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계단 중턱에서 접수증을 접었다 펴기를 세 번. 붉은 잉크는 그때마다 같은 문장을 토해냈다. 실패 시 강제 봉인, 비가역.

서율은 계단을 마저 내려오는 대신 몸을 돌렸다. 로비의 회전문이 그의 뒤에서 한 번 더 돌았다.

"청원서에 서명한 지 10분 만에 돌아오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접수 직원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서율은 접수증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붉은 한 줄을 손톱으로 짚었다.

"이 조항. 서명 전에 왜 고지받지 못했습니까."

"뒷면 지참물 안내와 함께 표기돼 있습니다. 접수증 발급으로 고지 완료입니다."

"앞면에 있고, 다른 글자보다 흐리게 찍혀 있고, 제가 계단에서야 봤습니다."

"규정은 규정입니다."

그 말이 오늘만 세 번째였다. 어제 달빛석 앞에서, 오늘 사자 석상 앞에서, 그리고 지금. 세상은 서율에게 규정이라는 단어를 성벽처럼 쌓아 올렸다. 그는 성벽의 벽돌을 하나하나 셀 필요가 있었다.

"규정을 보고 싶습니다. 심사 실패 판정 기준, 봉인 집행 절차. 열람 권한이 어디 있습니까."

직원이 잠깐 서율을 살폈다. 미등록 위험 조각가에게 규정집을 넘기는 게 규정에 맞는지 저울질하는 눈이었다.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로비 안쪽 복도를 가리켰다.

"3층 자료 열람실. 심사 대상자는 신청 규정 열람 가능. 접수증 지참하세요. 대출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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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열람실은 천장이 낮고 공기가 종이 냄새로 절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눈꺼풀처럼 깜빡였다. 서율은 어깨 위 새 두 마리를 소매 안으로 숨긴 채—협회 건물 안에서 사역물을 드러내는 게 유리할 리 없었다—규정집 색인을 뒤졌다.

제9조. 계승 예외 조항. 도현이 짚어준 그 조항의 옆 페이지에, 심사 판정과 봉인 집행을 규정한 부속 조항이 빼곡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 내려갔다. 왼손은 감각이 무뎌 종이 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잿빛으로 굳은 손등에 새로 돋은 반점이 형광등 밑에서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제9조 3항, 계승 심사의 봉인 집행은 '심사위원 전원 합의로 사칭이 확정된 경우에 한한다'—인데."

혼잣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서가 뒤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겹쳐 들어왔다.

"—그런데 접수증엔 '실패 시'라고만 적혀 있죠. 사칭 확정과 심사 실패는 같은 게 아닌데 말이에요."

서율의 손이 멈췄다. 서가 사이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짧은 트렌치코트에 목에 건 출입증, 손에는 협회 방문객용 태그가 아니라 낡은 취재 수첩. 그녀는 서율을 아래위로 훑더니,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대신 서율이 펼쳐 둔 페이지를 먼저 들여다봤다.

"3층까지 올라와서 그걸 짚은 건 잘한 거예요. 대부분은 계단에서 접수증 확인하고 포기하거든요."

"제가 계단에서 봤다는 건 어떻게—"

"봤으니까요. 아까 로비에서. 접수증 접었다 폈다 하는 거."

서율은 반사적으로 소매를 여몄다. 여자는 그 동작을 놓치지 않고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하늬예요. 프리랜서. 협회가 뭘 감추는지 3년째 파고 있고요. 당신, 어제 인증 부적합 판정 받고 오늘 사자 석상 봉인한 그 사람이죠. 한서율."

이름이 그녀 입에서 나왔다. 어제 마을 사람들이 사칭자라고 부를 때와도, 협회원들이 위험물로 분류할 때와도 다른 발음이었다. 그냥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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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도우러 오신 겁니까."

서율이 물었다. 사흘 안에 통과하지 못하면 힘을 잃는다. 힘을 쓰면 몸이 굳는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 손을 내민다면,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늬는 웃지 않았다. 수첩을 카운터에 툭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아뇨. 착각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도우러 온 게 아니라, 협회를 취재하러 온 거예요. 마침 당신이 협회의 판정 시스템에 구멍을 낸 산 증거일 뿐이고."

"증거요."

"달빛석이 진짜한테 붉은 균열을 냈잖아요. 그거, 협회 인증이 조작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3년 동안 내가 찾던 그림이 당신 손등에 박혀 있어요." 그녀의 시선이 서율의 잿빛 손등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 사례가 필요하고, 당신은 규칙의 허점이 필요하고. 딱 그만큼."

서율은 이상하게도 그 냉정함에 어깨의 힘이 풀렸다. 구원자를 자처하며 접근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경계했을 것이다. 어제오늘 그에게 다가온 자들은 전부 무언가를 원했으니까—채권자 박도, 정찰자도, 유겐도.

"협회 안을 3년이나 파고들었다면서, 어떻게 이 건물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늬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그녀는 검지로 열람실 천장 구석의 감시 카메라를 가리켰다가, 서가 사이, 카운터 밑, 그리고 자기 코트 안주머니를 차례로 톡톡 두드렸다.

"이 건물 곳곳에 내 녹취기가 심어져 있거든요. 여섯 달에 걸쳐서. 저 카메라가 나를 찍는 동안, 내 물건들은 저들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어요.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순간 판이 뒤집히도록 걸어뒀고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합니까."

"당신은 나를 협회에 팔 수 없으니까." 그녀가 서율의 손등을 다시 눈짓했다. "미등록 위험 조각가가 협회 가서 나 신고하면, 누가 당신 말을 믿겠어요. 우린 같은 배에 탄 게 아니라, 같은 물에 빠진 거예요. 그게 더 확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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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열람실로 들어온 건 그때였다. 회색 정장, 목에 감독관 배지. 그는 서율이 펼쳐 둔 규정집과 하늬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열람 시간 초과입니다. 미등록 대상자의 규정집 열람은 15분으로 제한됩니다. 반납하시죠."

서율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규정집을 밀어 넘기려 했다. 승인. 물러남. 몸에 밴 반응이었다. 인정받지 못한 자는 규정 앞에서 목을 숙여야 한다고, 지난 이틀이 그의 등에 새겨 놓은 자세.

그때 하늬가 서율의 팔꿈치 옆을 손끝으로 눌렀다. 굳은 왼팔이 아니라 성한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낮게, 담당관은 못 듣게 말했다.

"증명해달라고 애원하지 말아요. 그럼 저 사람이 규칙을 휘두르게 돼요. 규칙이 당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문구를 그대로 읽으라고요. 저들이 쓴 문장으로."

서율은 밀던 손을 멈췄다.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어제부터 그를 옭아맨 건 사람들의 판정이었다. 그런데 판정을 내리는 근거는 사람이 아니라—종이였다. 저들이 직접 써 놓은 종이.

그는 규정집을 도로 자기 앞으로 당겼다.

"열람 제한 15분, 규정 어디 있습니까."

담당관이 멈칫했다. "그건 내부 운영 지침으로—"

"내부 운영 지침이면 열람 대상자에게 공개된 규정집엔 없다는 거죠. 그럼 이 규정집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시간 제한으로 심사 대상자의 규정 열람권을 제한하는 겁니까. 제9조 5항, '심사 대상자는 자신에게 적용될 조항을 열람할 권리를 가진다'—여기 있네요. 제한 조항은 없고."

담당관의 입이 반쯤 열렸다 닫혔다.

서율은 페이지를 넘겨 붉은 접수증을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접수증엔 '실패 시 강제 봉인'이라 적혀 있는데, 제9조 3항은 봉인 집행을 '심사위원 전원 합의로 사칭이 확정된 경우'로 못 박고 있습니다. 심사 실패와 사칭 확정은 다릅니다. 그럼 이 접수증은 규정보다 넓게 처벌을 예고한 겁니까. 담당관님 배지로, 이 접수증 문구가 제9조 3항과 어긋난다는 걸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열람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담당관은 규정집과 접수증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손이 배지 언저리로 올라갔다가, 갈 곳을 잃고 내려왔다.

"…열람, 계속하십시오. 반납은 퇴실 시에."

그는 돌아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서율은 손등을 내려다봤다. 잿빛 반점이 여전히 번들거렸지만, 방금은 힘을 한 톨도 쓰지 않았다. 새를 부르지도, 석고를 실체화하지도 않았다. 종이 위의 문장 두 줄로 감독관을 물러서게 했다. 처음이었다. 몸을 굳히지 않고 벽돌 하나를 빼낸 것은.

"봤죠." 하늬가 팔짱을 풀었다. "저들이 무서운 건 힘이 아니라 규칙이에요. 근데 규칙은 저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저들도 거기 묶여요. 당신이 규칙을 더 정확히 읽으면, 규칙이 당신 편이 돼요. 애원할 필요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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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가 사이 낮은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하늬가 수첩을 펼쳤다. 빼곡한 필기 사이에 신문 조각처럼 오려 붙인 부고 하나가 있었다. 서율은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당신 아버지, 3년 전 죽었죠. 명부에서 지워진 채로." 하늬가 손톱으로 부고 아래 여백을 짚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지워진 등록 조각가는 협회 규정상 계승 심사 청원 자체가 불가능해야 해요. 근데 심사관 강도현이 당신한테 예외 조항 길을 열어줬죠. 왜 그랬을까요."

"도현 그분이… 제 석화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손등 반점 진행 속도까지."

하늬의 펜 끝이 멈췄다. 그녀는 서율을 오래 봤다.

"협회 안에서 당신 아버지 사건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아요. 그리고 그 손에 꼽는 사람들이 지금 협회 안에서 파벌로 쪼개져 싸우고 있고요. 한쪽은 당신 가문을 몰락시킨 쪽, 다른 한쪽은—"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 아버지 죽음을 덮은 게 파벌 다툼의 승부수였다고 나는 봐요.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권력 게임. 당신은 그 게임의 오래된 말이고, 지금 판에 다시 올라온 거예요."

서율은 규정집 위에 놓인 접수증을 바라봤다. 심사장. 3일 뒤.

"그럼 심사는 공정한 시험이 아니겠군요."

"공정한 시험이었으면 내가 여기 3년을 파고 있었겠어요." 하늬가 수첩을 덮으며 일어섰다. "당신 아버지 좌표든 소환장 인장이든, 협회가 부르는 자리엔 항상 이유가 있어요. 우연히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그녀는 코트 자락을 여미고 서가 그림자 속으로 물러섰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던졌다.

"참, 하나 알려줄게요. 이건 취재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거니까 잘 들어요."

서율이 고개를 들었다.

"3일 뒤 당신 1차 심사장에, 백단휘의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앉아요. 전원 합의로 사칭을 확정하면 봉인이 집행된다고 했죠? 심사위원 셋 중 하나가 그쪽 사람이면—합의를 만드는 게 얼마나 쉬운지, 당신도 이제 알겠죠."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서가 사이 그림자로 하늬의 트렌치코트 자락이 사라졌다. 서율이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 그 자리엔 종이 냄새와 낮게 도는 공기뿐이었다.

백단휘. 처음 듣는 이름인데, 서율의 잿빛 손등이 저릿하게 당겼다. 그는 규정집 제9조 3항을 다시 내려다봤다. 봉인 집행, 심사위원 전원 합의.

셋 중 하나가 이미 그의 유죄를 정해 놓고 앉는다면, 규칙을 정확히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서율은 접수증을 접었다. 3일. 이번엔 계단에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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