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진료실은 냄새가 없었다.

소독약의 자극적인 알코올도, 의사 가운에 밴 무표정한 섬유유연제도, 창틀 먼지의 퀴퀴함도. 모든 게 사라진 지 3주째였다. 처음엔 코감기려니 했다. 다음엔 알레르기겠거니 믿었다. 그리고 오늘, 신경과 전문의가 열 장의 테스트 용지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

“서지오 씨, 여기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말씀해주세요.”

의사의 입술이 움직였다. 1번 용지를 집어 들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2번. 공기만 스쳤다. 3번, 4번, 5번. 종이의 섬유질이 손끝에 닿는 촉감만 남았다. 용지를 내려놓고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하나도…… 안 납니다.”

의사가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다. MRI 영상이었다. 내 후각 신경구를 가리키는 붉은 원이 선명했다.

“진행성 특발성 후각 소실증입니다. 후각 신경 상피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위축되고 있어요.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진행성. 특발성. 소실증. 단어들이 귀에 들어왔다가 흩어졌다. 15년 동안 3,700가지 향료를 구분해낸 사람이었다. 장미 오토의 페닐에틸알코올 0.01% 차이를 감지하고, 인도네시아 패출리와 인도 패출리의 캄퍼 함량 차이를 코끝으로 분별해냈다. 그게 내 정체성이었다. 그게 나였다.

“치료는…….”

“현재로서는 진행을 늦추는 약물밖에 없습니다. 다만 서지오 씨 같은 조향사의 경우, 특정 향에 대한 감각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부분적 감각. 입술이 찢어질 것 같은 웃음이 나왔다. 진료실을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만 느껴졌다.

작업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향료 병들. 500ml, 200ml, 50ml, 10ml. 갈색 차광 유리병 속 액체들이 형광등 아래서 어둡게 반짝였다. 첫 번째 병을 집어 들었다. 베르가못 에센셜 오일. 스포이드를 눌러 손목 안쪽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병. 인도 재스민 앱솔루트. 세 번째. 아이리스 팔리다 콘크리트. 네 번째. 아이티산 베티버. 다섯 번째. 라오스산 벤조인 레지노이드.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병을 열고, 손목에 떨어뜨리고, 코를 갖다 댔다. 피부가 알코올에 자극받아 붉어졌다. 냄새는 없었다. 오직 차가운 액체의 촉감만 남았다.

열다섯 번째 병이었다. 3년 전 내가 직접 조향한 ‘메멘토 모리’의 베이스 노트. 참나무 이끼와 시베트, 샌달우드가 블렌딩된 진한 갈색 액체. 병을 집어 벽으로 던졌다. 유리가 깨지며 액체가 벽지에 튀었다.

“……나지 않아.”

열여섯 번째 병. 열일곱 번째. 스물세 번째. 유리 파편이 바닥에 쌓였다. 신발 밑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팔을 휘둘러 선반을 쓸어냈다. 수십 개의 병들이 떨어지며 깨졌다. 향료들이 뒤섞여 바닥에 고였다. 베르가못과 시베트, 재스민과 패출리, 바닐라와 오크모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향의 시체들이 한데 엉켰다.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폐에서 거친 숨소리만 새어나왔다. 서랍을 열었다.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깨진 유리병 조각에 베인 손가락으로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일어났다. 알코올이 섞인 향료 웅덩이에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푸른 불꽃이 바닥을 핥으며 솟아올랐다.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유리 파편들이 열기에 터져나갔다. 화염 앞에 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연기가 폐로 밀려들어왔다. 매캐하고 뜨거운 공기뿐이었다. 불타는 향료의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눈이 따가웠다.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경보기를 주먹으로 내리쳐 침묵시켰다. 플라스틱 파편이 손등에 박혔다. 피가 났다. 고통은 느껴졌다. 그러나 피 냄새는 없었다. 철분 냄새, 끈적한 단백질 냄새, 따뜻한 체액의 향.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소화기가 작동하며 거품을 뿜어냈다. 바닥에는 검게 탄 잔해와 유리 파편, 그리고 거품만 남았다. 그 잔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발 밑에서 무언가 으스러졌다.

작업대 서랍을 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던 작은 금속 케이스. 케이스를 열었다. 10ml 차광 병 하나가 검은 벨벳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라벨에는 내 손글씨로 ‘레조낭스’라고 적혀 있었다. 5년 전,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향을 만들겠다는 집착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시베트의 동물적 관능, 인돌이 짙은 재스민 그랑디플로룸, 희귀한 라오스산 아가우드, 암브록산, 그리고…… 한 여성의 목덜미에서 채취한 땀을 희석한 팅크처 0.3%. 완성 당시 나는 이 향을 맡고 발기했다. 냄새만으로 사정에 가까운 쾌감을 느꼈다.

병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목이 찢어질 듯한 웃음이었다. 병을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내 바지 위로 쏟아부었다. 액체가 면직물을 적셔 허벅지와 사타구니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촉감만 느껴졌다.

바지와 속옷을 벗어던졌다. 반쯤 발기된 성기가 차가운 작업실 공기에 노출되었다. 오른손으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힌 부분이 귀두를 스쳤다.

과거에는 이 향만 맡아도 충분했다. 아니, 향을 맡기 전부터 이 병을 서랍에서 꺼내는 순간 이미 끝이었다. 성기가 바지 안에서 단단해지고, 귀두가 청바지 거친 면에 쓸리며 터져나올 듯 아려왔다. 손끝이 병뚜껑을 비틀 때쯤이면 요도구에서 이미 투명한 점액이 스며나왔다. 첫 향 분자가 코점막에 닿는 순간, 뇌는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듯 백색으로 폭발했다. 시베트의 더럽고도 달콤한 분자가 혈관을 타고 골반으로 직행해 고환을 무겁게 조여왔다. 그 향을 맡으면서 자위하는 걸 반복했고, 매번 눈물이 날 정도로 강렬한 오르가즘을 경험했다. 정액은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쳤고, 그 정액 냄새조차 관능적으로 느꼈다.

눈을 감고 그 기억을 더듬었다. 오른손으로 성기를 더 세게 움켜쥐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포피가 귀두를 덮었다가 밀려났다.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쾌락은 없었다.

손의 속도를 높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 아랫부분을 눌렀다. 이전 같으면 여기만 살짝 문질러도 허리가 들썩일 정도로 민감했던 지점이었다. 지금은 그냥…… 피부였다. 다른 팔뚝의 피부와 다를 바 없는 감각이었다.

왼손으로 고환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무겁게 눌린 고환의 감촉이 느껴졌다. 촉각은 살아있었다. 그러나 이 감각이 내 뇌로 전달될 때, 그것은 단지 ‘손가락이 피부를 누르고 있다’는 정보일 뿐이었다. 쾌락 중추는 침묵했다.

더 빨리, 더 세게.

손목이 아파왔다. 마찰열로 성기 피부가 따가워졌다. 침을 손바닥에 뱉어 윤활을 더했다. 젖은 손바닥이 성기를 미끄러졌다. 귀두가 손바닥 안에서 붉어졌다. 요도구가 벌어졌다. 숨을 헐떡이며 손을 움직였다.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허벅지 근육이 경련했다.

그러나 쾌락은 오지 않았다.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왼손 검지를 요도구 입구에 갖다 댔다.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이전 같으면 이 행위만으로도 전립선까지 전류가 흐르던 자극이었다. 지금은 따끔한 통증만 느껴졌다. 손가락을 요도 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점막이 이물감에 저항하며 조여왔다. 좁은 구멍이 손톱에 긁혔다. 따가웠다. 손가락을 더 깊이 찔러넣었다. 요도 벽이 늘어나며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고통은 느껴졌다. 쾌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뺐다. 손가락 끝에 피가 약간 묻어있었다. 피 묻은 손가락으로 다시 성기를 움켜쥐고 더 거칠게 마찰했다. 피가 윤활제가 되어 미끄러움을 더했다. 손바닥 안에서 성기가 이리저리 휘어졌다. 귀두가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혈관이 팽창했다. 숨을 몰아쉬며 손을 움직였다. 복부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정액이 고환에서 요도를 타고 올라오는 그 익숙한 감각. 나는 그 감각에 집중했다.

정액이 요도를 타고 올라왔다. 귀두 끝에서 백탁의 액체가 뿜어져나왔다. 탁탁, 하고 복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분출. 정액이 배꼽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오르가즘은 없었다.

사정은 물리적으로 일어났다. 근육은 수축했고, 체액은 분출되었다. 그러나 내 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황홀한 백색 섬광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도, 숨이 멎는 듯한 절정의 순간도 없었다. 단지 내 몸이 정액을 배출하는 걸 관찰했을 뿐이었다. 마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것과 같은, 혹은 재채기를 하는 것과 같은 생리적 반사 작용.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액이 식어가며 배와 허벅지에서 끈적이게 굳어갔다. 불타다 남은 향료 잔해와 유리 파편 사이에 앉아, 성기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바라보았다. 정액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그 염소 냄새 비슷한 알칼리성 향, 단백질이 분해되는 약간 비릿한 냄새, 내 몸의 가장 원초적인 분비물 냄새마저 사라졌다.

감각의 공허는 이렇게 생겼다. 쾌락조차, 고통조차, 절망조차 냄새가 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성기를 닦지도 않고 바지를 입었다. 정액이 마르며 음모에 엉겨붙었다.

작업실을 나왔다.

밤이었다.

미카엘리의 거리는 습기로 젖어 있었다. 바다에서 밀려온 안개가 가로등 불빛을 흩뜨렸다.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신호등도 무시한 채.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누군가 욕을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걷는 동안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길거리 타코 트럭의 고기 굽는 냄새, 하수구의 썩은 물 냄새, 지나가는 여자의 향수 냄새, 담배 연기 냄새. 세상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귀먹고 눈먼 자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아파왔다. 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내 아파트였다.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누군가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여자였다.

검은색 코트를 입고, 어깨에는 커다란 에코백을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전시회 도록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5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1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너무 희미해서 착각인 줄 알았다. 엘리베이터가 3층을 지날 때쯤,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코점막이 따끔거렸다. 3주 동안 아무 자극도 받지 않던 후각 상피세포가 무언가에 반응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풍겨오는 체취.

땀이었다. 미세한 염분 결정이 증발하며 내뿜는 희미한 암모니아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비누 냄새. 글리세린이 함유된 순한 비누, 아마도 무향에 가까운 제품일 텐데 그녀의 피부 유분과 섞이며 고유의 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 깊은 층에서는 살 냄새가 났다. 피지선에서 분비된 지방산이 산화되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단내. 겨드랑이 아포크린샘의 분비물이 피부 박테리아와 반응하며 생성되는, 사람에 따라 역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페로몬 향.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4층을 지났다.

숨을 더 깊이 들이쉬었다. 코를 벌렁이며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녀의 체취가 비강을 통해 사골동으로, 접형동으로, 전두동으로 스며들었다. 후각 신경구를 감싼 점막이 부풀어올랐다. 수상돌기 말단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죽었던 신경세포가 전기 신호를 발사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내 뇌 속에서 모든 향의 기억이 동시에 폭발했다. 베르가못의 시트러스, 재스민의 인돌, 패출리의 흙내, 샌달우드의 크리미한 우디, 시베트의 동물적 관능, 바닐라의 달콤함, 암브록산의 짠 바다 내음, 로즈 앱솔루트의 꿀 같은 단내, 베티버의 스모키한 그린, 오크모스의 축축한 이끼 냄새. 죽었던 모든 향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내 두개골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비틀거렸다.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벽을 짚었다.

그녀의 체취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며 성기로 직행했다. 불과 1분 전까지 아무 감각도 없던 성기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혈관이 확장되고 해면체에 피가 밀려들었다. 귀두가 바지 안에서 부풀어올랐다. 요도구가 벌어지며 투명한 점액이 스며나왔다. 신음소리를 삼켰다. 이건 단순한 발기가 아니었다. 내 몸 전체가 그녀의 체취를 향해 반응하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심박수가 빨라지고, 피부 온도가 올라갔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이 향을 삼키고 싶다. 이 살을 핥고 빨아들여 내 안에 가두고 싶다. 그녀의 모든 구멍, 모든 주름, 모든 분비샘에 혀를 박아넣어 이 체취의 근원을 찾아내고 싶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목은 가늘었다. 요골동맥이 내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뛰고 있었다. 피부는 따뜻했다. 그녀의 손목을 내 코 앞으로 끌어당겼다. 손목 안쪽의 얇은 피부, 정맥이 푸르게 비치는 그곳에 코를 갖다 댔다.

그녀의 체취가 폭포처럼 내 코로 쏟아져 들어왔다.

땀. 미세한 염분. 비누의 잔향. 피지. 각질층의 미세한 단백질 분해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서 흐르는, 그녀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살 냄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체취 분자 하나하나가 내 후각 상피를 적셨다. 그 분자들을 분해했다. 페로몬, 지방산, 젖산, 요소, 암모니아, 피루브산. 모든 성분이 내 뇌 속에서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고, 기억되었다.

그리고 그 향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향이었다. 어떤 향료로도, 어떤 합성 분자로도 재현할 수 없는. 오직 이 여자의 살에서만 피어나는 유일무이한 체취.

눈을 떴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이었다. 그 눈동자가…… 확장되고 있었다. 동공이 커지며 홍채를 잠식했다. 공포? 아니다. 놀라움? 그것만도 아니다. 그녀는 내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숨을 들이쉬는 이 기괴한 행위를, 그녀는 분석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아랫입술이 떨렸다. 목덜미의 피부 아래로 모세혈관이 확장되며 은은한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가 스르르, 하고 움직였다. 무의식적으로 한쪽 허벅지가 다른 쪽을 스치며 꼬였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무릎이 살짝 비벼졌다.

“……뭐 하시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비명도, 경악도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음절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 목을 지나 가슴을 지나, 바지 앞섶까지. 그곳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의 입술이 한 번 더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녀는 보고 있었다. 내 바지가 터질 듯 부풀어오른 것을. 천 위로 드러난 성기의 윤곽을. 요도구에서 스며나온 점액이 천에 번진 작은 얼룩까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입술은 아직 그녀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피부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내 입술을 간질였다.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목 안쪽을 핥았다. 소금기. 약간의 쓴맛. 혀끝이 닿자마자 고환이 무겁게 조여들고, 방금 전까지 죽어있던 성기가 바지를 뚫을 듯 솟구쳤다. 요도구가 맥박 치듯 열렸다 닫혔다. 귀두가 속옷의 거친 면에 쓸리며 터질 듯한 쾌락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혀가 그녀의 피부를 핥는 동안, 성기 끝에서 투명한 점액이 더 흘러나와 바지 앞섶의 얼룩을 넓혔다. 그 얼룩을 그녀가 보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한 번 더 확장되었다. 검은 구멍이 홍채를 삼키며 더 커졌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 날카로운 흡기음이었다. 그러나 손목을 빼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여 내 손등을 스쳤다. 우연인 듯, 의도적인 듯 애매한 접촉이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내 손등의 핏줄을 따라 2초 정도 머물렀다. 그녀의 콧구멍이 벌렁였다. 그녀도 무언가를 맡고 있었다. 내 체취를? 내 숨에서 풍기는 광기의 냄새를?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 말투에는 비난이 없었다. 확인이었다. 마치 실험실에서 표본을 관찰하는 연구자의 어조.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 바지 앞섶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가 다시 한 번 꼬였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더 의식적으로. 치마 자락이 살짝 올라가며 무릎 위가 드러났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대신 혀를 더 길게 내밀어 손목 안쪽에서 팔꿈치 쪽으로 천천히 핥아 올렸다. 그녀의 피부 위로 미세한 소름이 돋는 게 보였다. 유륜 주변의 피부가 수축하며 젖꼭지가 코트 안에서 단단해지는 게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한 박자 더 빨라졌다.

“이걸…… 향료로 만들 거예요.”

내 목소리는 쉰 듯이 갈라져 있었다. 혀를 그녀의 손목에서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당신의 이 냄새를…… 내가.”

그녀의 에코백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흰색 명함이 바닥에 떨어져 내 발 옆으로 미끄러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리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 이담

이담.

그녀의 이름을 읽는 순간, 내 코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따뜻한 액체가 콧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피였다. 그녀의 체취에 과부하된 후각 신경이 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피가 입술 위로 흘러내려 혀끝에 닿았다. 철분 맛이 느껴졌다.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의 형광등 불빛이 물결치듯 휘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빠져나갔다.

“……당신이 필요해요.”

내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소리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내 셔츠 깃을 붙잡았다. 넘어지는 내 몸을 지탱하려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깃을 붙잡는 순간,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 목덜미를 스쳤다. 그리고 그 손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내 피부 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쇄골 라인을 따라 움직이며 땀에 젖은 피부를 더듬었다. 그 차가운 감촉마저 내 신경계를 폭발시켰다. 성기가 다시 한 번 바지 안에서 맥박 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목덜미 피부가 화상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속삭였다.

“필요하다고요……?”

그녀의 입술이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내 귓바퀴를 간질였다.

“그럼 증명해봐요.”

무릎이 꺾였다. 바닥이 다가왔다. 넘어지면서도 내 시선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쇄골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손톱이 내 피부를 살짝 긁었다. 그녀의 동공이 완전히 확장되어 검은 구멍만 남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공포도, 혐오도 없었다. 호기심. 그리고 그 너머의 무언가. 배고픔에 가까운 관찰욕.

그녀의 체취가 마지막으로 내 코를 스쳤다. 그 향을 붙잡으려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공기만 폐로 밀려들어왔다. 감각이 다시 꺼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체취가 멀어지며, 모든 향이 다시 사라져갔다.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느껴진 것은 그녀의 손가락이 내 쇄골을 떠나지 않았다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내려가 내 명치께를 스쳤다는 감각. 더 내려가 복부에 닿았다는 감각. 거기서 멈췄다는 감각. 내 바지 앞섶에서 2센티미터 위, 젖은 천에서 올라오는 체온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을 거라는 상상.

그리고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며 나를 응시하던 눈빛. 공포도, 혐오도 아닌…… 호기심과, 그 호기심이 품은 어떤 배고픔이 내 의식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