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연화의 붉은 치마폭이 대왕대비전 차가운 마루를 스치며 멎었다.

"소은이라 하옵니다."

대왕대비 민씨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찻잔 뚜껑을 밀었다. 쇠붙이 스치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그 지밀 나인 말이냐."

"예. 강녕전 출입 횟수가 이달 들어 열이틀을 넘겼사옵니다. 상궁 최씨의 기록에도 없는 야간 호출이 다섯 번."

연화의 목소리는 낮고 매끄러웠다. 독사를 닮은 혀끝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조심스럽게 베어져 나왔다.

"또한 그 나인에게서 근래 묘한 향이 납니다. 전하의 용포에서 나던 것과 같은... 사향 비슷한."

대왕대비의 눈꼬리가 좁아졌다. 사향. 선왕도 품었던 짐승의 체취. 그녀가 평생 맡지 못했던, 다른 여인의 살갗에서 피어나는 그 암내.

"증거는."

"아직 없사옵니다. 하나 그 나인이 강녕전 별당 벽장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두 차례 목격했사옵니다."

대왕대비의 찻잔이 탁, 소리를 내며 놓였다.

"벽장."

그 공간을 그녀는 안다. 선왕이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은밀한 장소. 그가 죽고 대왕대비가 열두 번이나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한 '그것'이 숨겨진 곳.

"찾아라. 내칠 명분은 내가 만들 터이니."

연화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예, 대왕대비 마마."

---

현종은 붓을 내려놓았다. 주본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흘째였다. 소은이 야간 당직에서 빠진 후로 잠이라곤 한 시진도 채 못 잤다.

눈을 감으면 그 계집의 체취가 코끝에 맴돌았다. 지난밤 서재에서 느꼈던 그 애액의 점도, 손가락을 감싸던 질벽의 떨림. 그리고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손목이 스칠 때마다 타고 들어오는 그 감정의 파편들이었다.

현종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살구색 빛. 달콤하고도 쌉싸래한 향기. 두려움과 갈망이 뒤엉켜 파르르 떨리는 손끝의 감촉.

소은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 흘러들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현종은 이마를 짚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계집을 생각할 때면 가슴속 무언가가 검붉게 꿈틀거렸다. 단지 품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숨결 하나, 시선 한 줌조차 다른 누구에게도 허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낮, 그녀가 호위무사 은호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저 당직에 관한 보고였을 터였다. 고작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현종은 자신의 손아귀에 용안이 부서질 듯한 악력을 가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병이다.'

현종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병이다.'

그러면서도 이미 입은 열리고 있었다.

"지밀 나인 소은을 침전으로 들이거라."

---

자정이 지난 강녕전 침소. 촛불 세 개만이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소은은 침전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숨을 삼켰다. 현종은 이미 용포도 벗지 않은 채 침상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었다. 두 눈은 깊이 가라앉았고, 관자놀이에 불룩 솟은 핏줄이 그의 불면을 증언하고 있었다.

"가까이."

명령이라기엔 지나치게 낮고 탁한 음성이었다.

소은이 침상 앞 세 걸음 지점에서 무릎을 꿇자, 현종의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동작이 거칠었다. 맥박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토끼처럼 뛰었다.

"전하...!"

"네가 없으면 잠들 수가 없다."

현종이 소은의 손목을 그대로 당겨 침상 위로 끌어올렸다. 비단 이불이 구겨지며 바스락거렸다. 소은의 몸이 침상 중앙으로 딸려 올라가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주보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의 손이 소은의 뺨을 더듬었다. 엄지손가락이 광대뼈를 스치고, 검지가 귀밑을 지나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네 체온이 필요하다."

소은의 호흡이 가빠졌다. 지금 이 순간, 현종의 감정이 그녀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벽서를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의 마음속은 지금 검붉은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다. 갈망. 고독. 집착. 그리고 소은조차 놀랄 만큼 날것의 외로움.

"전하, 소인은...!"

"말하지 마라. 지금 네 목소리조차 내겐 견디기 어렵다."

현종의 손이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더듬었다. 한 가닥, 두 가닥. 천천히 풀릴 때마다 달빛에 젖은 비단이 바스락대며 어깨를 드러냈다. 속적삼만 남았을 때 현종의 손이 멎었다.

"두렵지 않으냐."

그가 낮게 물었다.

소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두려움보다 더 큰 무언가가 그녀의 혀를 묶었다. 현종의 손바닥이 속적삼 위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 올렸다.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비단 위로 유두가 단단해지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느껴졌다.

"아...!"

소은의 입술 사이로 터져나온 신음소리가 침소의 정적을 찢었다.

현종의 손길이 깊어졌다. 엄지와 검지로 왼쪽 유두를 굴리자, 소은의 허리가 침상에서 들렸다. 비단 아래로 젖꼭지가 완전히 발기하는 촉감이 현종의 손가락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는 그 감각을 음미하듯 천천히, 두 번, 세 번 비볐다.

"네 마음이..."

현종이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소은의 이마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내 안에 파도처럼 밀려온다."

소은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그가 분명히 감정의 누수를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벽서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읽는 만큼, 그 역시 그녀의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두려움. 갈망. 그리고..."

현종의 손이 소은의 치마 위로 내려갔다. 속곳 위로 손바닥 전체가 덮이며 그녀의 음부에 닿았다.

"...이미 젖어 있구나."

천 위로 느껴지는 뜨겁고 축축한 감촉. 소은의 질은 이미 애액을 흘려 속곳을 적시고 있었다. 현종의 중지가 음부의 갈라진 틈을 따라 길게 쓸어내렸다. 비단이 애액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는 감촉이 소은의 치골을 타고 올라왔다.

"읏...!"

"네 속마음은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현종의 손가락이 속곳 위로 음핵을 찾아 눌렀다. 단단해진 작은 돌기가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그가 원을 그리며 문지르자 소은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렸다. 애액이 더 많이 흘러나와 속곳을 적시고, 손가락 사이로 점도 높은 액체가 스며들었다.

"전하... 그만...!"

"그만하라?"

현종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네 몸은 그만두라 하지 않는데."

그의 손가락이 속곳을 벗기지 않은 채로 질 입구를 탐색했다. 애액에 흠뻑 젖은 천을 밀어 올리며 손가락 끝이 질구에 닿았다. 소은의 질벽이 손가락을 삼키려는 듯 경련하듯 열렸다 닫혔다.

현종은 더 참지 않았다. 속곳을 한쪽으로 젖히고, 애액으로 미끄러운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검지 하나가 질벽을 헤집고 들어가자, 소은의 안쪽이 뜨겁게 조여왔다.

"아, 으읏...!"

"좁구나. 손가락 하나인데 이렇게나..."

현종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질벽의 주름 하나하나가 손가락을 감싸고 빨아들이는 감촉이 그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는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엄지로 음핵을 동시에 자극했다. 안쪽에서는 질벽을 넓히듯 손가락을 회전시키고, 바깥에서는 단단한 핵을 리듬감 있게 압박했다.

"전하... 전하...!"

소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쾌감과 수치심이 뒤엉켜 그녀의 허리가 침상에서 활처럼 휘었다. 질 안쪽 깊은 곳이 손가락을 더 깊이 삼키려는 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더 듣고 싶구나. 그 목소리."

현종이 속삭이며 두 번째 손가락을 추가했다. 검지와 중지가 나란히 질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소은의 질벽이 이물감에 경련했지만, 넘치는 애액이 저항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두 손가락이 안쪽에서 벌어지며 좁은 질을 넓혔다.

"하...읏! 아...!"

"좋아. 그렇게 떨어봐."

현종의 손가락이 질 안에서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소은의 안쪽을 탐색하듯. 그러다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손가락이 출입할 때마다 애액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침소에 울려 퍼졌다.

소은은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질벽이 현종의 손가락을 스스로 조여오고, 골반이 그의 손에 맞춰 음란하게 움직였다. 유두는 천을 뚫을 듯 단단해져 있었고, 입술에서는 멈출 수 없는 신음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전하... 더... 더...!"

"무엇을 더 원하지. 말해봐라."

현종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질 안에서 손가락이 미세하게 구부러지며 소은의 가장 민감한 지점을 눌렀다.

"아앗...!"

"말해. 네 입으로."

"소인을... 소인을 안아주시옵소서..."

소은의 목소리는 울먹임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전하의 것으로... 완전히... 만들어주시옵소서..."

현종의 눈빛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며 소은의 속곳을 완전히 벗겨냈다. 이어 자신의 용포와 하의를 벗어 던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성기는 이미 완전히 발기하여 배 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귀두 끝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스며 나와 반짝였다.

"이걸 원하는 게냐."

현종이 소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성기로 이끌었다. 소은의 떨리는 손가락이 뜨겁게 달궈진 살덩어리를 감쌌다. 그 크기와 열기에 그녀의 숨이 멎는 듯했다.

"직접 넣어봐라."

현종의 명령에 소은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성기를 자신의 질 입구로 이끌었다. 귀두가 애액으로 흠뻑 젖은 질구에 닿자,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천천히."

현종이 소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한 번에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으아...앗!"

소은의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질벽이 현종의 성기 전체를 삼키며 격렬하게 수축했다. 그녀의 안쪽이 너무나 뜨겁고 좁아서, 현종은 잠시 숨을 멈추고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했다.

"너는... 너는 짐을 미치게 만드는구나."

현종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는 소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고 느린 스트로크로, 그녀의 질벽 전체를 음미하듯. 그러다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침소 안에 두 사람의 살이 부딪히는 소리, 애액이 섞여 나는 음습한 마찰음, 그리고 소은의 참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뒤섞였다.

"전하...! 전하...! 깊어요...! 너무 깊어...!"

"더 깊이 들어가 주마."

현종이 소은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리며 삽입 각도를 바꾸었다. 성기가 더 깊숙이, 자궁 입구까지 닿을 듯한 깊이로 밀고 들어갔다. 소은의 질벽이 격렬하게 경련하며 그의 성기를 조여왔다.

"이제... 이제...! 아...!"

소은의 몸이 활처럼 휘며 절정에 달했다. 질벽이 리드미컬하게 수축하며 현종의 성기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녀의 오르가즘에 반응하듯, 현종도 낮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의 정액을 쏟아부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서로의 체온과 떨림을 느꼈다. 현종의 성기가 아직 질 안에 박힌 채로, 소은의 질벽이 미약하게 경련하며 남은 정액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현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소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네가 짐의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호했다.

"그리고 짐 또한... 네 것이다."

---

그 순간이었다.

소은의 뺨 위로 벽서의 이미지가 스쳐갔다. 그녀가 현종과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자신의 감정이 전보다 더 강하게 그에게 흘러들어갈 것이고, 그 대가로 벽서에는 그녀의 욕망이 더욱 선명하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소은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대왕대비의 행차는 예고 없이 이루어졌다.

다음 날 오시, 강녕전 별당. 소은이 차를 준비하기 위해 다례원에 들렀을 때, 연화 상궁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지밀 나인 전원 별당으로 집합하라 하셨다. 대왕대비 마마의 분부다."

소은의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졌다. 도자기가 마루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별당에는 이미 서른 명 남짓한 지밀 궁녀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상궁 최씨의 얼굴은 굳은 석상 같았다. 대왕대비는 별당 한가운데 놓인 교의에 앉아 천천히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요즘 강녕전의 기강이 심히 해이해졌다 들었다."

대왕대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서늘하게 궁녀들의 등골을 었다.

"밤늦은 시각까지 침전을 드나드는 자가 있다지."

소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전하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궁중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행위를, 내 그냥 두고 볼 수 없노라."

대왕대비의 시선이 궁녀들 사이를 천천히 었다. 소은에게 이르렀을 때, 그 시선이 미세하게 멈추었다.

"상궁 연화."

"예, 마마."

"최근 두 달간 야간 당직 기록을 모두 가져오라 하였다. 지금 당장."

상궁 최씨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대왕대비 마마. 야간 당직 기록은 지밀 상궁의 권한으로 관리되는 문서이옵니다. 함부로 열람하시는 것은..."

"입 닥쳐라."

대왕대비의 염주가 멈추었다.

"네깟 상궁이 내 앞에서 권한을 논하느냐."

별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 순간, 별당 문이 활짝 열렀다.

"무슨 일이냐."

현종이었다. 익선관도 쓰지 않은 맨머리, 집무 중이던 용포 차림 그대로였다. 그의 뒤로 은호와 세 명의 호위무사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현종의 눈빝이 대왕대비를 스치고, 무릎 은 궁녀들을 고, 마지막으로 소은에게서 멈추었다.

"전하. 지금 조정 회의 중이실 시간이 아니옵니까."

대왕대비의 목소리에 미세한 가시가 돋아났다.

"중신들은 물리고 오셨사옵니까."

"물렀다."

현종이 별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마루에 울릴 때마다 궁녀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내 강녕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대비 마마께서 직접 지밀 나인들을 심문하실 만큼 중대한 사안인 듯하여."

"전하의 건강을 해칠 만한 일이옵니다."

대왕대비가 천천히 일어섰다.

"밤낮으로 침전을 드나드는 요망한 것들이 있다 하옵니다. 궁중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기강."

현종의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스쳤다.

"그 기강이라는 것이, 결국 내 침전에 누가 출입하는지 대비 마마께서 결절하시겠다는 말씀이오."

"전하!"

대왕대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왕께서 붕어하신 후 수렴청정하시던 시절, 지밀 궁녀들의 인사는 모두 중전의 권한이었사옵니다!"

"선왕은 가셨다."

현종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리혔다.

"수렴청정도 끝났다. 이 나라의 왕은 짐이다."

별당 안에는 쥐 죽은 듯 정적이 흘렀다. 궁녀들조차 숨소리를 삼켰다.

"그리고."

현종의 시선이 소은에게로 향했다. 그 눈빝 안에 남색의 빝이 어른거렀다.

"이 궁녀는."

그의 손이 소은을 가리켰다.

"내가 직접 점찍은 자다."

별당 안의 모든 시선이 소은에게로 렀다. 연화의 눈빝은 독을 머금었고, 대왕대비의 얼굴은 굳어졌다. 상궁 최씨는 눈을 감았다.

소은은 숨을 멈추었다. 심장이 마치 손아귀에 움켜잡힌 듯 멎는 줄 알았다. 그 충격이 척추를 타고 내려가 발끝까지 저렸다. 주변의 시선들이 바늘처럼 그녀의 살갗에 혀들었다. 연화의 독의 섞인 눈빝, 대비의 굳어짂 표정, 동료 궁녀들의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꿈틀다. 그분이 나를, 모든 이 앞에서 나를 선택하셨다. 그 전율이 두려움을 잠식하며 온몸을 떨리게 했다. 손끝이 떨렸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구도 손 수 없다."

현종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호했다.

"대비 마마. 이것이 짐의 뜻이오."

대왕대비의 염주가 , 하고 끊어졌다. 알알이 마루에 흩어지며 구슬 소리를 다.

"전하... 지금 전하께서 하신 말씀의 무게를 알고 계시옵니까."

"안다."

현종이 대왕대비의 눈을 바로 응시했다.

"내 말은 곧 이 나라의 법이다."

대왕대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있지 못했다. 현종의 눈빝 안에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왕대비 앞에서 자신의 왕권을 노적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돌아가시지요."

현종이 등을 돌렸다.

"상궁 최씨. 지밀 궁녀들을 모두 물리거라."

"예... 전하."

대왕대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치마폭이 바람을 가르며 별당 문을 향했다. 연화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문을 나서기 직전, 대왕대비가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빝이 소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시선 안에는 분명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

그날 밤, 소은은 지밀 처소 깊숙한 구석에서 벽서를 펼쳤다.

손끝이 떨렸다. 낮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현실 같지 않았다. 현종이 대왕대비 앞에서, 모든 궁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를 '내가 직접 점찍은 자'라고 선언했다.

이제 이 분은 기어이 나를 선택하셨구나.

그 전율이 아직도 등골을 타고 흘렀다.

벽서가 천천히 빝을 발했다. 그녀가 읽으려 한 것은 현종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벽서가 비춰낸 것은 다른 페이지였다.

소은의 숨이 멎었다.

벽서의 후반부. 전에는 희미하게만 보이던 글자들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분을 완전히 갖고 싶다.'

소은의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 글자는 그녀의 필체였다. 그녀가 쓴 적 없는, 그러나 분명히 그녀의 속마음에서 비롯된 문장이었다.

'왕이 아닌 나만의 남자로.'

글자가 꿈틀거리며 점점 더 선명해졌다. 먹빝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숨 쉬며 종이 위에서 번졌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분이 나를 품는 순간, 나는 이 벽서로 그분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소은은 벽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벽서는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 공중에 떠올랐다. 그 순간, 손끝에서 날카로운 저림이 번쪘다. 마치 벽서가 그녀의 생기自體를 빨아들이는 듯한 섬한 감각. 손바닥과 종이 사이의 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주변의 공기를 파동처럼 울렸다. 불이 일제히 흔들리며 그녀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일그러졌다.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며 새로운 문장들을 아냈다.

'선왕의 벽서는 읽는 자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가장 부끄러운 속마음이 기록될 때.'

'비로소 벽서는 완성된다.'

소은의 눈앞에서 마지막 공백 페이지가 천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늘 낮, 현종의 선언을 들으며 느던 감정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이제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대비 마마의 살의 따위, 이 감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소은은 벌떡 일어섰다.

"안 돼...!"

그녀의 비명이 지밀 처소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벽서는 조용히 빝을 내며 천천히 그녀의 손안으로 다시 내려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러나 소은은 알았다. 벽서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욕망이 벽서를 완성시키는 순간,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임을.

불이 흔들렸다. 벽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어둠이 스며들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한 줄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뒷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은은 직감했다. 그 문장이 채워지는 날, 그녀와 현종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것이 구원일지 파멸일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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