없이. 모두 병을 바치고 있었다.

병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카일은 알 것 같았다. 감정. 감정을 병에 담아 바치는 그림.

명치가 서늘해졌다. 이건 잠식자의 의식을 그린 벽화였다. 감정을 '가장 안 쓰는 것'이라 부르며 하나씩 받아 가는—그가 낮에 다미안에게 던진 그 질문의 답이 여기 벽에 그려져 있었다. 안 쓰는 거면 왜 모으겠어. 이렇게 모으려고. 병에 담아, 저 형체 없는 것에게 바치려고.

벽화 아래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마법 문자. 카일이 읽을 수 있는 건 절반도 안 됐다. 잉크가 아니라 돌에 파낸 것이라 세월에 마모되어 조각조각 끊겨 있었다. 그는 품에서 수첩과 목탄을 꺼내, 읽히지 않는 것까지 통째로 형태만 베꼈다. 세 줄. 그중 한 단어는 반복해서 나왔다. 되풀이되는 세 글자. '그릇'인지 '제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전부 베낄 시간은 없었다. 발광석을 벽에서 뗀 순간부터, 통로 안쪽 어딘가에서 낮은 진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

경비 마법이었다.

발광석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경비진의 마디였다. 하나를 떼어 낸 순간 진이 어긋나며 반응한 것이다. 벽면을 따라 붉은 선이 그어지듯 마력이 번져 나갔고, 그 선이 카일의 발밑을 향해 조여 오고 있었다. 완성되면—구속. 침입자의 마력을 통째로 붙잡아 봉인하는 오래된 방식.

붉은 선이 손목만 한 폭으로 좁혀 왔다. 여기서 서고를 열면, 이 진의 파훼점이 어디인지 정확한 좌표까지 보일 것이다. 한 번이면 된다. 감정 하나 값에 확실한 탈출.

카일의 손이 관자놀이로 올라갔다. 책을 여는 자세. 백 년 동안 위기마다 반사적으로 하던 몸짓.

낮에 세라피나가 지나가며 남긴 말이 귀에 걸렸다. 물러날 줄도 아네요.

물러설 곳은 없었다. 하지만 열지 않는 것도 물러섬이었다.

카일은 손을 내렸다. 대신 붉은 선을 노려봤다. 이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문제였다. 지금의 눈으로 풀 수 있는 문제. 진이 발광석을 마디로 삼는다면, 마디를 하나 더 만들어 흐름을 흩으면 된다. 파훼가 아니라 교란.

그는 떼어 낸 발광석을 다시 벽에 붙이지 않았다. 붙이면 어긋난 게 되돌아오며 진이 완성된다. 대신 그것을 통로 반대편으로 힘껏 굴렸다. 발광석이 붉은 선 바깥으로 데굴 굴러가 멈췄다.

진이 혼란스러워했다. 마디 하나가 사라진 자리와, 엉뚱한 곳에 나타난 마력원. 붉은 선이 두 곳으로 갈라지며 늘어졌다. 그 틈—갈라지며 얇아진 선 하나가 손바닥 너비로 벌어졌다.

카일은 그 틈으로 몸을 던졌다.

붉은 선이 등 뒤에서 짝, 하고 합쳐지며 닫혔다. 늦었다. 그의 발뒤꿈치를 스치기만 하고. 진이 헛되이 허공을 붙잡고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카일은 아치 밖 어둠 속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들겼다. 손등에 봉인을 되감을 때 생긴 붉은 자국이 화끈거렸다.

서고를 열지 않았다. 감정 하나도 내주지 않고, 내 손과 내 판단으로만 빠져나왔다.

이겨야 할 순간에, 기뻐야 할 순간에—카일은 자신의 안을 더듬어 봤다. 기쁨은 없었다. 첫 열람 때 도려내진 자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승리감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른 게 있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살아 있게 했다.

없는 기쁨을 억지로 찾는 대신, 카일은 남은 두려움을 붙들었다. 이게 사람이었다. 이게 내가 지키려는 것이었다.

*

"거기서 뭘 하고 있지."

카일의 등이 굳었다. 통로 위쪽, 계단참에서 발광석 빛이 흔들렸다. 이자벨라 벤저민이 지팡이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봉인이 풀린 걸 눈치챈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카일은 일어섰다. 수첩은 이미 품 안에 있었다. 거짓말을 만들 수도 있었다. 길을 잃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낮에도 그의 대가를 눈치챈 사람이었다.

"내려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쪽지가 여기로 이끌었어요."

이자벨라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카일의 손등, 봉인 자국을 훑었다. 그리고 아치 너머 벽화로 향했다가, 다시 카일에게 돌아왔다.

"봉인을 어떻게 풀었지. 여기 봉인은 4급 인가자 기준이야. 열다섯 살 신입이 손댈 물건이 아니다."

"기초 봉인술입니다. 되감았습니다."

"기초로 되감았다고." 그녀가 지팡이 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딱딱한 소리. "경비진은. 저건 되감기로 안 풀려. 그런데 넌 멀쩡히 밖에 서 있구나. 무슨 힘을 썼지."

카일은 침묵했다. 서고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서고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 그가 말했다. "발광석을 하나 굴려서 진을 갈랐어요. 그 틈으로 나왔습니다."

이자벨라가 그를 오래 봤다. 발광석 빛 아래,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게 파였다. 그 눈에 담긴 건 의심이 아니었다. 더 오래된 것. 무언가를 다시 마주하는 사람의 눈.

"카일 도렌시아." 그녀가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너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냄새요."

"비유다." 그녀는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오래전에, 나는 어떤 마법사를 알았다. 재능이 넘쳤고, 위기마다 남들이 못 보는 답을 냈지.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이길수록 조금씩 옅어졌다.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겁내야 할 때 겁내지 못했지. 결국 아무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 무너졌다."

카일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넌 방금 경비진을 뚫고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어. 봉인을 풀고도 뿌듯한 기색이 없었지. 열다섯이 저런 일을 해내면 눈이 반짝여야 정상이야."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런데 넌, 그 사람과 같은 눈을 하고 있다. 이겨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사람의 눈."

카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말한 마법사가 누구인지, 이 순간 소름 끼치게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자신이었다. 다른 세계선의 그 자신. 이자벨라가 알았던 그 마법사가 누구든, 그 궤적은 전생의 카일과 완벽히 겹쳤다.

"지켜보겠다고 했지." 이자벨라가 등을 돌렸다. "지금은 그 말을 지킨다. 하지만 카일, 잘 들어라. 그 사람은 딱 한 번만 멈췄으면 됐어. 딱 한 번,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으면. 너에게 그 한 번이 왔을 때—"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마지막 말을 어깨 너머로 던졌다. "네가 오늘처럼 손을 내리길 바란다."

발광석 빛이 멀어졌다. 카일은 어둠 속에 다시 홀로 남았다.

딱 한 번,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으면. 그는 오늘 그 한 번을 했다. 그녀는 모르는 채로, 정확히 오늘의 그를 가리켰다.

*

방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었다.

카일은 촛불을 켜고 수첩을 펼쳤다. 베껴 온 세 줄의 문장. 목탄으로 형태만 옮긴 고대 문자를, 그는 전생에 익힌 해독 지식을 서고 없이 하나씩 대조해 나갔다.

첫 줄. 반복되던 세 글자는 '그릇'도 '제물'도 아니었다. '바치는 자'. 병을 든 사람. 스스로 감정을 담아 올리는 자.

둘째 줄. 절반이 마모되어 이어지지 않았다. …담아 …가장 아끼지 않는 것부터…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낮에 세라피나가 다미안의 쪽지를 두고 하던 말과 소름 끼치게 닮았다. 처음엔 하나씩. 결국 전부.

셋째 줄은 문장이 아니라 이름 같은 것이었다. 해독이 안 됐다. 대신 그 옆에 작은 그림 하나가 함께 새겨져 있던 걸 그는 목탄으로 옮겨 왔다. 벽화 중앙, 병을 든 무릎 꿇은 자의 얼굴. 벽에서는 발광석 빛이 흐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부분.

카일은 촛불을 종이 가까이 가져갔다.

목탄으로 옮긴 얼굴선이 촛불에 드러났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병을 들어 올린 자. 그 얼굴이.

카일의 손에서 촛불이 흔들렸다. 밀랍이 손등에 떨어졌지만 그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두려움이 남아 있다고 믿었던 자리마저, 이 순간엔 얼어붙었다.

벽화 속 얼굴은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매일 아침 물그릇에 비쳐 보던 얼굴. 열다섯이 아니라 다 자란, 감정을 전부 팔아 치우고 폐허에서 홀로 죽어간—전생의, 카일 도렌시아였다.

백 년 전에 그려진 벽에, 그가 있었다.

병을 바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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