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뢰도의 추락
법정 안의 공기가 끊어졌다.
검사 김민석이 제출한 준비 의견서를 법관 이상훈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박지현은 그 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눈썹이 한 번 움직였다. 입꼬리가 굳어졌다. 법관의 손가락이 서류의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 부분입니다."
검사가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절차적이었다.
"피고인 측이 제출한 소위 '새로운 증거'는 법정 규칙 제4조의 '지연된 증거 제출'에 해당합니다. 13년이라는 시간 경과 속에서 왜 이제야 이 증거가 나타났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부재합니다. 더욱이 증거 수집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자료입니다. 법정에서 인정될 수 없습니다."
박지현이 일어섰다. 준비된 반박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그 순간 법관의 눈이 그를 향했다. 이상훈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봤을 뿐이다. 그 시선 속에는 이미 판단이 담겨 있었다.
"변론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판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박지현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그가 준비한 법적 논거들—증거 보관의 연속성, 법의학적 재검증의 필요성, 당시 기준과 현재 기준의 차이—이 모두 무의미해 보였다. 법정의 공기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법관의 눈빛 뒤에는 검사와의 무언의 합의가 있었고, 박지현은 그것을 읽었다.
"법정은 현재의 법적 기준을 따릅니다. 증거의 신뢰성 문제는 다음 기일에 보충 의견을 요청하겠습니다."
법관의 망치가 울렸다.
***
법원 복도는 차가웠다.
박지현이 동료 변호사 셋을 마주쳤다. 모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사무실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박지현이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하려는 순간, 셋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동시에. 마치 연습된 것처럼.
박지현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 침묵의 무게는 법정 안의 어떤 판결보다 무거웠다. 법정에서는 절차가 있었다.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등을 돌리는 행동뿐이었다.
서진우가 뒤에서 따라왔다. 그도 그 장면을 봤다.
"지현이형, 가시죠."
목소리가 작았다. 그리고 불안했다.
***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송 변호사였다. 박지현의 의뢰인 중 한 명이었다.
"변호사님, 죄송하지만... 저 다른 분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박지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준호 사건 때문에 제 건이 밀리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음성이 흐려졌다.
"법원에서 당신 평판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5분 뒤,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박 씨였다. 사기 혐의 사건을 맡겼던 사람이었다.
"변호사님, 정말 죄송하지만..."
박지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형, 이건..."
"알고 있어."
박지현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포기하는 음성이었다.
서진우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이 책상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형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박지현이 창밖을 봤다. 강남의 높은 건물들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누군가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법정에서는 패배했고, 법원 밖에서는 고립되고 있었다.
박지현이 천천히 말했다.
"절차와 현실은 다른 거야, 진우. 법정에서 이기는 것과 세상에서 이기는 것은 다르다는 걸... 이제 알겠어."
서진우의 입술이 떨렸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박지현을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명확했다. 신뢰도의 추락. 의뢰인들의 이탈. 법조계 내의 냉담한 시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
***
밤 10시 45분.
박지현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박지현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장 이상민이 서 있었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검사 김민석이 있었다.
"변호사님. 밤이 늦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박지현이 몸을 날렸다. 이상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법정에서의 변론, 잘 지켜봤습니다."
이상민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었다.
"당신의 증거 제출, 당신의 반박, 당신의 주장들. 모두 봤습니다."
박지현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현관 벽에 등이 닿았다. 이상민과 김민석은 천천히 박지현을 향해 다가왔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경찰청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13년 전 국가 수사 기관의 결정을 뒤집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밝히는 것이..."
"사실? 당신이 말하는 사실이 국가의 질서를 흔드는 사실입니까?"
이상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박지현은 벽에 등을 댄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민의 얼굴이 박지현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다음 법정에서 신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상민의 손이 박지현의 가슴팍에 닿았다. 가볍지만 명확한 압력이었다.
"당신의 신뢰도가 이미 추락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의뢰인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법조계가 당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상민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박지현의 가슴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이 계속 이 길을 간다면, 당신뿐 아니라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이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당신의 동료, 당신의 가족, 모두."
이상민의 손이 박지현의 옷깃을 집었다. 가볍지만 의도적인 움직임이었다.
"서진우 변호사. 알고 있죠? 그 친구도 당신 때문에 이미 법조계에서 낙인이 찍혔습니다. 계속하면 그 친구의 경력도 끝날 겁니다."
박지현의 숨이 멎었다. 이것은 더 이상 경고가 아니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상민이 손을 놨다. 김민석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표정은 이상민보다 더 냉정했다.
"내일 경찰청에 출석하십시오. 당신이 제출한 증거들의 출처에 대해 진술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적법한 절차입니다."
현관문이 닫혔다.
박지현은 그곳에 서 있었다. 벽에 등을 댄 채, 숨을 쉬지 않고.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법정에서의 패배는 견딜 만했다. 의뢰인들의 이탈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침묵, 이 위협, 이 현실은 달았다.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진우였다.
"형, 괜찮으세요? 뉴스 봤어요? 경찰청 대변인이 재심 사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냈대요."
"뭐라고?"
박지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 청의 수사 기록은 법적 기준을 충족했으며, 재심 청구는 근거 없는 모욕이다'라고요. 형, 이건 단순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조직적 대응입니다."
박지현은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경찰청 공식 보도자료가 떠 있었다. 그 아래 댓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변호사가 경찰을 폄하하네.'
'다 된 사건을 왜 다시 꺼내?'
'국가 신뢰도 떨어진다.'
박지현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법정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진실의 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절차의 장이었고, 절차는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법정 밖에서는 더 거대한 힘이 움직이고 있었다. 법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규칙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박지현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아침 6시 45분. 박지현의 눈이 떠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5초, 10초, 15초.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밤 이상민의 방문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폐쇄된 눈꺼풀 뒤에서 법정의 풍경이 반복되었다. 법관 이상훈의 흔들리는 표정. 검사 김민석의 냉소적인 미소. 그리고 복도의 동료 변호사들이 눈을 피하던 모습. 그리고 현관에서의 이상민의 손, 가슴팍을 집는 그 손의 감각.
박지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 섰다. 어제 자신과 오늘 자신이 달라 보였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얼굴에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깨진 것 같은 표정이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지난밤 받은 메시지들이 40개 이상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의뢰인들이었다.
'박 변호사님, 저희 사건은 다른 변호사님께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신뢰도 문제로 변경 신청하겠습니다.'
'이준호 사건 때문에 저희 사건까지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됩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법무법인 '정률'의 대표 박영환이었다.
'박지현 변호사, 이준호 재심 사건에서 손을 떼기를 권고합니다. 당신의 신뢰도가 회복되지 않으면 법조계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현명한 판단 바랍니다.'
박지현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통제할 수 없이 떨렸다.
***
7시 30분. 사무실 도착.
서진우는 이미 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신문 4개가 펼쳐져 있었다.
'경찰청 "재심 청구는 근거 없는 모욕"'
'박지현 변호사 신뢰도 추락... 법조계 "거리 두기" 움직임'
'이준호 재심 사건, 법적 절차상 결함 지적'
서진우가 박지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형, 검사 김민석이 인터뷰를 했어요."
서진우가 신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재심 청구에서 제출된 증거들은 13년 전 수사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법원의 판단은 당시의 법적 기준에 따라야 하는데, 현재의 기술과 기준을 소급 적용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반한다. 우리 검찰은 당시 법적 기준에 부합하는 기소를 했으며, 이를 폄하하려는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
박지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건... 아주 정교한 반박이야."
서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생각해봐요. 당신이 제출한 증거들은 '새로운 증거'잖아요. 법정에서 법관이 이 증거들을 어떻게 취급할지가 관건인데, 검사는 벌써 '당시 기준'이라는 논리를 제시했어요. 만약 법관이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재심 청구 자체가 무효가 된다."
박지현이 말을 끝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당시 기준으로는 증거 위조가 아니었다는 거죠. 당시에는 그게 정상적인 수사 절차였다는 논리로 모든 걸 정당화할 수 있어요."
박지현이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법관은 이 논리에 끌릴 거야. 왜냐하면..."
박지현이 눈을 들었다.
"법관도 법조인이니까. 법조계의 논리를 이해하니까. 경찰의 비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 법조계 전체의 신뢰도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진우가 박지현의 옆에 앉았다. 둘 다 침묵했다.
사무실 밖에서 서울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동차 경적음, 사람들의 발걸음음, 도시의 소음. 하지만 이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법원이었다. 법관 이상훈의 비서였다.
"박지현 변호사님, 판사님께서 오늘 오후 3시에 판사실에서 뵙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식 법정이 아닌 비공식 면담입니다."
박지현이 전화를 끊었다. 서진우를 바라봤다.
"판사가 부른다. 비공식 면담."
서진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비공식 면담은... 형, 그건 나쁜 신호예요. 공식 법정에서는 법관이 중립을 유지해야 하지만, 비공식 면담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지."
박지현이 말을 끝냈다.
***
정오. 박지현은 여전히 사무실에 있었다.
서진우가 밖으로 나갔다. 점심을 사오겠다고 했지만, 사실 박지현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박지현은 법정 기록을 다시 읽고 있었다. 1심 판결문. 항소심 판결문. 그리고 13년 전 경찰의 수사 기록.
현장 지문 채취 기록. 목격자 증언. 범행 도구 발견 경위.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당시 기준으로는' 진실이었다.
박지현이 이해했다. 이제 정말로 이해했다. 법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법은 절차를 따를 뿐이다. 그리고 절차는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13년 전 경찰은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절차 속에서 증거를 조작했다. 당시 검사는 '기소를 해야 한다'는 절차 속에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법관은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절차 속에서 무죄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13년 뒤 박지현은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는 절차 속에서 진실을 들고 법정에 섰다. 하지만 법정은 이미 13년 전에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지현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법정 기록을 덮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정오 햇빛이 건물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
***
오후 2시 45분. 박지현은 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승강장.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그를 보되 눈을 피했다.
법원 복도. 박지현이 판사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만나던 동료 변호사들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저쪽 끝에 두 명이 서 있었다.
박지현이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두 변호사는 고개를 돌렸다.
박지현의 손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혼자다.
법정에서 싸울 때는 이준호가 있었다. 아니, 이준호의 영혼이 있었다. 준호가 옥중에서 13년간 모은 증거들이 있었다. 서진우가 옆에 있었다. 법의학 전문가 정용재 교수가 증거를 입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복도에서 눈을 피하는 동료들 앞에서, 박지현은 정말로 혼자였다.
판사실 문이 열렸다. 법관 이상훈이 박지현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앉으세요, 변호사님."
박지현이 앉았다. 판사실의 책장에는 법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모든 법전도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변호사님의 열정은 존경합니다."
법관이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법정은 열정의 장소가 아닙니다. 법정은 절차의 장소입니다."
박지현이 입을 열려고 했다. 법관이 손을 들었다.
"들어보세요. 당신의 증거들은 확실히 당시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직적 위조'였는지는 법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박지현의 눈이 반짝였다. 이것이 반박할 기회였다.
"판사님, 그렇다면 법정에서 그것을 입증하게 해 주십시오."
박지현이 앞으로 몸을 숙였다.
"당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현재 기준이 무엇이 다른지, 법정에서 법적 논쟁을 통해 밝혀야 합니다. 비공식 면담이 아니라 법정에서요."
법관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당신은 당시 경찰의 비리를 주장하지만, 법정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은 '당시 기준에서 위법이었는가'입니다."
박지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기준에서도 증거 조작은 범죄입니다. 판사님, 당시에도 지문 채취 기록을 위조하는 것은 범죄였습니다. 거짓 목격자 증언을 유도하는 것도 범죄였습니다."
박지현이 책상에 손을 얹었다.
"법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은 법의 정의가 바뀌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범죄는 당시에도 범죄입니다."
법관이 깊은 숨을 쉬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지현의 말이 가슴에 닿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판사의 입장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그것을 증명하십시오, 변호사님."
법관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법정은 진실의 법정이 아니라 절차의 법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계속 고통받을 것입니다."
박지현이 일어섰다. 판사실을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
오후 4시 30분. 박지현의 사무실.
서진우가 박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으로 박지현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형, 판사님이 뭐라고..."
박지현이 손을 들었다.
"법정에서 싸워야 해, 진우. 비공식 면담에서 항복하면 안 돼."
서진우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
"형이 반박했어요?"
"당시 기준에서도 증거 조작은 범죄라고. 법의 정의는 바뀌지 않는다고."
박지현이 창밖을 바라봤다. 강남의 건물들이 저무는 햇빛에 물들고 있었다. 그 어딘가에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진우가 박지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지현을 향한 손이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손이었다.
"형, 우리 계속 해요."
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법정에서의 반박은 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막막했다. 경찰청의 협박. 의뢰인들의 이탈. 법조계의 외면. 그리고 내일 경찰청 출석.
***
오후 6시.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박 변호사님, 저 경찰청 공보담당관입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경찰청에서 진술을 받고 싶습니다."
박지현의 손가락이 떨렸다.
"무슨 혐의로?"
"이준호 사건 재심 청구 과정에서 경찰청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수사 중입니다. 자발적 출석을 권고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박지현은 서진우를 바라봤다. 서진우의 얼굴은 창백했다.
"형... 이건 협박이다."
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협박이다. 하지만 협박이 법적 절차가 되면? 협박이 합법이 된다.
***
밤 8시. 박지현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서진우는 나갔다. 박지현을 혼자 두라고 했다. 그 친구도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박지현은 이준호의 유품 상자를 다시 꺼냈다. 그 안에는 13년간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당시 신문 기사. 재판 기록. 그리고 이준호가 직접 손으로 쓴 메모들.
'박 변호사님, 저는 죽더라도 무죄를 증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박지현이 메모를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입술이 떨렸다.
법은 이준호를 죽였다. 아니, 법이 아니라 법 밖의 힘이 죽였다. 하지만 법은 그것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법은 박지현을 죽이려고 한다. 법적 절차라는 이름으로.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박 변호사님, 저 언론입니다. 경찰청에서 당신을 명예훼손으로 수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박지현은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박지현은 깨달았다.
법정에서 이기고 졌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법 밖에서의 힘이다. 그 힘 앞에서 법은 무력하다. 아니, 법은 그 힘을 보호해 준다. 법은 절차라는 이름으로 부당함을 정당화한다.
박지현은 책상 위에 놓인 법전들을 바라봤다. 그 모든 법전들도 이 상황을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법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지현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밤 9시 45분.
박지현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박지현이 현관문을 열었다.
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장 이상민. 그리고 그의 뒤에 검사 김민석.
"변호사님,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상민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방문과 달랐다. 더 차갑고 단호했다. 마치 최후 통첩을 하는 것처럼.
"당신이 한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증거 제출, 당신의 주장, 모두 법적 절차를 무시했습니다."
검사 김민석이 한 걸음 나섰다.
"당신은 내일 경찰청에 출석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이 사건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지현은 알았다.
법정이 아닌 곳에서 진정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박지현은 현관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포로 떨리지 않았다.
다른 감정이었다. 분노? 절망? 아니면 무언가 더 깊은 것?
박지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당신들은..."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박지현의 휴대폰이 울렸기 때문이다.
서진우였다.
"형! 형! 뉴스 봤어요? 대검찰청이 공식 성명을 냈어요!"
박지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 뭐라고?"
"이 사건의 증거 위조에 대해 특별 수사팀을 구성한다고요! 독립적인 특별 수사팀이 13년 전 수사 과정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박지현의 눈이 커졌다. 현관 앞의 이상민과 김민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형, 이건... 이건 대검찰청 차원의 결정이에요. 경찰청이나 지방검찰청이 아니라!"
서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대검이 경찰청과 지방검에 대항해서 수사를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건 조직 내 분열이고, 당신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라는 뜻이에요!"
박지현은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 문 너머에서 이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변호사님!"
하지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박지현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서진우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죠? 이건..."
박지현이 천천히 말했다.
"진우, 이건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야."
박지현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법정 안에서 법정 밖의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박지현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박지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박지현의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무언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불빛.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박지현은 그것을 느꼈다.
"형, 우리 이겨요."
서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포의 떨림이 아니었다.
박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의 밤.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법 안에서, 법 밖에서, 모든 곳에서.
그리고 박지현은 알았다. 이제 정말로 알았다.
법은 절차일 뿐이다. 하지만 절차 뒤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움직이면, 절차도 움직인다.
박지현의 눈이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증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 경찰청 출석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다음 법정을 위한 준비였다.
이상민과 김민석의 방문 기록. 협박의 구체적 내용. 그리고 대검찰청의 특별 수사팀 구성 소식. 모든 것이 법정에서 증거가 될 것이었다.
박지현은 서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우, 내일 경찰청에 가면서 모든 과정을 기록해. 동영상, 음성, 모든 것을. 그리고 정용재 교수에게 연락해. 다음 법정을 위한 추가 증거가 필요해."
"형, 이건..."
"법정에서 싸워야 해, 진우. 그들이 법 밖에서 압박하면, 우리는 법 안에서 반격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박지현은 법전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그 글자들이 다르게 보였다. 죽은 규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구로. 절차가 아니라 정의를 향한 길로.
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박지현의 눈빛은 밝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