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증거의 모순

박지현의 손가락이 떨렸다. 준호의 유품 상자 뚜껑을 여는 순간, 13년의 침묵이 깨졌다. 죽음 이후 남겨진 것들—낡은 서류, 손글씨 메모, 사진들. 그 안에 준호가 옥중에서 모아온 기록들이 있었다. 법정에 설 날을 기다리며 한 장 한 장 모아온 증거들.

박지현은 서류들을 들고 정용재 교수의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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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전문가 정용재 교수는 박지현의 책상 위에 놓인 지문 채취 기록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었다. 입술이 일직선으로 굳어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정 교수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박지현은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20년을 함께 법정에 선 동료의 얼굴에서 확신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 아니라 분노였다.

"이 지문이 채취된 날짜가 뭐라고 되어 있어?"

"8월 14일. 사건 발생 3일 후다."

"그리고 공식 수사 기록에는?"

박지현이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13년 전 경찰청 수사 결과 보고서였다. 종이가 스르르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8월 12일이다. 사건 당일 밤."

정 교수가 안경을 다시 썼다. 그 안경 너머의 눈빛이 예리했다.

"현장 지문은 사건 당일에 채취하는 게 정칙이지. 3일 후에 채취한 걸 당일이라고? 그건 조작이다."

정 교수가 책상에 몸을 굽혔다. 준호의 메모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문 채취 방식도 이상하다. 여기 기록을 보면 '접착 테이프 방식'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경찰청 표준 절차는 분말 채취법이었어. 접착 테이프는 2010년 이후에나 도입된 기법이야."

박지현이 책상 위에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한쪽은 준호의 손글씨, 다른 한쪽은 경찰청 공식 기록. 날짜가 3일 차이 났다. 채취 방식도 달랐다.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이런 모순을 적발할 수 없었다는 뜻이야. 그래서 13년을 버틴 거지. 그 사이에 기술이 발전하고, 법원도 증거 검증 기준을 높였고, 당신이 이걸 발견했다."

정 교수가 박지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증거를 위조했다. 이건 단순 실수가 아니야. 이 정도 모순을 만들려면, 당시 수사팀이 지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다른 지문을 조작한 거야."

"그렇다면?"

"그렇다면 진범은 현장에 없었거나, 아니면 현장에 있었지만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준호의 지문이 있다고 기록했어. 왜?"

박지현이 대답할 수 없었다. 정용재 교수가 박지현의 침묵을 읽었다.

"누가 수사를 주도했어?"

"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장 이상민과 검사 김민석이다."

정 교수의 입이 굳어졌다.

"그럼 조직적이었다는 뜻이야. 한 명의 경찰관이 증거를 위조하는 건 실수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경찰청 대장과 검사가 함께라면? 그건 조직의 결정이야."

박지현이 일어섰다. 창밖으로 서울의 도시 풍경이 보였다. 정용재 교수도 일어났다.

"이게 법정에 가면?"

"파장이 클 거야. 경찰청 전체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거고, 검사도 당시 기소 결정을 다시 검토해야 할 거야."

정 교수가 박지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이런 증거를 법정에 제출하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확실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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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박지현의 법률사무실. 후배 변호사 서진우가 책상에 펼쳐진 서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건... 정말?"

"정말이다. 이준호가 남긴 증거들이다. 13년 동안 모아온 것들이다."

박지현이 앞의 의자에 앉았다. 서진우가 현장 지문 기록을 들었다. 종이가 손에서 떨렸다.

"날짜가..."

"다르다. 3일이 차이난다."

"그리고 채취 방식도..."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방식이다."

서진우가 박지현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공포가 있었다.

"선배님, 이건 위조다. 명백한 위조다."

박지현이 서진우의 손에서 기록을 빼앗았다. 종이를 다시 펼쳤다.

"당시 경찰청 표준 절차를 보면, 지문 채취는 사건 당일에 분말 채취법으로 진행되어야 했어. 그런데 여기 기록에는 3일 후에 접착 테이프 방식으로 채취했다고 되어 있다."

박지현이 다른 서류를 가리켰다.

"접착 테이프는 2010년 이후에나 도입된 기법이야. 2008년 사건에서 이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건 말이 안 돼. 누군가가 현재의 기술을 과거로 소급적용한 거야."

서진우가 박지현을 바라봤다.

"그럼 이건..."

"조작이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게 왜 13년을 버텼는가 하는 거야. 당시에는 이런 모순을 적발할 기술이 없었거든. 지금도 법원이 이를 인정할지는 불명확해."

박지현이 창가로 걸어갔다. 밤의 서울이 보였다. 불빛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상민 국장과 김민석 검사. 둘 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어. 한 명의 실수라면 모를까, 둘이 함께라면?"

박지현이 돌아섰다. 서진우를 마주했다.

"조직적 위조야. 경찰청 전체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아니면 최소한 상층부는."

서진우가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배님, 이 사건을 법정에 가져가면, 경찰청 전체가 박지현을 적으로 돌릴 거예요."

박지현이 서진우의 말을 듣고 있었다. 후배의 우려는 타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국장이 진급이 확정됐다고 했잖아요. 경찰청 내에서 그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지 아시죠?"

박지현이 침묵했다. 알고 있었다. 이상민은 단순한 경찰관이 아니었다. 경찰청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상대로 법정에 서는 것은, 개인이 조직 전체와 맞서는 것과 같았다. 사무실 폐쇄 위협, 의뢰인 이탈, 법조인으로서의 신뢰도 추락. 그 모든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

"알아."

박지현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의 동요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준호는 죽었다. 재심을 기다리던 그 사람이 심장마비로 옥중에서 죽었어. 그리고 그가 남긴 증거들이 조작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걸 법정에 들고 가지 않으면, 누가 할 거야?"

서진우가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이 준호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예요?"

"의뢰인이 옥중에서 13년 동안 쓴 기록이다."

서진우가 페이지를 넘겼다. 손글씨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작아지고, 흔들리고, 다시 정돈되는 과정이 보였다.

"2008년 8월 12일... 지문이 채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서진우가 다른 기록을 가리켰다.

"2008년 8월 14일... 여기서는 '실제 지문 채취'라고 명시되어 있어요. 그리고 담당자 이름까지 적혀 있네요."

박지현이 옆으로 앉았다.

"이준호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문이 조작되었다는 걸. 그래서 기록했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조작했는지."

"그럼 이건 재심의 핵심 증거네요."

"그렇다."

박지현이 서진우를 바라봤다. 후배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진우, 나한테 물어봐야 할 게 있을 거야."

서진우가 입을 열었다.

"이 사건 하시면, 선배님이 경찰청의 타겟이 돼요. 이상민은 그럴 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검사도 자신의 기소 결정이 뒤집힐까봐 두려워할 거예요. 둘 다 선배님을 압박할 거고..."

"알아."

"그래도 하실 거예요?"

박지현이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는 13년의 무게가 있었다. 옥중에서 죽은 의뢰인의 무게가 있었다.

"내가 이준호를 약속했어.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그가 죽기 전에."

박지현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 증거들이 여기 있다. 그가 남긴 증거들이. 이걸 무시하고 법정을 가지 않으면, 나는 변호사가 아니야."

서진우가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넌 그럴 필요 없어. 이건 내 사건이야."

"선배님, 이 사건은 법정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게 목표인 거잖아요. 그렇다면 우린 팀이 되어야 합니다."

박지현이 서진우를 바라봤다. 그 젊은 얼굴에 결연함이 보였다.

"고마워."

"재심 청구서를 언제 제출할 거예요?"

"내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박지현이 일어나 책상에서 서류를 모으기 시작했다. 재심 청구서를 작성해야 했다. 증거들을 정리해야 했다. 법정에 제출할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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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박지현의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서 박지현과 서진우는 재심 청구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박지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13년 전 이준호 사건의 증거 재검증을 통해, 당시 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가 제출한 현장 지문이 조작되었음을 명백히 할 수 있습니다. 지문 채취 날짜의 불일치, 채취 방식의 기술적 모순, 그리고 의뢰인이 남긴 기록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박지현이 문장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봤다. 이 문장들이 법정에 제출되는 순간, 모든 게 시작될 것이었다. 경찰청의 방해, 검사의 저항, 그리고 법정의 불확실성.

서진우가 다른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선배님, 증거 목록 확인하셨어요? 현장 지문 기록, 지문 채취 사진, 당시 사건 현장 사진, 의뢰인의 일기장, 정용재 교수의 감정서..."

"다 있어?"

"네, 다 있습니다."

박지현이 다시 키보드로 돌아갔다. 마지막 문장을 쳤다.

'법정에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여, 이준호의 억울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청구합니다.'

Enter 키를 눌렀다. 문서가 완성되었다.

밤 11시 45분. 박지현이 프린터에서 재심 청구서를 꺼냈다. 손에 들린 종이가 무거웠다. 이 종이가 법정으로 가는 순간, 박지현의 인생도 바뀔 것이었다.

서진우가 옆에 섰다.

"내일 아침에 제출하시는 거죠?"

"그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직접 가서."

박지현이 재심 청구서를 서류 봉투에 넣었다.

밤 11시 50분. 박지현이 책상에 앉아 재심 청구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었다. 모든 증거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모든 논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훑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청구서를 제출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이상민'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박지현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낮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박 변호사, 재심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준호 사건은 이미 13년 전에 정리된 사건입니다. 당시 수사는 법적 기준에 부합했고, 법원도 인정했습니다. 지금 이를 뒤집으려는 시도는..."

이상민이 말을 멈췄다. 침묵의 무게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들었다.

"국가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박지현이 대답했다.

"신뢰도요?"

"네. 경찰청의 신뢰도 말입니다."

"의뢰인이 남긴 증거들이 조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들을 법정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박지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박 변호사께서 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민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예를 들어, 변호사 협회의 징계, 의뢰인 회수, 사무실 운영의 어려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재심 청구를 재고해주실 건 아닐까요?"

박지현의 손이 책상을 짚었다. 이상민의 협박은 구체적이었다. 개인 변호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조직적 압박이었다.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상민이 다시 말했다.

"박 변호사도 법조인이시니, 2015년 강남역 사건의 변호사분을 기억하실 거예요. 경찰청의 수사 방향을 공개 비판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그분도 법적 절차를 따랐지만, 결과는..."

이상민이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박지현은 알고 있었다. 그 변호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협회 징계, 의뢰인 이탈, 결국 사무실 폐쇄.

"진실과 법적 절차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박 변호사의 미래를 생각하신다면 말입니다."

박지현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화면에 이상민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협박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사례, 현실적인 대가.

"알겠습니다."

박지현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박지현이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검은색이 되었다. 그 검은색 속에 박지현의 얼굴이 비쳤다.

서진우가 박지현을 바라봤다.

"이상민이었어요?"

"응."

"뭐라고 했어요?"

"재심을 하지 말라고. 협회 징계, 의뢰인 회수, 사무실 폐쇄 같은 구체적인 대가를 언급하면서."

서진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협박이네요."

"그래. 협박이야."

박지현이 재심 청구서를 들었다. 종이가 손에서 반짝였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어."

박지현이 책상을 떠났다. 서진우도 따라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갔다. 밤의 거리를 내려다봤다.

사무실 건물 아래, 가로등 불빛 아래에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박지현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박지현의 눈이 그들을 추적했다. 한 명은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검사복이 아니었지만, 그 실루엣은 낯익었다. 경찰청 내부 감시반. 이상민의 사람들.

박지현의 손가락이 떨렸다. 창문 유리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찬 유리면에 닿으면서 현실이 확실해졌다.

서진우가 박지현의 옆에 섰다.

"선배님..."

"이미 시작됐어.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박지현이 재심 청구서를 다시 들었다. 손에 쥔 종이가 무거웠다. 아래 거리에 서 있는 남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박지현의 입이 움직였다.

"내일 아침, 법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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