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서류, 설명해 주시죠.”

서율은 이하늬가 떨어뜨린 종이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종이엔 굵은 글씨로 ‘유겐 - 별조각 협회 후계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뜻밖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저는 유겐을 조사하고 있어요.”

“조사?”

“그는 지난 오 년간 신인 조각가들의 작품을 강제로 흡수하다시피 사들이고, 그들의 창작권까지 빼앗았어요. 예술계에서는 그걸 ‘후원’이라 부르지만, 저는 그걸 착취라고 생각해요.”

서율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 접근했습니까.”

“당신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알았어요. 유겐이 절대 손댈 수 없는 재능이라는 걸. 진짜를 세상에 알리면, 가짜는 저절로 밀려나요.”

침묵이 흘렀다. 서율은 오랫동안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시회, 하겠습니다.”

하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후회 안 시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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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갤러리 ‘루나’의 조명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서율의 첫 전시회. 관람객들은 낮은 대화를 나누며 전시장을 채웠고, 하늬는 무대 옆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소개할 작가는, 아무런 배경도 인맥도 없이 오직 손끝의 감각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한서율.”

박수가 터졌다. 서율은 무대에 올라 천천히 하얀 천을 걷었다.

그 아래 있던 것은 늑대 조각상이었다. 나무결이 살아 숨 쉬는 듯한 형상, 달빛을 받은 것처럼 은은한 청백색 광택이 표면을 감쌌다.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조각상의 눈이 아주 잠깐 푸른빛을 냈다. 관람객들은 조명의 반사라 생각했지만, 서율은 알고 있었다. 늑대가 진짜로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이건 단순한 조각이 아니에요.”

하늬가 낮게 속삭였다. 서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 안, 사람들의 감탄이 이어지던 그때,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군.”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겐이었다. 서율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유겐입니까.”

“소문보다 재능이 있군, 몰락한 가문의 후예.”

유겐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아버지의 실력을 이었다면… 그 끝도 알아야겠지.”

서율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아니라, 스승이 직접 정리했으니까.”

유겐은 그 말만 남기고 유유히 돌아섰다. 서율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방금 그 말은, 아버지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확증이었다.

“서율 씨.”

하늬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알아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게 유겐의 스승이라는 걸.”

하늬의 얼굴이 굳었다.

그날 밤, 전시회가 끝난 뒤 서율이 홀로 갤러리를 나설 때였다.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눈빛은 형형했다.

“한서율.”

“누구십니까.”

“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게 무엇인지 아느냐?”

서율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당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대답 없이 품에서 낡은 조각칼을 꺼내 보였다. 서율의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칼이었다.

“나는 강도현이다. 네 아버지의 스승이었지.”

하늘 위, 아무도 모르게 떠 있는 푸른 달이 두 사람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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