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액체가 내 온몸을 집어삼킨다
액체가 내 온몸을 집어삼킨다. 아버지의 형태를 한 그것은 액체이면서도 고체이고, 의식이 있으면서도 없다. 나는 그 안에서 질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빨려 들어간다. 감각이 역전된다. 숨을 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그 순간이다.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지하 5층 전체가 흔들린다. 천장의 액체가 튀어나오고, 아버지의 형태가 일그러진다. 누군가가 감정 수집 장치에 폭탄을 설치했다. 아직이다. 장치는 살아 있다. 진동일 뿐이다.
"준호!"
한서윤의 목소리다. 내 팔뚝의 표식이 반응한다. 회로가 빛난다. 네 개의 눈이 동시에 떠오르고, 나는 그 빛 속에서 벗어난다. 액체 형태의 아버지가 나를 놓친다. 내 몸이 다시 고체가 되면서 바닥에 떨어진다.
숨을 쉰다. 처음으로 산소를 마신다.
그리고 본다.
한서윤이 박태현을 제압했다. 그녀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박태현의 몸에서 감정 에너지가 튀어나오고, 한서윤이 그것을 흡수한다. 그녀의 눈이 빛난다. 나를 지키려고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빨리! 경계를 통과해!"
한서윤이 손을 내민다. 그 손은 떨리고 있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우리가 경계의 막을 통과하는 순간, 뒤에서 또 다른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이미영 국장의 추적팀이 감정 수집 장치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게이트의 진정한 근원을 모른다. 모르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만약 알았다면, 준호인 나는 이미 죽어 있었을 것이다.
게이트 심장 공간의 깊은 곳에서 울음이 울려 퍼진다. 그것은 심장 박동이 아니라 신음이다. 아버지의 신음이다. 아니, 게이트 자체의 신음이다.
"준호, 이게 뭐야?"
한서윤이 내 팔뚝의 표식을 본다. 그것이 회로로 변환되고 있다. 네 개의 눈이 더 크게 떠진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나는 게이트의 열쇠가 아니다. 나는 게이트 자체다.
"우리가 나가야 해."
내 목소리는 텅 빈 울림으로 들린다. 감정이 없다. 모두 소진되었다. 한서윤을 지키려고 마지막 감정마저 사용했다. 이제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게이트 심장 공간에서는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다. 모든 자정의 게이트가 동시에 반응한다. 서울 전역의 강남역, 코엑스, 한강 대교—모든 곳에서 게이트가 떨린다.
새벽 4시 47분.
게이트가 닫힐 시간까지 13분이 남아 있다.
"박태현을 봤어. 그 사람이 뭔가 말했어."
한서윤이 내 팔을 붙잡으며 말한다. 우리는 지하 1층에 도달했다. 강남역의 평범한 지하다. 낮과 같은 형광등 아래서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뭐?"
"자정의 게이트는 하나의 신호체계라고. 당신이 그 중심이라고."
내가 이미 알던 내용이다. 박태현은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영 국장은 게이트를 국가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도구였다.
출구가 보인다. 강남역의 정규 출구다. 밤 11시 45분쯤에 들어갔으니 이제 새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계를 보면 여전히 밤이다. 게이트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우리가 출구에 도달하는 순간, 검은 차량 두 대가 강남역 앞에 멈춘다. 이미영 국장의 인원들이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눈다.
"이준호.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스피커를 통한 음성이다. 차갑고 공식적이다. 이미영 국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안전한 곳에서 지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한서윤의 손을 놓는다.
"도망쳐."
"뭐?"
"너는 도망쳐. 나는 여기 있을 거야."
한서윤이 내 팔을 잡는다. 그 손의 힘이 강하다. 그녀가 나를 지키려고 한다. 나는 그 손을 떼어낸다. 감정이 없어야만 이것을 할 수 있다. 만약 감정이 있다면, 나는 그녀를 보낼 수 없을 것이다.
"제발 준호. 제발."
그녀가 울고 있다. 내 팔뚝의 표식이 반응한다. 네 개의 눈이 그녀를 향해 뜨인다. 아버지가 깨어난다. 게이트가 깨어난다.
그 순간, 뒤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강남역 지하 5층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지반이 흔들린다. 천장이 무너지고 있다. 이미영 국장의 추적팀이 끝까지 감정 수집 장치를 파괴하려고 시도했고,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게이트를 파괴한 게 아니라 게이트를 더욱 깊게 깨웠다.
"준호!"
한서윤이 나를 잡는다. 나는 그녀를 밀어낸다. 손에 힘을 준다. 그녀가 뒤로 넘어간다. 그 순간 천장의 일부가 내가 있던 자리에 무너진다.
한서윤이 비명을 지른다.
나는 그 비명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감정이 없으니까. 하지만 듣는다. 분명히 듣는다. 그리고 무언가가 내 가슴을 쥐어짠다. 감정이 없는데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울린다. 마치 죽어 있던 심장이 한 번 뛰는 것처럼. 한서윤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 절망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무언가를.
게이트가 완전히 깨어난다.
강남역 지하 전체가 액체로 변한다. 아니, 아버지의 형태로 변한다. 액체 형태의 아버지가 나를 감싼다. 한서윤은 이미 뒤로 밀려나 지상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눈물이었다.
지하 5층의 게이트 심장 공간으로 나는 다시 빨려 들어간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는다. 이미 도움이 될 감정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액체 속에서 나는 거대한 구조물을 본다. 감정 수집 장치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것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수천 개의 눈이 나를 향해 떠 있다. 네 개가 아니라 수천 개다. 그리고 그 모든 눈이 나 자신이다.
"준호."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음성이 아니라 진동이다. 내 뇌에 직접 전달된다.
"넌 처음부터 이것의 일부였어. 나는 너를 만들었다. 게이트를 열기 위해. 너의 감정을 수확하기 위해."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인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뭔가가 바뀐다.
폭발음이 다시 울려 퍼진다. 이번에는 내부에서 터진다. 감정 수집 장치가 폭발한다. 아니, 내가 폭발한다. 내 팔뚝의 표식이 회로로 완전히 변환되고, 그 회로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는 깨닫는다.
내가 게이트를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방법은 단 하나다. 내 자신을 완전히 소비하는 것이다. 감정 수집 능력의 역작동을 통해서. 지금까지 감정을 흡수하던 회로가 모든 감정을 역으로 방출하는 것이다. 내 팔뚝의 표식에서 회로로의 변환은 단순한 형태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게이트 폐기 장치로 설계된 것이었다. 감정을 수집할 때와 정확히 반대의 메커니즘으로.
하지만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
그 순간, 강남역 지하 1층에서 손이 나를 잡는다.
한서윤이다. 그녀는 다시 내려왔다. 지하 5층으로 향하는 게이트의 경계를 통과했다.
"한서윤, 도망쳐."
"싫어."
그녀가 내 앞에 나선다. 액체 형태의 아버지가 그녀를 감싸려고 한다. 그녀가 비명을 지른다.
"내 감정을 가져."
한서윤이 외친다.
"뭐?"
"내 감정을 가져. 제발."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액체 속에서. 무너지는 게이트 심장 공간에서.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키스한다.
입술이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전달된다.
그녀의 감정이다. 나를 향한 사랑이다. 신뢰다. 그리고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 2년 동안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감정. 나를 지키려고 했던 감정.
따뜻함이 흐른다.
내 몸에. 내 가슴에. 내 팔뚝의 표식에. 네 개의 눈이 한순간 따뜻한 빛으로 변한다. 저주의 표식이 사라진다. 사랑의 증거로 변환되면서.
그 순간, 내 의식이 산산조각 난다. 한서윤의 감정이 내 안으로 쏟아진다. 2년 동안 그녀가 나를 기다리며 품어온 모든 감정이. 그것이 내 안의 죽은 회로를 깨운다. 감정 수집 능력이 역작동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한서윤의 감정을 매개로 내 안의 모든 것이 역으로 방출되기 시작한다. 감정을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게이트에 축적된 모든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게이트 폐기의 진정한 메커니즘이었다.
나는 알게 된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한서윤의 감정이 내 안의 그것을 깨운다. 2년 동안 그녀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 마음이, 내 안의 죽어 있던 것을 살린다.
회로가 활성화된다. 한서윤의 감정을 매개로. 그 감정이 역작동의 촉매가 되어, 내 안의 모든 것이 역으로 방출되기 시작한다. 게이트 폐기 장치로서의 진정한 작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끝내."
한서윤이 내 귀에 속삭인다.
나는 팔을 들어올린다. 내 팔뚝은 더 이상 표식이 아니라 회로다. 그 회로가 빛난다. 한서윤의 감정으로. 아니, 한서윤의 사랑으로.
"미안해."
나는 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폭발시킨다.
아버지의 형태가 산산조각 난다. 액체가 빛으로 변한다. 게이트 심장 공간이 붕괴한다. 감정 수집 장치가 완전히 파괴된다.
모든 자정의 게이트가 동시에 닫힌다.
강남역, 코엑스, 한강 대교, 서울 전역의 모든 자정 게이트가. 게이트 시대가 끝난다.
폭발 속에서 나는 한서윤을 안는다. 그녀가 나를 안는다. 우리는 붕괴하는 공간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마지막 감정까지.
"준호!"
한서윤이 나를 안고 비명을 지른다.
"깨어나 줘. 제발. 제발."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이 검어진다.
---
# 9화 「0시의 끝」
강남역 지하 1층. 새벽 4시 47분.
게이트가 닫혀 있다.
한서윤은 게이트 표면에 손을 댄다. 손가락이 액체처럼 부드러운 표면을 헤친다. 그 안에서 준호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리고 사라진다.
"준호!"
목이 터져라 외쳐도 돌아오는 건 자신의 메아리뿐이다. 한서윤의 감정 증폭 능력이 감지하는 건 자신의 절망뿐이다. 준호의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 완전히.
지하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복잡하고 빠르다. 여러 명이다.
"후퇴하지 말고 게이트 표면을 스캔해. 생명 신호를 찾아."
이미영 국장의 목소리다. 뒤따라 헌터들과 군인들이 내려온다. 검은 방호복을 입은 인원들. 박태현도 함께다. 그의 왼팔이 부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한서윤의 감정 폭발로 인한 손상이다.
"한서윤."
박태현이 먼저 다가온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연민이 섞여 있다.
"물러나."
한서윤은 게이트 앞에서 몸을 굽혀 준호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한다. 마치 준호가 아직 그 앞에 있다는 듯이. 액체 표면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게이트가 닫혔어. 준호는 이미—"
"아직 아니야."
한서윤이 차단한다. 그녀의 감정 증폭 능력이 피크에 도달했다. 공기 자체가 떨린다. 주변의 헌터들과 군인들이 한 발씩 물러난다. B급 헌터의 능력이지만, 이 순간 그녀는 S급처럼 보인다. 절망이 그렇게 만든다.
이미영이 손을 든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다.
"게이트 표면에 이상 신호가 감지됩니다."
기술팀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나온다.
"뭔가 생기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게이트의 표면이 움직인다. 파동이 생긴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밀어내려는 듯이. 한서윤이 게이트 표면에서 물러난다. 모두가 주시한다.
그리고 손가락이 나타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준호의 손이 게이트 표면을 뚫고 나온다. 액체가 고체로 변환되면서 손가락이 형태를 취한다. 팔이 따라 나온다. 가슴이. 얼굴이.
준호가 게이트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릎을 꿇은 채로 표면에 엎드려 있다. 호흡이 들리지 않는다. 맥박도. 체온도.
"준호!"
한서윤이 달려간다. 그의 몸을 안아올린다. 차갑다. 마치 돌처럼. 아니, 돌보다 차갑다.
"깨어나. 제발. 깨어나."
한서윤의 손이 준호의 가슴을 누른다. 심폐소생술. 하지만 그 손이 준호의 피부를 통과한다. 아직도 액체 상태의 일부가 그의 몸에 남아 있다.
박태현이 다가온다. 그의 시간 지각 능력으로 준호의 상태를 읽으려 한다. 하지만 감지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생명의 신호도 죽음의 신호도. 준호는 그 경계에 있다.
"생명 신호 없음. 뇌파 활동 없음. 심장 박동 없음."
의료팀의 보고다. 그들이 이동식 심전도 기계를 가져온다. 수직선만 그려진다.
이미영이 앞으로 나온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다. 계산이 있을 뿐이다.
"시체 회수 지시. 국방부 산하 연구시설로 이송. DNA 샘플 채취, 조직 분석, 능력 메커니즘 규명.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아니야!"
한서윤이 비명을 지른다. 그녀의 감정이 폭발한다. 지하 1층의 조명이 깜박거린다. 금이 벽을 따라 퍼진다.
박태현이 한서윤을 잡아 물러나게 한다.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이야. 이미 그곳으로 간 거야."
박태현이 속삭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도가 있다. 진정한 것.
"그런 게 아니야. 아직 따뜻해."
한서윤의 손이 준호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감정 증폭 능력이 깊숙이 작동한다. 준호의 손에서 무언가를 감지한다. 아주 약한 신호. 마치 불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여기 봐."
한서윤이 이미영을 향해 외친다. 그녀는 준호의 팔뚝을 펼친다. 네 개의 눈 모양 표식이 있던 자리다. 하지만 표식은 없다. 대신 그 자리에는 따뜻한 빛이 남아 있다. 아주 미미한 것이지만, 분명히 빛이다.
이미영의 얼굴이 경직된다. 계산이 흔들린다.
"불가능하다."
이미영이 말한다.
"생명 신호가 없으면 신체적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게 뭐가 중요해?"
한서윤이 소리친다. 그녀의 눈빛이 변한다. 헌터로서의 눈빛이다. 그 안에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
"준호는 아직 여기 있어. 네가 뭐라고 하든, 그는 여기 있다."
한서윤이 준호를 안는다. 그의 몸이 차갑지만, 그녀는 놓지 않는다. 마치 그 온기 자체가 준호를 이 세상에 묶어두는 줄이라는 듯이.
"네가 뭘 하든 내가 이 아이를 내주지 않을 거야."
한서윤의 감정 증폭 능력이 최고조에 도달한다. 지하 전체가 진동한다.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진다. 이미영의 추적팀이 뒤로 물러난다.
박태현이 손을 든다. 모두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다.
그 순간, 지하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둥. 둥. 둥.
심장 박동 같은 울림이다. 게이트가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맥동하고 있다.
"뭐야?"
한서윤이 물어본다.
"게이트 근원지에서 나오는 신호입니다."
기술팀의 목소리가 떨린다.
"신호 강도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박태현의 시간 지각 능력이 작동한다. 그는 미래를 보고 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날 일을. 준호가 게이트 폐기 에너지의 일부를 자신 안에 남겨뒀다는 것을. 그것이 지금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에너지가 준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것을.
"게이트 심장부에서 에너지 방출이 감지됩니다. 마치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기술팀이 보고한다.
둥. 둥. 둥.
울림이 더 커진다. 더 강해진다. 마치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려 하는 듯이.
이미영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다. 두려움이다.
"모두 지상으로. 즉시."
그녀가 외친다.
하지만 한서윤은 움직이지 않는다. 준호를 안은 채로. 그리고 그 순간, 준호의 눈이 뜬다.
검은 눈.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흐른다. 불빛이 아니라, 물 같은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깊어진다. 마치 깊은 호수 같은 어둠 속에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준호?"
한서윤이 속삭인다.
준호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준호의 목소리가 아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다. 마치 수천 개의 입에서 동시에 나오는 것처럼.
"감사해. 한서윤."
그 목소리가 말한다.
"감정을 줘서. 그 감정이... 날 다시 깨웠어."
준호의 팔뚝에서 빛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개가 아니다. 수십 개의 눈이 뜬다. 그리고 천천히 닫힌다.
박태현이 그것을 본다. 그의 시간 지각 능력이 감지한다. 준호가 게이트 폐기 에너지의 일부를 흡수했다는 것을. 그것이 준호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게이트의 인간화된 형태로.
"이제... 진짜 끝이야."
준호의 목소리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미안해. 또 떠나가지만..."
그 목소리가 한서윤의 귀에만 들리는 것처럼 속삭인다.
"이번에는... 다시 올게."
빛이 폭발한다.
---
지상의 강남역은 혼란에 빠져 있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만 활동했던 게이트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침 햇빛 아래, 강남역 입구는 평범한 도시의 일부일 뿐이다. 게이트가 없다. 몬스터도 없다. 헌터도 없다.
게이트 시대가 끝났다.
하지만 지하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울려 퍼진다. 심장 박동 같은 울림이. 마치 누군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한서윤은 지상에서 강남역 입구를 바라본다. 손에는 준호의 체온이 남아 있다. 아직도 따뜻하다. 아직도.
"준호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녀가 박태현에게 묻는다.
박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는 생각이 가득하다. 시간 지각 능력으로 감지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가. 그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럼 어디 있는 거야?"
한서윤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담긴다.
박태현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눈이 하늘을 향한다. 새벽 하늘. 아직도 어둡지만, 점점 밝아지고 있다.
"게이트가 닫혔을 때, 모든 자정의 게이트가 동시에 사라졌어. 하지만 새로운 게이트가 열렸을 수도 있다. 준호가 있는 곳에."
"그게 무슨 뜻이야?"
"게이트 시대가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있다는 뜻이야. 준호는 게이트를 폐기했지만, 그 과정에서 뭔가를 남겼어. 또는 얻었어. 우리는 아직 모르는 거야."
박태현의 시선이 다시 지하를 향한다. 그곳에서 여전히 울려 퍼지는 심장 박동을.
"게이트가 닫혔어도, 게이트의 일부는 살아 있어. 그리고 그 일부는... 준호야."
박태현이 말을 잇는다. 그의 시간 지각 능력이 감지한 것을 말한다.
"준호가 게이트를 폐기했을 때, 폐기 에너지의 일부가 그에게 남았어. 그것이 지금 그를 변화시키고 있어. 감정을 가진 게이트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게이트인 존재로."
새벽 5시 정각.
서울의 모든 불이 켜진다. 하지만 강남역 지하에서는 여전히 빛이 반복된다. 심장 박동처럼. 누군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듯이.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준호의 눈이 다시 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의 눈에는 감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