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의 열람실은 오후 다섯 시쯤 가장 조용했다.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1894년 갑오개혁 관련 고문헌들의 등재 목록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신문 기사, 일기, 편지, 관찬 기록. 한 가지 의문은 풀릴수록 세 가지의 새로운 의문을 낳았다. 왜 같은 시기 서로 다른 기록들이 사건의 순서를 다르게 기술했을까. 왜 특정 인물들의 행동이 기록마다 모순되었을까.
그는 특수 열람실로 들어갔다. 습도 조절된 공기, 책의 곰팡이 냄새, 시간이 정체된 듯한 침묵. 책장을 따라 손을 움직이다가 한 권의 낡은 필사본을 발견했다. 표지가 벗겨져 제목을 알 수 없었지만, 종이의 질감과 필체로 보아 조선 후기의 것이 분명했다.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 몇 장은 읽을 수 없었다. 옛 한글과 한문이 뒤섞여 있었고, 손글씨는 흐릿했다. 하지만 날짜가 명확했다. '갑오년 십월 십칠일(甲午年 十月 十七日)'. 그날이었다. 그 쿠데타의 날. 이준호는 숨을 고르고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책장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책장 뒤쪽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빈 게 아니라 공기가 이상했다. 손가락을 집어넣으니 공기가 차갑고, 깊이 있었다. 마치 책장 뒤가 실제 공간이 아닌 것처럼.
그 순간 필사본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추락했다. 책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력이 역전되었다기보다는 방향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다. 위도 아래도 없는 회전 속에서 이준호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죽는 건가? 이대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건가? 정체성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멈췄다.
눈을 뜬 것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준호는 흙 위에 누워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흙. 손가락을 움직였다. 살아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밤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밤이 아니었다. 하늘에 별이 너무 많았다. 수천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이 주변 풍경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돌담, 목재로 만든 건물들, 횃불의 불빛. 그리고 냄새. 마분, 목탄, 인간의 땀과 혈.
이준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경복궁의 외곽이었다. 돌담장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숨을 고르려 했지만 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냐?'
중얼거린 자신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2024년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손을 떨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려는 본능적 행동을 했지만,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이준호.'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 목소리는 바람에서 나왔고,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았다. 중성적이고, 나이를 알 수 없는 음성.
'누구냐?'
이준호가 외쳤다.
'시간의 의지다. 또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말이 끝나자 그의 손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종이. 한 장의 종이였다. 아니, 설계도였다. 손으로 그린 도면이 아니라 프린트된 도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1894년에 프린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종이는 그의 손 위에 있었고, 현실이었다.
설계도 위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증기 기관의 원리. 그것을 단순화한 도면.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설계도가 있었다. 전신 시스템. 거리를 건너뛰고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이것이 무엇인가?'
'너의 지식이 응축된 형태다. 미래에서 가져온 기술의 원리들이다.'
'왜 나에게?'
'너는 이 시대를 알고 있다. 1894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설계도 위의 글씨들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마치 시간 자체가 깜빡이는 것처럼.
'한 번만이다. 기억해라. 너는 한 번만 개입할 수 있다. 두 번 이상 개입한다면, 시간 자체가 너를 거부할 것이다.'
'한 번만? 무슨 말이야?'
'이 설계도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너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 이후로는 너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다. 역사는 그 선택으로부터 움직일 것이고, 그 결과는 너의 책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역사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매 순간, 시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너는 이곳으로부터 원래의 시간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너의 개입이 역사를 크게 바꾼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준호는 설계도를 들었다. 종이는 따뜻했다.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온기를 품고 있었다. 증기 기관의 도면을 보며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 기술이 1894년 조선에 전해진다면? 개혁파가 이를 손에 쥔다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까? 조선이 근대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이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초월적 음성이 다시 물었다.
'모르겠다.'
이준호의 대답은 솔직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초월적 음성의 경고는 멀어졌다. 대신 다른 것이 그를 밀어붙였다. 욕망. 또는 사명감. 둘의 차이를 구분할 여유는 없었다. 설계도를 가슴에 안으며 그는 일어섰다.
'기억해라. 너는 구원자가 아니다. 단지 지식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 지식을 어떻게 쓸지는 그들의 몫이다.'
'알겠다.'
거짓말이었다.
경복궁의 담장 너머에서 말 타는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규칙적인 박자. 여러 명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횃불의 불빛이 어두운 길을 비추었다. 군인들이었다. 개혁파 군인들이었다. 하얀 옷 위에 새로운 군복을 입은 자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이준호를 발견했다.
'누구냐! 거기 있는 자!'
그 목소리는 강했다. 의문 문장이지만 명령에 가까웠다. 말에서 내린 사람은 키가 크고 눈빛이 예리했다. 검은 군복을 입었고, 허리에는 신식 권총을 찼다.
이준호는 그 사람을 알았다. 역사책에서 본 초상화, 무수한 문헌에서 읽은 이름.
김옥균이었다.
'낯선 자가 누구냐? 이 시간에 경복궁 근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옥균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의 수행원들도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이준호의 손은 여전히 설계도를 쥐고 있었다. 종이가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은 124년 뒤에서 온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손에는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설계도가 있었다.
'대장, 이자를 어떻게 할까요?'
수행원 중 한 명이 물었다.
'먼저 이름을 묻겠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도.'
김옥균의 눈이 설계도로 향했다.
이준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는 낯설었다. 1894년 한양의 흙먼지, 횃불의 연기, 낯선 향신료가 섞인 냄새. 폐 속으로 스며드는 그 감각이 자신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이름을 먼저 대라."
김옥균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의 부하들은 이미 검의 자루에 손을 올렸다. 1894년의 긴장감은 이준호가 도서관에서 읽던 역사책의 활자와 완전히 달랐다. 이것은 살아 숨 쉬는 위협이었다.
이준호의 입은 말라갔다. 지금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진실을 말하면? 둘 다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설계도를 들고 있는 손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종이가 그를 지탱하는 것 같았다.
"이준호입니다. 나는... 기술자입니다."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닌 말이 나왔다. 목이 조였다. 심장이 귀에 들릴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기술자?"
김옥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경복궁 근처에서 기술자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저는... 여기 있어야 했습니다."
이준호는 눈을 맞췄다. 도망치는 시선이 아니라, 확신에 찬 눈빛이 필요했다. "대장님이 찾던 사람입니다."
"찾던 사람?" 김옥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를 찾지 않았다. 오직 조선을 구하려 했을 뿐이다."
"맞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점점 단호해졌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덮을 만큼의 목적의식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음성이 말했던 순간이었다. 선택의 시작. 그리고 책임의 시작.
김옥균이 설계도를 바라봤다. 그의 손이 천천히 펴졌다.
"그것을 보여주게."
이준호는 설계도를 건넸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종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종이의 무게가 결연함으로 느껴졌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을 견디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김옥균은 횃불 빛 아래서 설계도를 펼쳤다. 증기 기관의 도면, 통신 시스템의 회로도, 근대식 포병 전술의 그림들이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가 횃불 빛에 반사되며 커졌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것은... 무엇인가?"
"미래입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미래?" 김옥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조소가 아니라 경이로움에 가까웠다. "미래를 종이 한 장에 담았다는 말인가?"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선은 변할 수 있습니다."
"변한다? 어떻게?"
"더 강한 나라로.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나라로."
김옥균의 손가락이 설계도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기술 용어들, 수학적 계산들, 기계 부품들의 이름들. 모두가 낯설었지만, 동시에 무언가 가능성을 느끼게 했다.
"이것을 어디서 얻었는가?"
"그것을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대장님이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초월적 음성의 경고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너는 구원자가 아니다. 단지 지식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준호의 마음 속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목소리.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목소리.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목소리.
"당신은 정말 기술자인가?"
김옥균이 설계도를 들고 이준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네. 가장 특별한 종류의 기술자입니다."
"특별한?" 김옥균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권력자의 미소였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의 미소. "그렇다면 증명하시오. 이 도면이 정말 우리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김옥균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술자여, 당신은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가? 지금 이 순간, 고종 대군은 궁 안에 머물고 있다. 명성황후는 보수 세력과 무언의 거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 김옥균은 조선을 개혁할 기회를 이 손에 쥐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적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이준호의 손이 설계도를 다시 가리켰다. "전쟁은 기술로 결정됩니다. 일본이 청을 이긴 이유를 아십니까?"
"기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아니, 기술이 전략을 만듭니다. 기술이 없으면 가장 훌륭한 전략도 무용지물입니다."
김옥균은 설계도를 다시 들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호기심에서 욕망으로. 이준호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 도면들을 누가 이해할 수 있는가?"
"박영효 대감이나 서광범 선생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아는가?"
"예. 역사책에서..."
이준호는 말을 멈췄다. 실수했다. 김옥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이 굳어졌다. 손가락이 권총 자루 쪽으로 움직였다.
"역사책에서? 당신은 정말 이상한 기술자다."
이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 순간이 결정적이었다.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기술 서적뿐 아니라, 역사와 인물에 관한 책들도요."
"책?" 김옥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기술자가 책을 읽다니. 보통의 기술자는 손으로 배운다."
"저는 특별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준호는 눈을 맞췄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감출 수 없다면 차라리 당당함으로 포장하기로 했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김옥균은 한참 동안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침묵 속에서 이준호의 심장은 급하게 뛰었다. 이 순간, 김옥균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을 군부에 넘길 수도 있다. 또는 설계도를 빼앗고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김옥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좋다.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조선의 미래가 될 것이다. 당신이 거짓이라면..." 김옥균의 손이 권총의 자루에 닿았다. "당신은 죽을 것이다."
"이해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함께 가자. 박영효를 만나러."
김옥균이 말을 탔다. 이준호는 그 뒤를 따랐다. 경복궁의 담장을 지나며, 한양의 밤거리를 누비며, 이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두렵지도, 후회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초월적 음성의 경고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이준호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설계도의 종이가 김옥균의 손에서 빛났다. 바람이 불었다. 이준호의 옷자락이 날렸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가는 금이 밤하늘을 가로질렀고, 그 틈에서 이상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준호.'
절박한 경고가 울려 퍼졌다.
'돌아와. 지금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준호는 돌아서지 않았다. 김옥균은 이미 박영효의 집 앞에 도착했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설계도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이준호는 그 뒤를 따랐다. 하늘의 금이 더 커졌다. 시간의 균열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준호를 빨아들이려는 듯이.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그것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