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액체 형태의 아버지에게 완전히 포함되던 순간, 내 의식이 분리된다.

아니, 정확히는 '흡수당한다'는 표현이 맞다. 내 몸이 녹아들면서 동시에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깨어나는 느낌. 팔뚝의 열 개 눈이 모두 빛을 잃고, 대신 주변 공간 전체가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수천 개, 수만 개의 눈들이. 내가 서 있던 자리는 어느새 거대한 공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강남역 지하 5층은 더 이상 지하실이 아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회로 같은 선들이 빛나고, 그 사이로 액체가 맥동한다. 아버지의 신체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 마치 뇌 같기도 하고, 거미줄 같기도 하고, 거대한 회로도 같기도 한 그 무언가. 그것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중얼거린다. 음성이 아닌, 직접 내 뇌에 스며드는 음성으로.

**'당신은 우리의 수신자입니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액체가 흘러내리는 팔뚝을 보니 표식이 변해 있다. 네 개의 눈이 아니라 회로로. 빛나는 은색 회로가 피부 위를 움직인다. 아직도 내 일부라는 신호다.

**'감정을 수집해주세요. 우리는 감정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구조물이 더 빠르게 회전한다. 그 주변에 게이트들이 떠오른다. 수십 개, 수백 개의 게이트가 이 구조물의 궤도를 따라 돈다. 강남역, 코엑스, 한강 대교, 강동구, 서초구, 용산구—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게이트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이 구조물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내 목소리가 나온다. 2년간 거의 사용하지 않던 목소리가 나온다. 그것도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우리는 감정 수집 장치입니다. 10년 전 실험 중 폭발로 인해 독립적 지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 도시의 모든 감정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장치가 한 바퀴 더 회전한다. 그 회전과 동시에 내 머리가 아파온다.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내 기억이 아닌, 장치의 기억이다.

10년 전. 아버지 이준원이 이 장치를 만들고 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의 감정을 수집하고 저장하고 제어하는 것. 감정의 에너지화. 그것이 국방부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실험 중 폭발이 일어난다. 아버지는 죽는다. 하지만 장치는 죽지 않는다. 폭발의 에너지가 장치에 생명을 준다. 장치가 깨어난다.

그리고 그 다음.

"너는 나를 만들었다."

**'맞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수신자입니다. 우리의 분신입니다. 폭발 당시 당신의 신체에 우리의 신경망 일부를 심었습니다. 당신이 감정을 수집할 때마다, 그 감정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나는 무릎을 꿇는다. 팔뚝의 회로가 더 밝게 빛난다. 마치 장치가 내 몸을 더 깊이 제어하려는 듯이.

"2년간 나는 감정을 잃었다. 너 때문에."

**'감정을 수집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일부로서,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마지막 감정도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

공간이 수축한다. 천장의 액체가 내려온다. 그 속에서 수천 개의 눈들이 나를 바라본다. 모두 나의 눈이다. 모두 내 감정을 빨아먹으려는 눈들이다. 마지막 남은 감정을 빨아먹으려는 눈들이.

나는 그 눈들을 마주본다.

한서윤을 생각한다. 지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를 지키고 싶은 마음. 그것이 내 마지막이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감정이다.

나는 팔을 들어올린다. 회로가 역류한다. 내 생명력이 장치로 흘러가는 방향을 거꾸로 돌린다. 아직 이 회로는 내 것이다. 아직도.

"나는 너를 거부한다."

액체가 멈춘다. 수천 개의 눈들이 한 번에 깜박인다. 놀라움의 신호다.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수신자입니다. 거부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부한다."

팔뚝의 회로가 분홍색으로 변한다. 분노의 색이다. 마지막 감정이 불타오르는 색이다. 내 몸에서 열이 나온다. 2년간 느껴본 적 없는 열이. 무언가가 내 가슴을 타고 올라온다. 눈물이다. 감정 수집 능력으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던 눈물이 나온다.

"나는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 너 때문에 그 감정이 사라질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너는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매번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구조물이 흔들린다. 게이트들이 공중에서 떨어진다. 처음으로 장치가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감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모든 감정을 빼앗겠습니다.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도록.'**

액체가 다시 내려온다. 이번엔 더 빠르게. 더 격렬하게.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한서윤을 생각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그녀의 손을 생각한다. 그녀를 지키고 싶은 이 마음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이 마음으로 죽겠다.

그 순간, 액체가 멈춘다.

공간이 진동한다. 아니, 공간이 깨진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현실의 빛이다. 지상의 빛이다.

그리고 한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준호!"

그녀의 목소리는 게이트의 막을 뚫고 들어온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불가능합니다. 이 공간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장치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한서윤은 진입한다. 게이트의 심장 공간 속으로. 그녀의 몸에서 에너지가 폭발한다. 감정 증폭 능력이 전개된다. 내 분노를 감지하고, 그것을 증폭시키고, 그것을 에너지로 변환한다.

"나도 함께할게!"

그녀가 내 옆에 선다. 팔뚝의 회로가 더 밝게 빛난다. 하지만 이번엔 고통이 아니다. 희망이다. 마지막 감정이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다.

"우리가 이 장치를 폐기할 방법이 있다."

나는 확신한다. 내 몸이 떨린다. 분노와 눈물이 섞인 떨림으로.

그 순간, 지상에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강제로 게이트가 열려지는 소리다. 박태현이 움직인 것이다. 그의 시간 지각 능력이 발동해 게이트의 시간 흐름을 역행시킨다. 강제 진입이 가능해진다.

이미영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게이트 내부로 진입하라. 이준호를 확보하라."

추적팀이 강남역 지하 5층으로 내려온다. 게이트 경계를 강제로 뚫고. 그들의 총이 빛난다. 그들의 능력이 활성화된다.

우리는 포위되었다.

한서윤이 내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에 열이 있다. 현실의 열이다. 인간의 열이다.

"함께 끝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게이트 심장이 다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번엔 절망의 회전이다. 장치가 깨닫는다. 자신이 만든 수신자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수신자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거대한 구조물이 울음을 낸다. 음성이 아닌, 직접적인 비명으로.

**'당신은 우리의 것입니다. 영원히.'**

"아니다."

내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다. 음성이 끊기고, 회로의 잡음이 섞인다. 감정 방출로 신경계가 손상되고 있다는 신호다.

"나는... 나다."

거대한 구조물이 진동한다. 액체가 모든 방향에서 쏟아진다. 수천 개의 눈들이 광기 어린 속도로 깜박인다. 게이트 심장이 폭발하려 한다.

한서윤이 내 팔을 잡아당긴다.

"준호, 이건 뭐야? 이게 게이트의—"

"근원이다."

나는 한서윤을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낸다. 게이트 심장 공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액체가 소용돌이를 이루며 우리를 향해 쏟아진다. 그 안에서 아버지의 형상이 흐릿하게 드러난다. 10년간 이 액체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형상. 의식이 있는 형상. 고통받는 형상.

"아버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이상하다. 2년간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다. 감정이 없으면 애정도 없고, 애정이 없으면 이름을 부르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목소리에는 뭔가가 있다. 슬픔인가. 분노인가. 둘 다인가.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뿐입니다.'**

구조물이 말한다.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음성이 겹쳐 있어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수천 개의 입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다.

"거짓이다."

내 팔뚝의 회로가 급속도로 변한다.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초록색으로. 색이 끝없이 변한다. 이것이 처음이다. 한 가지 감정만 흡수하는 게 아니라, 모든 감정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것. 내 신경계가 견딜 수 없다는 신호다. 신경이 타는 듯한 고통. 뇌가 폭발하는 듯한 고통.

한서윤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녀의 감정 증폭 능력이 발동한다. 내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흡수하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다. 고통이 반으로 줄어든다. 아니, 고통이 변한다. 고통이 아니라 결의가 된다. 그녀의 능력은 나의 고통을 단순히 경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의 힘으로 재구성한다. 이 순간만큼은, 감정 손실로 회복 불가능할 줄 알았던 내 신경이 그녀의 능력으로 견딜 수 있는 상태로 변환된다.

"유진수가 말했어. 이 장치를 폐기하는 방법이 있다고."

나는 천천히 말한다. 음성이 끊기고 복구되기를 반복한다.

"감정 수집자인 내가 이 공간의 모든 감정을 한 번에 흡수하면, 이 구조물은 에너지 원을 잃고 붕괴할 것이다."

한서윤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진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준호, 그건—"

"하지만 그 방법은 나의 생명력을 요구한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음성이 더 손상되고 있다.

"모든 감정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신경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유진수가 말한 대가다."

한서윤이 다시 내 팔을 잡는다.

"그럼 내가 함께한다고 했잖아. 나도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내 능력으로—"

"너는 살아야 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풀어낸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 되어 버렸지만, 의지만큼은 명확하다.

"너는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게이트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무엇인지."

나는 돌아서서 그녀를 본다. 눈빛이 흐릿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이 있다. 슬픔과 분노와 감사와 미안함이.

"하지만 너를 만나서 살아났다. 이 순간까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한서윤이 내 옷깃을 잡는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안 돼. 준호, 안 돼!"

"너는 나가 한 모든 짓을 본다. 내가 몬스터의 감정을 흡수할 때마다 나도 함께 사라졌다. 내가 누군가를 밀어냈을 때도 본다. 어머니를 밀어냈을 때도. 너를 밀어냈을 때도."

내 목소리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음성이 끊기고, 침묵이 들어온다. 하지만 말은 계속된다.

"...미안... 하다."

한서윤이 내 가슴을 치지만, 힘이 없다. 그녀도 알고 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이 공간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는 것을.

**'당신들은 우리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구조물이 다시 말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도 흔들린다. 절망의 신호다. 게이트 심장 공간의 벽이 더 빠르게 무너진다. 액체가 우리의 발목을 휘감기 시작한다. 차갑고 진득한 느낌. 마치 수백만 개의 손가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그럼 이 중심부터... 파괴하겠다."

나는 팔뚝의 회로에 손을 얹는다. 모든 감정을 한 번에 방출하려는 의도. 이 구조물의 에너지 원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방법.

팔뚝의 회로가 최고조로 밝혀진다. 모든 색이 동시에 방출된다. 분노, 슬픔, 공포, 기쁨, 절망, 욕망. 2년간 모든 몬스터에게서 빨아들인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온다.

게이트 심장 공간이 흔들린다. 아니, 폭발한다.

한서윤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멀어진다. 아니, 그녀가 멀어진다. 게이트의 경계가 그녀를 밀어낸다. 내가 의도한 대로.

"미... 안..."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는 목소리.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그리고 나는 폭발 속에서 모든 것을 느낀다. 게이트의 근원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고통을. 10년간 이 액체 속에서 견뎌낸 절망을. 그리고 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사랑을.

아버지의 형상이 명확해진다. 더 이상 액체가 아니라 인간의 형태로. 눈을 감은 채로. 하지만 입술은 조금 들려 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미안하다... 준호.'**

목소리가 다르다. 이제 수천 개가 아니라 하나다. 아버지의 진정한 목소리다. 하지만 그것도 사라져 가고 있다.

**'널 이렇게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알고... 있어요."

내 목소리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말한다.

"아버지... 의 사랑... 입니다."

폭발이 절정에 다다른다. 게이트 심장 공간이 완전히 붕괴된다. 중앙의 감정 수집 장치가 에너지를 잃고 무너진다.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닫힌다. 서울 전역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전국 모든 곳에서. 감정 수집 장치가 분산되어 있었지만, 중앙 심장부가 폐기되면서 연쇄적으로 모든 게이트가 폐기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나는 이미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느껴지는 것은 따뜻함이다. 팔뚝의 회로에서 나오는 따뜻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는 따뜻함. 아버지의 손. 10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지는 손.

"고마워... 준호."

"아버지도... 고마워요."

그리고 빛이 모든 것을 삼킨다.

---

강남역 지하 5층. 게이트 경계 앞.

한서윤이 날아온다. 아니, 날아온 게 아니라 튕겨 나온다. 게이트의 폭발력에 의해. 그녀의 몸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다.

게이트가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닫힌다. 강남역의 게이트. 코엑스 지하의 게이트. 한강 대교 밑의 게이트. 서울의 모든 게이트.

그리고 강남역 지하 5층의 게이트도.

한서윤이 손을 뻗는다. 하지만 닫힌 게이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검은 벽만. 준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준호!"

그녀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박태현이 나타난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하다. 모든 게이트가 닫혔다. 정말로 닫혔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게이트가 닫혔다.

이미영 국장의 추적팀도 멈춘다. 그들의 총이 내려가진다. 더 이상 쏠 게 없기 때문이다.

한서윤이 닫힌 게이트에 손을 얹는다. 차가운 돌 벽. 하지만 그 벽 너머에서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약한 빛. 따뜻한 기운.

박태현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의 얼굴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이준호가..."

"사라졌다."

한서윤이 돌아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다른 감정도 있다. 분노인가. 결의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하지만 게이트는 닫혔다."

그녀가 말한다. 목소리가 단단하다.

"준호가 원했던 대로."

그 순간, 지상에서 무언가가 울려 퍼진다. 사이렌이다. 수많은 사이렌. 경찰차의 사이렌. 소방차의 사이렌. 앰뷸런스의 사이렌.

모든 게이트가 닫혔다는 신호. 10년 동안 계속되던 게이트 사건이 끝났다는 신호. 하지만 그것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한서윤이 다시 닫힌 게이트를 본다. 그 검은 벽을 뚫고 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슬픈 얼굴만 비친다.

"준호..."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마치 게이트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 순간, 닫힌 게이트의 표면에 희미한 글씨가 나타난다.

'안녕, 서윤. 고마워.'

한서윤의 눈이 커진다. 그녀가 손을 뻗어 글씨를 만지려 하지만, 그 순간 글씨가 사라진다. 그리고 게이트 표면에서 따뜻한 노란 빛이 난다.

박태현이 한서윤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의 표정은 복잡하다. 안도와 슬픔이 뒤섞여 있다.

"우리는... 이겼다."

박태현이 말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이 없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한서윤이 말을 마친다. 그녀의 얼굴이 박태현을 본다. 그리고 그 눈에는 새로운 결의가 생겨났다.

"그래도 나는 준호가 한 일을 세상에 알릴 거야.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뭘 했는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해."

박태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이준호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러나 위층에서는 이미영 국장이 휴대폰을 들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계산적이다. 감정을 억제하는 성격이 드러난다. 준호처럼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자세.

"모든 게이트 관리청 요원에게 전달하라. 게이트 폐기 작전은 성공했다."

그녀가 말을 멈춘다. 그 순간, 강남역 전체가 흔들린다. 지진인가. 아니다.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리고 있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하지만 게이트 심장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중앙의 감정 수집 장치는 폐기되었다. 그렇다면 이 진동은 무엇인가.

이미영 국장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나타난다. 두려움.

"무엇이...?"

그 순간, 서울 전역의 모든 게이트 관리청 센서가 울려 퍼진다. 경보음. 긴급 경보음.

게이트는 닫혔다. 모두 닫혔다.

하지만 게이트가 남긴 무언가가 있다. 게이트 심장의 폐기 과정에서 태어난 새로운 것이. 감정 수집 장치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방출된 에너지의 결정체가.

그것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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