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노트북이야.
내 손가락은 이미 마우스를 감싸쥐고 있었다. 화면 속엔 그날의 기록이 그대로 멈춰 있다. 수술실 온도 21.3도. 집도의 정태준. 보조의 이원호. 마취의 김선영. 환자명 이경호, 남, 47세.
여기까지였다. 내가 지난밤 본 마지막 장면.
지금은 수요일 오후 4시 28분. 정태준은 병원에 있을 시간이다. 나는 그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가 알려준 와이파이 비밀번호로 접속한 지 삼 일째다. 시스템 로그인 화면이 떠올랐고, 나는 지난밤 백수진의 USB에서 찾아낸 병원 인트라넷 우회 경로를 따라 들어갔다.
이경호. 수술 기록. 사망 진단서. 부검 보고서.
파일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수술 중 대동맥 손상. 지혈 실패. 과다 출혈로 인한 심정지. 사망 시간 2019년 11월 14일 오후 9시 47분. 집도의 책임. 3개월 정직 및 민사 합의.
내가 읽고 있는 건 단순한 의료 사고 기록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에게서 맡았던 소독약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피비린내가 섞인, 차갑고 날카로운 알코올 향.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던 떨림. 수술실 모니터에서 길게 이어지던 심박 곡선. 평평해지는 선. 수술복 위로 번지는 붉은 얼룩. 장갑 낀 손이 메스를 떨어뜨리는 순간.
환영이었다. 지금은 밤도 아닌데, 노트북 화면 너머로 그날의 수술실이 겹쳐 보였다.
나는 화면을 스크롤하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환영 속 정태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메스를 쥔 손이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화면을 닫지 못했다. 그대로 굳어버린 채 노트북을 바라봤다.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길게, 세 번. 비밀번호 입력음이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윤세아.”
정태준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고, 끝이 갈라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현관에 서 있었다. 의사 가운도 벗지 않은 채였다. 왼손에는 태블릿을 쥐고 있었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지 않았다. 꽉 쥔 주먹이 오히려 너무 안정돼 있었다. 3년간 그를 따라다니던 미세한 진전이 사라진 손. 그 눈은 내 뒤의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병원 보안팀에서 연락 왔더라.”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누군가 내 계정으로 열람 권한이 없는 기록에 접근했다고. 로그인 IP 추적했더니 이 아파트 와이파이더라.”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손가락이 아직 키보드 위에 얹혀 있었다.
“처음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해킹인 줄 알았지.” 그가 태블릿을 식탁 위에 던졌다. 화면엔 접속 기록이 떠 있었다. 날짜, 시간, IP 주소, 열람 파일 목록. “그런데 접속 시간이 전부 내가 샤워하거나 잠든 사이였어. 네가 여기 있었던 시간이지.”
그가 내 앞에 섰다. 키 차이만큼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왜.”
한 단어였다. 질문이 아니라 선고처럼.
내 목에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화면 속 이경호의 사망 진단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태준의 눈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엔 내가 보였다. 노트북 앞에 앉은 채 굳어버린 여자.
“당신을 더 알고 싶었어.”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낯설었다. 너무 건조하고, 너무 담담했다.
“무슨 소리야.” 그의 턱이 굳어졌다.
“당신이 왜 떠는지. 왜 잠들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지. 왜 절정의 순간에 ‘망쳤어’라고 중얼거리는지.”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었어. 당신의 모든 결함을.”
“그게 무슨 권리로!” 그가 처음으로 소리쳤다. 식탁이 흔들렸다. “그건 내 기록이야. 내 환자야. 내 과실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들여다봐?!”
“당신이 내 앞에서 무너졌으니까.”
내 대답에 그의 숨이 멎었다.
“당신이 먼저 내 앞에서 떨었어. 소독약 냄새를 풍기면서. 내 손이 당신 뺨에 닿았을 때 당신은 내게 기대왔어.”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사랑했어. 당신의 결함을 온전히 알고 싶었어. 그게 잘못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힘이 너무 강해서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건 집착이야, 윤세아.” 그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가가 붉게 충혈돼 있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당신은 나를 연구했어. 향료 분석하듯이.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결함 있는 표본이 필요했던 거야.”
표본.
그 단어가 가슴 한복판을 찔렀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잡아당겼다. 내 몸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술실의 그 냄새. 하지만 지금은 환영이 아니었다. 진짜 그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오늘 수술이 있었던 거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을 통제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당신의 떨림이 언제 멎는지, 어떤 순간에 더 떠는지, 내 손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전부 알고 싶었어.”
그의 손아귀 힘이 더 세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충혈된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었어. 당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봐도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어. 당신이 ‘망쳤어’라고 말할 때, 그게 당신 혼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해?!” 그가 나를 밀쳤다. 등이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내 죄책감은 내 거야. 내 환자는 나 때문에 죽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정보를 훔쳐봐도, 그날의 나는 메스를 잘못 잡았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3년간 눌러담았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아팠다. 등도 아팠지만, 그보다 그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찢었다. 내가 사랑한 떨림이, 내가 알고 싶었던 결함이,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핸드폰이 울렸다.
소파 위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 백수진.
정태준도 그 이름을 봤다.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저 여자… 호텔 바 사장 아니야?”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백수진은 문자를 보내왔다. 짧은 한 줄이 화면에 떠올랐다.
“정태준 선생님께도 같은 자료 보내드렸어요. 확인해보세요, 윤세아 씨.”
정태준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 한 통. 그리고 이메일 알림. 그가 메일을 열었다. 첨부 파일이 로딩되는 동안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그의 핸드폰 화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었다. 백수진이 내게 줬던 USB. 내 과거. 조향 실패작으로 인한 향 변질 사고. 피해자 명단. 변호사 합의서. 내가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
“이게… 너야?”
정태준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그가 핸드폰을 내 쪽으로 돌렸다. 화면 속엔 4년 전 내 사진이 있었다. 조향실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향수병을 줍는 사진. 눈물과 마스카라가 번진 얼굴. 그리고 기사 제목. ‘유명 조향사 윤세아, 향 변질 사고로 전시회 취소… 피해자 3명 피부 발진’. 그 기사 옆엔 피해자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목덜미와 팔뚝에 붉은 발진이 번져 올라온 여성의 피부. 각질이 일어나고 진물이 맺힌 상처. 내 향수 때문이었다. 내가 놓친 밸런스 때문에.
“당신도… 똑같았구나.”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충혈됐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가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눈빛이었다. 실망도 아니고, 경멸도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눈.
“당신도 실패한 거야. 당신도 망친 거야.”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왜 나만 들여다보려 했어? 왜 내 결함만 수집했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옳았다. 나는 내 실패는 감추고 그의 실패만 들여다봤다. 내 트라우마는 들키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서, 그의 트라우마는 완벽히 소유하려 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관찰자의 특권을 이용한 폭력이었다.
“가.” 그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환자 기록은 오늘 중으로 보안팀에 신고할 거야. 법적 조치를 받아들여.”
“태준아.”
“가지 말랬잖아!”
그가 책장을 발로 찼다. 『의료 과실과 법적 책임』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책 속에 그가 반복해서 읽었을 문장들. 과실의 입증. 책임의 범위. 형사처벌과 민사합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가 ‘망쳤어’라고 중얼거린 건 단지 수술 과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첫 만남에서, 그가 내 안에 들어와 절정으로 치달을 때 중얼거린 ‘망쳤어’는… 그건 나를 만난 것 자체에 대한 후회였다. 이미 그때부터 그는 알았던 거다. 내가 그의 결함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그의 떨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려 한다는 것을.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내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그때였다. 그가 갑자기 내게로 다가왔다. 물러섰던 한 걸음을 다시 좁혔다. 그의 손이 내 목을 향해 올라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등은 이미 식탁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목에 닿았다. 길고 단단한 외과의사의 손가락.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단 하나의 생명을 놓친 그 손가락.
떨리지 않았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거야?”
그의 엄지가 내 목젖을 눌렀다. 숨이 막혔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외과의사의 손은 예민하면서도 강했다. 수술실에서 메스를 쥐듯, 그는 내 목을 정확히 감싸쥐었다.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잖아. 내가 떠는 손으로 당신을 만지길 바랐잖아.” 그의 얼굴이 내 귀에 바짝 다가왔다. 숨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근데 이젠 안 떨려. 당신을 보니까 오히려 안 떨려. 웃기지?”
그가 내 목을 조르는 힘을 더 세게 줬다. 기도가 좁아졌다. 숨이 가빠졌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체온. 맥박. 그리고 그가 내 위로 올라타며 내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무릎.
“내가 진짜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지?”
그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조른 채, 다른 손으로 내 블라우스 단추를 잡아당겼다. 단추가 튕겨나갔다. 브래지어 위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정확히 체온과 같은 온도의 손. 그는 내 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비틀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젖꼭지에서 터져 나왔고, 동시에 유두가 그의 손가락 안에서 딱딱하게 솟아올랐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나야.”
그가 내 목에서 손을 풀었다. 동시에 내 치마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이 내 팬티 옆으로 파고들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질 안으로 그의 검지와 중지가 한 번에 밀고 들어왔다.
“아…!”
고통과 쾌감이 뒤섞인 신음이 터졌다. 질벽이 이물감에 경련하듯 수축하며 그의 손가락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수술하듯 정확하게, 집요하게, 내 안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을 찾아 구부러졌다. 손가락 마디가 질벽을 긁으며 G스팟을 눌렀다. 애액이 급속도로 분비되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질 안에서 퍽퍽 소리가 났다. 창피할 정도로 빠르게 젖어드는 내 몸이 스스로에게 혐오스러웠다.
“젖었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러는데도 젖어. 당신은 내가 무너지길 바라면서, 정작 내가 무너지는 순간엔 이렇게 반응해.”
그의 손가락이 질 안에서 휘어졌다. G스팟을 누르는 압력. 나는 식탁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다리가 풀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안에서 피스톤처럼 움직일 때마다 질벽이 그의 손가락을 더 깊이 빨아들였다. 애액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식탁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당신은 내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은 거야.” 그가 내 귀를 깨물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연골을 스쳐 피가 맺혔다. “아니면 망가진 나한테 망가져지는 걸 원하는 거야?”
그가 내 목을 다시 조르며 손가락을 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내 목을 조를 때마다 질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산소 부족이 오히려 쾌감을 증폭시켰다. 내 몸이 그의 폭력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내 목을 조르면 질은 더 강하게 수축했고,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숨이 더 막혔다. 고통과 쾌감이 동기화되어 뇌를 때렸다.
그때 그가 내 목에서 손을 떼고, 나를 식탁 위로 밀어 올렸다. 등이 차가운 대리석에 닿았다. 그가 내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섰다.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온 그의 성기. 완전히 발기한 상태였다. 귀두가 붉게 충혈되어 반짝이고 있었고, 요도구엔 이미 투명한 선점액이 맺혀 있었다. 사이즈가 커서 아랫배까지 닿을 듯이 뻗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그가 내 입구에 귀두를 댔다. 애액으로 흥건해진 질 입구가 그의 귀두를 반겼다. 하지만 그는 삽입하지 않고, 입구만 살짝 비벼댔다. 귀두가 음핵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듯한 쾌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음핵이 붓고 단단해져서 그의 귀두가 스칠 때마다 경련했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내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가 한 번에 나를 뚫었다. 질 깊숙이, 자궁 경부까지 닿을 듯한 깊이로 들어왔다. 내 몸이 활처럼 휘었다. 너무 깊고, 너무 커서 내장이 밀려나는 감각. 고통과 충만감이 뒤섞여 숨이 멎었다.
“숨 쉬어.”
그가 명령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그가 허리를 빼고 다시 찔러 넣었다. 질벽이 그의 성기 전체를 감싸며 마찰했다. 너무 빨라서 애액이 허옇게 변해 그의 성기 뿌리 부분에 고였다. 그가 내 허벅지를 잡아 더 높이 치켜들고 박아댔다. 깊고 무거운 피스톤 운동. 그의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갑자기 내 몸을 뒤집었다. 얼굴이 식탁에 닿고 엉덩이가 그의 허리 높이로 올라갔다. 뒤에서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삽입. 이번엔 더 깊었다. 중력 때문에 그의 성기가 자궁 입구를 직접 찔렀다. 나는 식탁보를 움켜잡았다. 그의 골반이 내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찰싹 소리가 울렸다.
“망쳤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 처음 들었던 그 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건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건 나를 향한 선고였다. 우리가 서로를 망쳤고, 지금 이 순간조차 망치고 있다는 인정.
“나도… 망쳤어…” 내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충혈된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분노의 벽이 깨지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절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 목을 다시 조르며 더 거칠게 박아댔다. 식탁이 벽에 부딪혀 쿵쿵 소리를 냈다. 내 목에 낀 그의 손가락. 떨리지 않는 손. 죄책감을 직면한 손. 분노로 죄책감을 태워버린 손.
“내가 무서워?”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그가 처음으로 솔직해졌다고 느꼈다. 더 이상 떨지 않는 손으로 나를 조르는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죄책감을 숨기지도, 도망치지도, 나를 통해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망가진 자신 그대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 목에서 간신히 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금… 제일 솔직해.”
그의 손아귀 힘이 순간 약해졌다. 그리고 다시 세게 조여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의 손바닥이 내 맥박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환자의 활력징후를 체크하듯.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나를 느끼려는 손.
그가 허리를 더 깊이 밀어 넣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이게 나야.”
나는 절정에 이르렀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질벽이 그의 성기를 강하게 죄며 경련했다. 애액이 분수처럼 분출되어 그의 아랫배를 적셨다. 오르가즘의 파도가 척추를 타고 뇌를 때렸다. 눈앞이 하얘졌다. 손가락이 마비되고, 발끝이 저렸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식탁 위에 울려 퍼졌다.
그가 내 목에서 손을 풀었다. 동시에 그도 절정에 이르렀다. 질 안에서 그의 성기가 격렬하게 박동하며 정액을 토해냈다. 뜨거운 액체가 자궁 입구를 때렸다. 여러 번에 걸쳐 사정하는 동안 그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의 심장소리가 내 갈비뼈를 통해 들렸다.
우리는 한동안 그대로 식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성기가 아직 내 안에 박혀 있었다. 식어가는 정액이 질 밖으로 흘러내려 허벅지를 적셨다. 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내 목엔 그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일어났다. 천천히, 조용히. 내 안에서 빠져나오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다시 한 번 몸이 떨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집어 입었다. 셔츠 단추는 그대로였다. 내가 찢어버린 단추 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식탁 위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질 안이 텅 빈 느낌이 계속 욱신거렸다.
현관문을 열기 전, 그가 멈춰 섰다.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내 기록을 봤으니까, 나도 당신 기록을 봤어. 백수진이 보낸 자료 전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나랑 똑같아. 망친 걸 붙잡고 사는 사람.” 그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어. 나는 내 과실을 직면하려고 매일 떨면서도 수술실에 들어가. 당신은?”
문이 열렸다.
“당신은 아직도 네 실패를 향수병에 담아서 숨기고 있잖아.”
문이 닫혔다.
나는 식탁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목에 남은 그의 손자국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의 정액이 식으면서 허벅지 안쪽이 끈적거렸다. 내 몸 안에 그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떠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질 안에 남은 정액이 걸을 때마다 흘러내렸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지도 않고, 그냥 조향실로 걸어갔다.
조향실 책상 위엔 미완성 향이 놓여 있었다. 그를 위해 만들고 있던 향. 소독약과 라벤더, 그리고 그의 떨리는 손끝을 이미지화한 조합. 나는 그것을 들어 바닥에 던졌다. 향수병이 깨졌다.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강렬한 향이 조향실을 가득 채웠다. 소독약 냄새. 라벤더 냄새. 그리고 실패한 향기의 밑노트.
나는 모든 향료 샘플을 하나씩 집어 바닥에 던졌다. 베르가못. 네롤리. 앰버그리스. 패출리. 내가 수년간 모아온 원액들이 바닥에서 뒤섞이며 형언할 수 없는 향을 만들어냈다. 깨진 유리병 파편이 내 맨발을 스쳤다. 피가 조금 났다. 아프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깨진 향수병들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4년 전, 실패한 전시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바닥엔 깨진 유리와 흩뿌려진 향수뿐이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얼굴. 발진이 번져 올라온 목덜미와 진물 맺힌 팔뚝. 그들의 눈빛. 배신감과 고통이 뒤섞인 눈빛.
그때였다.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하얀색 명함 하나가 보였다. 분명 내가 던진 적 없는 명함이었다. 손을 뻗어 집었다. 백수진의 명함. 호텔 바 ‘노을’의 엠보싱 로고. 그리고 뒷면엔 손글씨로 적힌 문장.
“다음은 당신의 비밀을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내 손이 멈췄다. 명함을 쥔 손가락이 떨렸다. 정태준의 손처럼.
아니, 정태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제 떠는 건 나였다. 나는 관찰자였지만, 이제 관찰당하는 자가 되었다. 내가 그의 결함을 수집했듯, 누군가 내 결함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게 사랑인가, 집착인가. 관찰이란 결국 상대를 소유하려는 우아한 이름의 폭력일 뿐인데, 나는 그 폭력을 사랑이라 착각했고, 이제 똑같은 폭력이 나를 향해 렌즈를 돌리고 있었다.
명함 뒷면, 잉크가 마르면서 번진 글씨 아래로 작은 글씨가 하나 더 있었다. 돋보기로 봐야 보일 만큼 작은 글씨.
“세아 씨, 당신의 조향실에도 카메라가 있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조향실 구석. 환풍구 근처. 작은 붉은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