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시작
병실 천장이 하얀색이다. 천천히 초점을 맞춘다. 심전도 기계의 규칙적인 비프음. 산소 공급기의 미세한 음성. 그 모든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뜬 지 몇 초가 지났는데, 준호는 아직도 그 소리들이 신기하다.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는 감각. 이게 뭔지 알 수 없는 그것.
두려움? 아니다.
기쁨인가?
"준호."
한서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침대 옆에 앉아 있다. 하루종일 앉아 있었던 자리. 팔꿈치는 빨개졌고, 어깨는 굽어 있다. 얼굴에는 피로가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눈은 초롱하다.
"깼어?"
준호는 입을 열려고 한다. 목이 메인다. 마치 누군가 모래로 채워놓은 것처럼. 하지만 그 감각도 낯설고 소중하다. 통증이 돌아왔다. 감정이 돌아왔다. 이 모든 것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목에서 첫 소리가 난다. 목이 떨린다.
한서윤이 벌떡 일어난다. 침대 레일을 넘고, 준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다.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하지만 그녀도 운다. 어깨가 들썩인다. 2년을 기다린 여자의 눈물이다. 강남역 지하에서 게이트 심장으로 빨려가던 남자를 붙잡으려다 실패한 여자의 눈물이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돌아온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물이다.
준호의 손이 움직인다. 팔뚝이 움직인다. 그곳에 있던 진홍색 표식은 이제 없다. 대신 약간의 흉터만 남아 있다. 그 손이 한서윤의 등을 감싼다.
"미안해."
첫 번째 말. 준호의 첫 번째 완전한 말. 감정을 실은 말.
"미안해. 미안해."
계속 중얼거린다.
"그러지 말아. 넌 여기 있고, 난 여기 있고, 그게 다야."
한서윤이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묻는다. 심장이 들린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살아 있는 심장. 그 소리를 따라 준호의 심장도 뛴다.
---
**게이트 폐기 작전**
병실 문이 열린다. 의사다. 50대 초반, 갈색 안경, 차트를 들고 있다. 그의 표정은 경악과 기쁨이 섞여 있다.
"이준호 님. 정신이 오셨군요."
의사가 차트를 확인한다. 뭔가를 재확인한다. 다시 본다.
"당신은... 기적입니다."
의사가 침대에 가까워진다. 손전등을 켜서 준호의 눈동자를 확인한다.
"뇌 스캔 결과를 여러 번 봤는데, 감정 처리 영역이 완전히 재활성화되었습니다. 편도체와 전전두엽의 손상이 모두 회복되었거든요.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병실 문이 다시 열린다.
어머니다.
이영자가 진입한다. 얼굴에는 3년치의 주름이 파인다. 머리는 하얀색이 더 늘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그 아들을 다시 찾은 어머니의 얼굴.
"엄마."
준호가 말한다.
이영자가 멈춘다. 차트를 들고 있던 의사도 멈춘다. 한서윤도 멈춘다. 모두가 그 한 마디를 듣는다.
엄마.
2년 동안 나오지 않던 말. 3년 동안 아들의 입에서 들은 적 없는 말.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생명력 자체인 그 말.
이영자가 달려온다.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아들의 얼굴을 만진다. 양손으로. 마치 환각인지 확인하려는 듯.
"우리 준호... 우리 준호..."
어머니의 목이 떨린다.
준호가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느낀다. 어머니의 피부. 어머니의 온도. 어머니의 생명력.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 말 하지 마. 넌 여기 있어. 살아 있어. 그게 다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의사는 자리를 물러난다. 이 순간은 의학이 아니라 다른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한서윤이 어머니를 보며 미소 짓는다. 눈물이 여전히 흐르지만, 그 미소는 맑다.
---
준호가 한서윤의 손을 잡는다. 이 손의 온기를 느끼는 것도, 이렇게 누군가를 원하는 것도 2년 만이다. 감정이 돌아오니 모든 것이 새롭다. 너무나 새로워서, 때론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두렵지 않은 것은 옆에 한서윤이 있기 때문이다.
한서윤이 준호의 팔뚝을 본다. 진홍색 표식이 미세한 빛으로 변해 있다. 아주 약한 빛. 눈을 크게 뜨고 봐야 겨우 보일 정도의 빛. 그 빛은 준호의 감정 회복과 함께 나타났다.
"아버지가 남겨준 거야."
준호가 그 빛을 바라본다.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응. 알았어."
한서윤이 그의 손을 더 꼭 잡는다.
게이트 심장 속에서 일어난 일을 준호는 아직 완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강남역 지하로 빨려가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마치 꿈처럼 흐릿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버지의 유산이라 불리던 팔뚝의 표식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 그것이 게이트의 심장과 공명했고, 어떤 교환이 일어났다는 것.
준호의 감정이 돌아온 대신, 그 표식은 변했다. 진홍색의 저주에서 미세한 빛으로. 아직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것으로.
하지만 준호는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함께할 누군가가 있으니까.
---
**심리 재건**
퇴원 후 2주.
준호는 여전히 감정의 폭주 속에서 헤맸다. 2년 동안 잃었던 모든 감정이 한 번에 돌아온 것이다. 기쁨은 눈물이 되고, 슬픔은 가슴을 짓누르고, 분노는 손을 떨리게 했다.
병실에서 퇴원한 후 첫 밤, 준호는 한서윤의 어깨에서 울었다. 2년을 견딘 모든 눈물이 한 번에 흘렀다. 강남역에서 감정을 잃던 그 순간부터, 감정 없이 살아가던 모든 날들이 되살아났다. 그 시간들이 하나의 무거운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괜찮아. 다 괜찮아."
한서윤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녀도 준호의 눈물을 함께 견디고 있었다.
퇴원 후 1개월.
준호는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게이트 관련 트라우마 전문 상담사였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강남구의 한 상담실에서 준호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다.
"2년 동안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2년을 살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상담사의 말이 준호의 가슴에 박혔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들—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은 모두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들을 거부하지 마세요. 받아들이세요."
준호는 상담실에서 자신의 감정들과 대면했다. 강남역 게이트로 내려가던 그날 밤의 공포. 감정을 잃어버린 후의 공허함. 그리고 그 공허함 속에서도 누군가를 지키려던 마음.
상담을 거듭하면서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감정을 잃었던 2년 동안도,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감정 없이도 한서윤을 지키려 했고, 어머니를 생각했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했다는 것.
그것이 준호를 변화시켰다.
감정이 돌아온 것은 기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과 자신의 선택이 만난 결과였다. 게이트 심장 속에서 준호는 선택했다. 감정 없는 삶을 거부하고, 다시 느끼기로. 그 선택이 아버지의 표식과 공명했고, 어떤 교환이 일어났다.
준호의 팔뚝의 빛은 그 증거였다.
퇴원 후 2개월.
준호는 사회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일상의 소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의 경적음, 도시의 모든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감정이 돌아오니 세상이 너무 크게 들렸다.
하지만 한서윤이 곁에 있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마."
한서윤이 준호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준호는 천천히 세상과 다시 연결되어 갔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준호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게이트로 인한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감정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
"내가 도와야 할 것 같아."
준호가 한서윤에게 말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한서윤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준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
퇴원 후 3개월.
준호와 한서윤이 강남역 앞을 산책한다. 밤 11시 30분. 도시는 여전히 깨어 있다. 빨간 불, 녹색 불, 노란 불. 자동차 경적음. 사람들의 목소리. 모든 것이 정상이다.
게이트가 없는 정상의 세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준호와 한서윤은 지나가며 듣는다.
"—게이트 관리청 이미영 국장과 박태현 비상대응팀장이 국제 범죄 재판정에 섰습니다. 혐의는 불법 인체 실험, 감금, 국가 기밀 위반 등 다중입니다. 한편 게이트 정보상 유진수 씨가 제출한 기밀 문서에 따르면, 게이트 발생의 근원은 10년 전 국가 주도의 감정 에너지 통제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법정에서는 박태현 팀장이 '게이트 폐기 작전'의 성공을 주장했으나, 이미영 국장은 '미완료된 상태'라고 반박했습니다—"
준호가 한서윤의 손을 꼭 잡는다.
"끝났어."
"아직 아니야."
한서윤이 말한다.
"뭐가 남았어?"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
한서윤이 준호를 본다. 그 눈에는 확신이 가득하다.
"우린 이제 시작이야."
그들이 걷는다. 강남역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그곳에는 이제 게이트가 없다. 단지 역사일 뿐이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평범한 지하철역. 사람들이 드나드는 정상적인 공간.
준호가 그 계단을 본다. 2년 동안 자정이 되면 그곳으로 내려갔다. 몬스터를 사냥했다. 감정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되찾았다.
밤 11시 59분.
준호가 멈춘다.
그 자리에서, 약한 빛이 반짝인다.
한서윤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준호..."
"괜찮아."
준호가 말한다. 그 빛을 본다. 너무나 약한 빛. 마치 별 같은 빛. 하지만 분명히 있다. 강남역 입구 바닥에서, 지극히 미세한 광채가 맥박처럼 박동하고 있다.
한서윤이 준호의 팔을 움켜잡는다. 그 손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뭐... 뭔가 남았어?"
"응."
준호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그 빛을 바라본다. 그것은 게이트가 아니다. 게이트는 완전히 폐기됐다. 모든 게이트가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 그렇게 보도했다. 국제 기구가 확인했다.
하지만 이것은 뭔가 다르다.
이것은 새로운 신호다.
준호의 팔뚝의 표식이 미세하게 빛난다. 그 빛과 강남역 입구의 빛이 공명한다. 마치 같은 주파수로 울리는 두 개의 현처럼.
"뭐야, 이건?"
한서윤이 묻는다. 목소리가 떨린다.
"모르겠어. 하지만..."
준호가 한서윤의 손을 잡는다. 그 손을 놓지 않는다.
"처음이 아니야. 우린 이미 겪었어."
"맞아. 우린 겪었어."
한서윤이 말한다.
그들이 그 빛을 본다. 밤 11시 59분 30초. 자정까지 30초 남았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진다. 별처럼 반짝이던 것이 이제는 작은 촛불처럼 밝아진다.
강남역 지하에서 이전에 본 게이트와는 다르다. 게이트는 검은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이것은 흰색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어딘가 살아 있는 것 같은 흰색 빛이다.
준호의 팔뚝의 표식이 강렬하게 빛난다.
"준호, 이건..."
"응. 시작이야."
준호가 한서윤을 본다. 그 눈에는 두려움도 있지만, 동시에 결의도 있다. 감정을 되찾은 남자의 눈.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눈.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을 지켜야 할 차례야."
준호가 말한다.
밤이 깊어진다. 자정으로 향한다.
강남역 앞 야경 속에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로 그 빛을 향해 걸어간다.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밤거리의 조명 속으로. 그 약한 빛 쪽으로.
그리고 화면이 밝아온다.
---
**1년 후.**
서울 강남구의 조용한 상담소.
간판에는 '마음의 문'이라고 적혀 있다.
준호가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온다. 뒤에는 한 명의 여성이 따라 나온다. 얼굴에는 미소가 있다. 작지만 명확한 미소. 감정을 되찾은 사람의 미소다.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준호가 말한다.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 따뜻하고, 살아 있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목소리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여성이 인사를 한다.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행복의 눈물이다.
문을 닫고 준호가 상담실 안으로 들어간다. 한서윤이 책상에 앉아 있다. 게이트 관련 심리 논문들이 쌓여 있다. 그들은 함께 일한다. 게이트로 인한 감정 손실의 회복을 돕는 일.
"오늘은 어땠어?"
한서윤이 묻는다.
"좋았어.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거든."
준호가 한서윤의 옆에 앉는다. 손을 잡는다.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소중한 감각.
그 1년간 준호는 많은 것을 배웠다. 감정이 돌아온 후 처음 몇 개월은 지옥이었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고, 그것들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담사와의 만남 속에서, 한서윤의 곁에서, 준호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들과 화해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게이트로 인한 감정 손실 피해자들은 준호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준호는 감정을 되찾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감정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의료 기술로도 회복할 수 없다고 알려진 그 상태에서.
하지만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그 증거였으니까.
그래서 준호는 상담사 자격을 취득했다. 한서윤과 함께 '마음의 문'이라는 상담소를 열었다. 게이트로 인한 심리 트라우마와 감정 손실을 다루는 곳으로.
1년간 준호와 한서윤이 만난 환자는 47명. 그 중 12명이 감정의 일부를 되찾았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네."
한서윤이 말한다.
"응.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창문 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인다. 게이트가 없는 밤. 정상적인 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아 있는 밤. 그들은 그 밤을 지켜본다.
손을 맞잡은 채로.
그리고 준호의 팔뚝에서, 아주 미세한 빛이 박동한다.
아직도 어딘가에 남겨진 그것이. 아직도 깨어 있는 그것이.
상담 중인 여성의 손목에서도 같은 빛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녀도 게이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준호의 팔뚝의 빛과 같은 주파수로 울린다.
한서윤이 그것을 본다. 눈을 좁힌다.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다.
"준호."
"응?"
"저 여자... 혹시..."
한서윤이 말을 멈춘다. 상담실 문을 본다. 여성이 나가는 뒷모습을 본다.
"뭐가?"
"아니야.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
한서윤이 준호의 손을 더 꼭 잡는다.
밤은 계속 깊어진다. 서울의 밤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미세한 빛들이 박동한다.
게이트는 끝났지만, 무언가는 시작되었다.
새로운 감정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그리고 결코 혼자가 아닌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