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밀번호는 그의 생년월일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병원 내부 시스템이 열렸다. 상단에 '정태준' 세 글자. 그 아래로 진료 기록, 수술 스케줄, 입원 환자 명단이 줄지어 떴다. 내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트랙패드를 스크롤하는 움직임이 오히려 평소보다 정확했다. 3년 전 11월. 흉부외과 응급수술. 환자명 이경호. 남성. 47세. 수술명: 긴급 관상동맥 우회술.

기록은 건조했다. 수술 시작 23분 후 심정지 발생. 심폐소생술 40분간 시행. 사망 선언 오전 3시 47분. 주치의 소견란에 짧은 문장: "봉합 부위 파열로 인한 대량 출혈. 수술실 내 대처 지연 없었으나 환자 상태 악화로 예후 불량." 그 밑에 수술 집도의 서명. 정태준. 글씨는 반듯했지만 '정' 자의 마지막 획이 미세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 비틀림에서 쇠비린내가 났다. 수술실 바닥에 고인 피비린내.

나는 노트북 화면을 천천히 스크롤하며 모든 기록을 읽었다. 간호사 경과 기록, 투약 이력, 사망 진단서 사본까지. 이경호의 아내가 병원 복도에서 오열했다는 사회복지사 상담 노트. 유족이 의료과실을 주장했으나 병원 측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법무팀 보고서. 첨부된 동영상 파일도 있었다. 수술실 CCTV. 나는 클릭하지 않았다. 필요 없었다. 이미 환영으로 봤으니까.

대신 나는 웃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웃음은 작고 짧았다. 정태준이 저지른 실수. 그가 3년 동안 품어온 죄책감의 실체. 이제 나는 그의 비밀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소독약 냄새도, 떨리는 손가락도, 오르가즘 직전에 흘리던 '망쳤어'라는 독백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뒷골을 찔렀다.

그 순간이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나는 신음하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가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환영이 겹쳐졌다. 병실 복도. 환자복을 입은 사내가 들것에 실려 지나간다. 그의 아내가 따라붙으며 울부짖는다.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 선생님!" 그녀의 손이 누군가의 가운을 붙잡는다. 수술복을 입은 정태준의 팔.

그런데 환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복도 저편, 형광등 아래 그림자처럼 서 있는 여자. 검은 슈트에 단발머리.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웃는다. 백수진. 호텔 바 '노을'의 오너. 그녀가 왜 여기에? 환영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통증이 가셨다. 나는 식은땀에 젖은 채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꺼지자 거실은 다시 어둠뿐이었다. 소파에 누운 정태준이 잠꼬대처럼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떨리지 않는 손으로 그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 남자는 내가 그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줄 모른다. 그 사실이 허벅지 안쪽을 간질였다.

다음 날 밤, 나는 호텔 바 '노을'에 앉아 있었다. 딱히 그녀를 만나러 온 건 아니었다. 그냥, 혼자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바텐더가 내 앞에 시그니처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잔을 입에 대기도 전에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세아 씨."

백수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칵테일 잔의 결로처럼 피부에 달라붙는 음색.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내 잔을 가리키며 바텐더에게 같은 걸 주문했다.

"요즘 재미있는 취미가 생기셨더군요."

"무슨 말인지."

"병원 전산 시스템은 생각보다 보안이 허술하죠."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특히 의사들이 생일로 비밀번호 설정해놓는 경우가 많아서."

내 손가락이 잔을 쥔 채 멈췄다. 백수진은 내 반응을 즐기듯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그녀의 향수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무향. 완벽한 무향. 나는 이 여자의 체취를 읽을 수 없었다. 골든핑거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당신의 작은 취미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나요?" 백수진이 속삭였다. "의료정보 무단 열람.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정태준 씨가 알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그가 속한 병원 법무팀이 알면?"

"협박인가요?"

"정보의 공유죠." 그녀가 명함을 바 카운터 위로 밀었다. 흰색 종이에 검은 글씨. '정보는 가장 완벽한 향기다'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세아 씨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어요. 밤 10시 이후, 상대의 체취에서 직업의 흔적을 읽는 거죠. 그리고 그 대가로 24시간 동안 자신의 트라우마가 노출되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능력, 대가의 법칙, 심지어 내 과거까지.

"정태준에 대한 더 깊은 정보를 드릴 수 있어요." 백수진이 말을 이었다. "그의 죄책감을 자극할 만한 것들. 그가 몰래 받고 있는 정신과 상담 기록이라든지, 유족과의 합의서 세부 내용이라든지."

"대가가 뭐죠?"

"아직은 없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나중에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때까지 이 대화는 우리만의 비밀로."

백수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를 떠났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도 향수 냄새는 없었다.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공허함이 오히려 코를 찔렀다.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명함을 집어 들었다. 종이의 질감이 뱀의 비늘처럼 미끄러웠다. 찢어버리려다가 클러치 안에 넣었다. 그녀가 건넨 USB 메모리도 함께.

정태준의 집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였다. 그가 문을 열자 소독약 냄새 대신 비누 향이 났다. 방금 샤워를 한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검은 티셔츠 위로 쇄골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백수진의 USB에 담긴 파일들이 떠올랐다. 그의 정신과 상담 기록. 항우울제 처방전. 유족에게 보낸 미발송 편지의 초안.

"오늘 늦었네." 정태준이 말했다.

"보고 싶어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했다. 입술을 비집고 혀가 들어가자 그가 살짝 움찔했다. 평소보다 내 움직임이 적극적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나는 그의 티셔츠 밑으로 손을 넣어 복근을 더듬었다. 배의 근육이 내 손길에 반응해 긴장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그가 내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세하게. 나는 그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검지와 중지에 굳은살. 메스를 쥐는 자리. 집도의의 손.

"이 손." 내가 속삭였다.

정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의 검지를 입안에 넣었다. 혀끝으로 굳은살을 핥자 짭짤한 땀 맛과 함께 미량의 라텍스 향이 스쳤다. 수술 장갑의 잔향.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면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실수하면 어떡하지?"

내 목소리는 내 것 같지 않게 낮고 음흉했다. 정태준의 몸이 굳었다. 떨림이 손가락에서 팔 전체로 번졌다. 나는 그 떨림을 입술로 느끼며 웃었다. 그가 나를 밀쳐낼 거라 생각했다. 화를 내거나 문을 박차고 나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침대 위로 밀어붙였다.

등이 매트리스에 닿자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정태준은 내 스커트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팬티의 가랑이를 옆으로 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음부에 닿았다. 애액이 이미 흘러나와 손가락을 적셨다. 그의 검지가 음핵을 스치듯 지나갔다. 떨리는 손끝이었다. 규칙적이어야 할 터치가 불규칙하게 끊겼다. 마치 망가진 심전도 그래프처럼. 그 부자연스러운 자극이 음핵을 타고 번져 내 허리가 들썩였다.

"넌 왜 나한테 이러는데." 그가 으르렁거렸다.

대답 대신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깨물었다. 쇄골 위에 이빨 자국을 남기자 그가 신음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내 질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두 마디, 세 마디. 손가락이 내벽을 쓸 때마다 떨림이 진동처럼 전해졌다. 일정한 리듬을 탈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자극. 내 안의 근육이 그의 손가락을 조였다. 따가우면서도 짜릿한 쾌감이 아랫배를 타고 올라왔다.

"네 손 떨리는 거." 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게 사람을 죽였잖아."

정태준의 손이 멈췄다. 그의 얼굴 위로 분노와 죄책감이 한꺼번에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넌 계속 수술을 해." 내가 속삭였다. "또 누굴 망칠지도 모르면서."

"닥쳐."

그가 내 질에서 손가락을 빼고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의 성기가 이미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귀두가 붉게 충혈되어 반들거렸다. 그는 콘돔도 끼지 않고 내 다리를 벌렸다. 나는 그의 성기를 잡아 내 질 입구에 갖다댔다. 뜨거웠다. 그의 성기에 손바닥이 닿자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망쳐봐." 내가 말했다. "나도 망쳐봐."

그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질 안이 꽉 찼다. 내 성기의 내벽이 그의 성기를 전부 감싸 쥐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통증과 쾌감이 척추를 타고 동시에 올라왔다. 정태준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빠르고 깊게. 그의 성기가 내 안에서 피스톤처럼 움직일 때마다 애액이 허벅지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그 축축한 흔적이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르며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체취를 공기 중에 풀었다. 발효된 꿀과 으깬 꽃잎 사이, 내 몸이 내뿜는 향.

"더." 내가 신음했다. "더 세게."

그가 내 허벅지를 잡아 더 높이 치켜들었다. 삽입 각도가 깊어지자 그의 성기가 자궁 입구에 닿았다. 그 감촉에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그의 등을 할퀴었다. 손톱 밑으로 그의 살갗이 밀려들어왔다. 정태준이 고통스러운 듯 숨을 들이키면서도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방 안에는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내 안에서 젖은 소리가 섞여 울렸다. 정태준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져 내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쳤다. 나는 그의 목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혀와 혀가 얽히는 사이 그의 신음이 내 입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널 망칠까 봐 무서워?" 그가 내 입술을 물며 물었다.

"해봐."

내 대답에 그가 나를 뒤집었다. 엎드린 자세에서 그가 뒤에서 삽입했다. 이 체위는 더 깊이 들어왔다. 나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의 성기가 내 질 후벽을 긁으며 드나들 때마다 음핵까지 자극이 전해졌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 그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내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다. "3년 전 11월. 이경호."

정태준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그의 성기가 내 안에 박힌 채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의 심장 소리가 내 등에 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뭘… 어떻게…"

"네가 망쳤잖아." 나는 계속했다. "봉합 과실. 대량 출혈. 사망 선언 오전 3시 47분."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나를 뒤집어 마주보게 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표정.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거칠게, 더 깊게. 마치 내 입을 막으려는 듯이.

"네가 병원 기록을 봤구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과거를. 내 실수를."

"네 모든 걸."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성기가 질 안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쾌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오르가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복부가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그걸 알고도 넌 나를 원해?" 정태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니까 더 원해."

내 대답에 그가 신음했다. 그의 성기가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도 한계에 가까웠다. 질 내벽이 그의 성기를 리듬에 맞춰 조였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증오와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내 눈에도 같은 것들이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함께 망하자." 내가 속삭였다.

그 순간, 골든핑거가 폭주했다. 오르가즘이 터지기 직전, 정태준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체취가 동시에 밀려들었다. 소독약, 라텍스, 땀, 정액, 그리고 죄책감——그의 죄책감에서는 쇠비린내가 났다. 수술실 바닥에 고인 피비린내. 동시에 환영이 겹쳐졌다. 내 안에서 움직이는 정태준의 얼굴 위로 이경호의 아내가 울부짖는 모습이 포개졌다. 수술실 모니터의 평평한 심전도선. 피 묻은 수술 장갑을 벗어 던지는 그의 떨리는 손. 그리고 그 모든 환영의 중심에서 백수진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내 쾌감의 정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질이 경련하며 그의 성기를 강하게 죄었다. 정태준도 동시에 사정했다. 정액이 내 안으로 뜨겁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 뜨거운 액체가 자궁 입구를 때릴 때마다 환영은 더 선명해졌다. 이경호의 열린 흉부, 범벅이 된 거즈, 정태준의 떨리는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메스——나는 그 모든 이미지 속에서 절정했다. 쾌감과 공포가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찔렀다. 나는 허리를 들어 그의 성기를 더 깊이 받아들였고, 동시에 그의 죄책감까지 삼켰다. 질의 경련이 잦아들 때까지 정태준은 내 안에 머물렀다.

그가 내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시트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정태준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나는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떨림이 멎어 있었다.

"당신은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그가 천장을 보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전부."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셔츠를 주워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클러치 안에서 백수진의 USB가 손에 잡혔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USB를 꽂자 파일 하나가 열렸다. 정태준의 정신과 상담 기록. 유족과의 합의서.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거기에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무기야.'

그 아래. 내 이름이 적힌 신문 기사 스크랩. 5년 전. 윤세아 조향사, '블랙 로즈' 전시회 전량 리콜. 원인 미상의 향 변질로 관객 12명 두통·구토 호소. 조향 업계 퇴출 위기.

그 순간, 화면 속 글자가 일그러지며 환영이 밀려왔다. 전시장의 새하얀 조명. 수백 개의 향초가 일제히 타오르던 그날. 관객들이 하나둘 코를 움켜쥐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구토를 쏟는 소리.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따지는 소리. "윤세아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조향실에 틀어박혀 모든 포뮬러를 다시 검토했다. 잘못된 건 없었다. 단 하나의 분자도. 그런데도 향은 변질되어 있었다. 내 손끝에서 탄생한 향기가 독이 되어 공기를 오염시켰다. 그날 밤, 나는 모든 향초를 폐기하며 내 손목에서 나는 향을 처음으로 의심했다. 내 몸 자체가 조향의 실패작인지도 모른다고.

내 과거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감추고 싶었던 실패의 기록. 백수진은 이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 등 뒤에서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노트북 화면의 빛이 어둠 속에서 내 얼굴과, 그리고 그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비추고 있었다. 정태준이 문간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화면 위의 '조향 업계 퇴출 위기'라는 문구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동공이 천천히 확장되었다. 턱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며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배신감과 충격이 그의 얼굴을 한 겹씩 벗겨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문틀을 짚은 채,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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