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대의 서막
종로의 뒷골목은 포성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손가락 끝이 투명했다. 손목도. 팔뚝까지 반쯤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남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신비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기 속에서, 어디서도 들리지 않으면서 어디서나 들리는 그 목소리.
"한 번의 개입 기회는 끝났습니다. 설계도를 태웠고, 조선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놨습니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첫째, 이곳에 남는 것입니다. 당신의 미래 지식은 사라졌지만, 당신의 경험과 눈은 남습니다. 조선의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자가 아닌,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바깥에서 총성이 울렸다. 더 가까워졌다.
"둘째, 2024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 기록이 당신의 시대에서 무엇을 의미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둘 다 불가능해 보였다.
조선에 남는다? 아내도, 직업도, 2024년의 모든 삶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투명해진 팔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미 그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의 균열에서 빨려나온 순간부터, 그는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2024년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이 1894년의 모든 기억은 무엇이 될 것인가. 박영효의 눈물은? 한강 나루터의 300명의 죽음은? 김옥균의 마지막 인사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기억 속에만 남아 고독하게 타올라 계속될 것인가.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준호가 물었다.
"당신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질 때까지. 대략 한 시간입니다."
한 시간. 1894년 조선과 2024년 서울을 가르는 경계에서 단 한 시간.
이준호는 일어섰다. 투명해진 팔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뒷골목을 빠져나가 종로로 나섰을 때, 그는 이 도시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로 결심했다.
종로는 혼란 속에 있었다. 개혁파의 신식 포병대가 한강 쪽에서 물러나고 있었고, 보수 세력의 근위대가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상인들은 가판을 재빨리 걷어 올렸고, 노인과 아이들은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전에는 없던 것이 보였다.
서양식 인쇄기를 끌어내는 젊은 기술자들의 무리. 그들은 경복궁 근처 인쇄소에서 급히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준호는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기억했다. 박영효가 데려온 목수였다. 그 목수는 설계도 없이도 톱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리듬이 달랐다. 이제 그는 원리를 알았다.
거리의 다른 쪽에서는 서광범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신식 포는 물러났지만,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포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알았다. 이제 그것을 개선하려 했다. 이준호는 깨달았다. 박영효의 말이 맞았다. 설계도 없이도 그들은 계속될 것이었다.
미나리고개 방향에서 목재를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망치질하는 소리. 사람들이 무언가를 설명하는 목소리. 건설의 소리였다.
"이준호."
박영효가 나타났다.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맑았다. 그는 이준호를 보는 순간 투명해진 팔을 봤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이준호가 멈췄다.
"결정했습니까? 남을 것입니까, 돌아갈 것입니까?"
박영효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신비한 목소리가 그에게 전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박영효가 손을 뻗었다. 이준호의 투명한 팔을 잡으려고. 손이 팔을 통과했지만, 그 접촉의 의도는 명확했다. 박영효의 눈빛이 변했다. 눈물이 맺혔다. 손의 온기가 사라졌지만, 옷감을 스치는 감촉은 남아 있었다. 투명함 속에서도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내가 남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이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박영효가 입을 열었다. 한 번, 두 번 닫혔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박영효의 손이 공중에서 헤맸다. 투명해진 이준호를 붙잡을 수 없었지만, 그는 계속 손을 뻗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준 것은 기술이 아니라, 가능성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쓸지는 우리가 결정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조선에 남는다면, 당신은 우리의 동반자가 되십시오. 구원자가 아닌. 우리와 함께 실패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으로.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일입니다."
박영효의 눈이 이준호를 직접 봤다. 거기에는 감사가 있었지만 동시에 단호한 거절도 있었다. 너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너는 우리의 조언자도 아니다. 너는 그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박영효가 계속했다.
"당신이 돌아간다면, 우리가 당신을 잊을 리 없습니다. 당신의 이름도, 당신의 얼굴도. 언젠가 당신이 경험한 것들이 기록되고, 그 기록이 당신의 시대에 남겨질 것입니다. 그것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준호의 목이 메었다.
"당신은 이미 선택했습니다. 설계도를 태울 때부터."
박영효가 말했다.
"그때 당신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놨습니다.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결정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더 가까워졌다. 박영효는 떠났다. 거리의 혼란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부대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호는 혼자 남았다. 투명해진 팔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걸었다. 목표 없이.
경복궁 쪽으로 향했다. 근위대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지만, 투명해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궁의 담장을 넘고, 뜰을 지나 어전 근처에 도달했다.
명성황후가 있었다.
황후는 방 안에서 타버린 설계도의 조각들을 들고 있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보는 순간 알았다. 황후가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당신이 태운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명성황후가 말했다. 그녀는 이준호를 보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기술의 원리는 한 번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설계도는 사라졌지만, 당신이 보여준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황후는 타버린 종이 조각을 놨다.
"나는 이제 이해합니다. 당신이 왜 설계도를 태웠는지. 그것은 당신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승리였습니다."
이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미래는 한 사람의 기술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선택으로 만들어집니다. 당신은 그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설계도를 태웠습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명성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직접 봤다. 투명해진 그를.
"당신은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남아야 할까요, 돌아가야 할까요?"
명성황후가 미소 지었다.
"그것은 당신이 결정할 일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조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황후가 잠시 멈췄다.
"당신이 어디를 선택하든, 조선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남는다면, 우리는 더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준호는 궁을 나왔다. 종로로 돌아왔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황혼이 한양을 물들였다.
한강 방향에서 포성음은 들리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거나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목재를 자르는 소리. 망치질하는 소리.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무언가를 설명하는 음성. 건설의 소리였다.
이준호는 서촌으로 향했다. 김옥균의 거처로.
김옥균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오른팔이 붕대로 감겨 있었고, 얼굴은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이준호."
김옥균이 일어나려 했지만 이준호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투명한 손이었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
"앉아 있으세요."
"당신은..."
김옥균이 투명해진 팔을 봤다.
"당신은 떠나시는 것인가?"
이준호가 창문으로 나가는 길을 바라봤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뜻인가?"
김옥균이 다시 앉았다.
"나는 당신을 저주했습니다. 당신의 기술이 우리를 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설계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옥균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박영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다고. 당신의 기술이 아니라, 당신이 보여준 가능성을 배웠다고. 그 가능성을 우리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그것이 맞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쓸지는 당신들의 결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남는다면?"
"나는 함께할 것입니다. 구원자가 아닌, 함께 실패하고 배우는 사람으로서."
김옥균의 눈에 뭔가가 맺혔다.
"당신이 돌아간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한 선택을 기록하고, 당신들이 만든 변화를 기록할 것입니다. 그것도 역사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김옥균이 오른팔을 움직였다. 통증이 얼굴을 스쳤지만 그는 이준호의 투명한 손을 잡으려 했다. 손이 통과했지만, 그 손가락 끝에서 흐르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옷감을 스치는 감촉도. 눈물의 온도도. 투명함 속에서도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어디를 선택하든, 우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김옥균이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준호는 김옥균의 거처를 나왔다. 밤이 완전히 내렸다.
거리는 조용했다. 전투는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이준호는 느꼈다. 조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서촌에서는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기계음이 밤하늘을 울렸다. 미나리고개에서는 기술자들이 모여 설계도 없이 스스로 뭔가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으로 나무를 깎고, 철을 두드렸다. 시행착오였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한강 나루터에서는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피해 복구에 나서고 있었다. 불탄 나루를 다시 짓고, 떨어진 짐을 줍고 있었다.
조선이 배웠다. 이준호의 기술 없이도, 이준호의 설계도 없이도, 그들은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준호는 종로의 한 다방에 들어갔다. 밤 늦게 문을 연 작은 가게였다. 주인은 투명해진 이준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신비한 목소리가 이미 그에게 전했을 것이다.
"종이와 먹을 주시겠어요?"
주인이 준비했다.
이준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94년 10월 한양에서.
역사학자 이준호가 본 것들을 기록했다. 김옥균의 야심과 그의 회의. 박영효의 온건함과 그의 단호함. 서광범의 열정과 그의 성급함. 명성황후의 이중적 욕망과 그녀의 진정한 고민. 개혁파의 꿈과 보수 세력의 저항. 그리고 자신의 개입이 낳은 300명의 죽음.
글을 쓰면서 이준호는 깨달았다.
조선의 미래는 이미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만들어갈 것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용기로, 자신의 책임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이준호의 몸은 투명해졌다. 팔이 먼저 사라졌고, 다리가 뒤따랐다. 이제 몸통만 남아 있었다. 눈앞의 종이에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글씨는 계속 나타났다. 펜이 종이를 긋는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증거였다.
마지막 문장을 썼다.
"조선의 미래는 조선의 사람들이 만든다."
신비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시간입니다. 최종 선택을 하십시오."
이준호는 펜을 놨다. 완전히 투명해진 손을 들어다봤다. 손가락도 보이지 않았다. 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리고 결정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다.
2024년으로 돌아간다면? 아내 지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준호, 늦게 들어오지 마"라는 마지막 통화. 서재에 놓인 그들의 사진—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은이 웃고 있는 사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미 낯설었다. 직업도, 아파트도, 월급도—모두 먼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가면 무엇이 남을까. 이 1894년의 기억들이 남겠지. 하지만 그것들은 점점 흐릿해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박영효의 얼굴도, 명성황후의 목소리도, 김옥균의 눈빛도. 결국 그는 혼자 남겨질 것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경험을 안고, 영원히 고독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남는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2024년의 모든 것이 끊어질 것이다. 지은과의 통화도, 직업도, 그 시대의 모든 연결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투명한 손을 들었다. 이제 손목까지 사라져 있었다. 팔뚝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다방의 불이 흔들렸다. 시간의 균열이 닫혀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다른 세계가 보였다. 2024년의 도서관이. 책장. 형광등. 현대의 소음. 그것이 자신의 세상이었다. 한 시간 전까지는.
하지만 이준호는 그 방향을 보지 않았다.
종로의 거리를 봤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 그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이 아니라 기대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이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가는 것과 남는 것은 사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아가도 그는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고, 남아도 그는 저기에 기록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정했다.
조선에 남기로.
구원자가 아닌,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그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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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도서관에서 책이 떨어졌다. 오래된 필사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도서관 사서는 그것을 주워 펼쳤다. 손이 떨렸다.
그 안에는 새로운 글씨가 있었다.
"1894년 10월 한양에서. 역사학자 이준호가 본 것들."
필사본의 글씨는 낡은 먹으로 쓰인 한문과 현대 한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 필사본은 1894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현대 한글은 있을 수 없었다.
사서는 페이지를 넘겼다. 뒷장에는 현대 한글로 쓰인 일기가 있었다. 펜으로 쓰인 글씨였다. 1894년에는 존재하지 않던 필기구로.
"나는 조선에 남기로 결심했다. 구원자가 아닌,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일이다. 조선의 미래는 조선의 사람들이 만든다. 그리고 그 미래는 내 시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사서는 그 문장을 읽고 멈췄다. 손에서 필사본이 흔들렸다. 공포와 경이가 섞인 표정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글씨가 변했다. 새로운 글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다면, 나는 조선에서 살고 있다.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것들은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증명이다."
사서는 놀라 필사본을 내려놨다. 하지만 글씨는 멈추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필사본에, 보이지 않는 손이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사서는 그 광경에 말을 잃었다. 불가능한 것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박영효는 온건 개혁의 길을 걸을 것이다. 김옥균은 급진적 변화를 꿈꿀 것이다. 그들은 싸울 것이고, 실패할 것이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조선의 미래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서는 손을 뻗었다. 필사본을 만져보려고. 하지만 손가락이 통과했다. 그 안에는 투명한 무언가가 있었다. 사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가해한 것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감탄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여기 있다. 보이지 않지만, 여기 있다. 그리고 당신의 시대에서, 나는 역사가 된다. 두 시대를 잇는 기록으로."
글씨가 멈췄다.
필사본은 사서의 손에 떨어졌다. 무게가 있었다. 1894년의 무게를. 그리고 동시에 2024년의 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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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한양에서.
박영효는 이준호의 투명한 형상이 사라지는 것을 봤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공기 속에, 거리 속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그가 남았습니까?"
김옥균이 물었다.
"네."
박영효가 대답했다.
"그는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볼 수 있을까요?"
박영효는 한 순간 침묵했다. 그리고 거리를 바라봤다. 인쇄기가 돌아가는 서촌. 기술자들이 움직이는 미나리고개. 상인들이 일어서는 한강 나루터. 그곳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증거였다.
박영효는 종로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그 거리는 이제 다르게 보였다. 이준호가 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박영효가 거리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인쇄기의 음성 속에서. 망치질의 리듬 속에서. 우리의 선택 속에서."
서광범이 나타났다.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
"우리의 방식으로 계속합니다."
박영효가 말했다.
"우리가 배운 것들을 우리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우리의 책임 속에서 실행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한강 나루터에서 새로운 불이 켜졌다. 인쇄소의 불이었다. 밤새 돌아갈 인쇄기의 불.
박영효는 거리를 걸으며 바람을 느꼈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손길 같은 것.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변 사람들도 그것을 느꼈다. 인쇄소의 기술자들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미나리고개의 목수들이 망치질을 멈추고 무언가를 감지했다. 한강 나루터의 상인들이 일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느꼈다.
조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준호 없이, 이준호와 함께.
그 둘은 구별할 수 없었다.
거리의 모든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인쇄기의 음성. 망치질의 리듬. 사람들의 발걸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함께 만드는 미래.
박영효는 멈춰 서서 종로 전체를 바라봤다. 혼란과 건설이 뒤섞인 그 거리에서, 그는 누군가를 붙잡으려 했다. 투명한 손을. 보이지 않는 어깨를. 하지만 손가락은 공기를 헤쳤다. 그럼에도 박영효는 계속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선택과 행동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이제 그 모든 것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박영효의 손이 내려갔다. 공기 속에 남겨진 온기가 있었다. 그것이 증거였다.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의.
거리에서 새로운 목재를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망치질의 리듬이 울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조선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