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정의 경계
자정 정각, 강남역 지하 5층.
손가락 끝이 액체에 닿는 순간 세상이 일그러졌다. 천장의 수천 개 눈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내 몸을 관통했다. 끌려 내려가는 감각. 아래로, 계속 아래로. 한서윤의 비명이 위에서 울려 퍼졌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소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게이트의 심장이 나를 호출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소환인 것처럼.
떨어지는 느낌이 멈췄다.
내 발이 단단한 바닥을 만났다. 새벽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순간, 나는 어디에도 없는 공간에 서 있었다. 강남역의 지하도 아니고, 게이트 내부도 아닌—두 세계의 경계에 있는 곳. 액체 같은 공기가 내 피부를 감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아니,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팔뚝의 표식이 뜨거워졌다.
열 개의 눈이 한 번에 빛났고, 그 빛이 주변을 밝혔다. 거대한 장치가 드러났다. 원형의 탑처럼 솟아 있는 구조물. 그 안에 액체가 흐르고, 액체 속에는 수억 개의 눈이 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게이트의 근원이군.'
생각이 아니라 인식이었다. 감정 없는 관찰. 하지만 그 뒤를 따라온 것은 분노였다. 10년 동안 누군가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분노. 나를 만들어낸 자들의 야욕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가슴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곳에 묻어둔 불이 산소를 만나 갑자기 살아나는 것처럼.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돌아서니 박태현이 서 있었다. 게이트 경계의 저쪽에서, 반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그의 얼굴은 차분했다. 마치 계획대로 흐르고 있다는 듯이.
"박태현."
내 목소리는 낮았다.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은 성대가 떨렸다.
"당신이 게이트를 폐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박태현이 한 발 다가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정해진 일이다."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발생할 겁니다. 당신은 그 통제의 열쇠입니다."
나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분노가 몸 속에서 회오리쳤다.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멈출 수 없게.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한 감정이 다시 타올랐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에서 용암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당신은 게이트 관리청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나?"
"개인의 고통은 더 큰 선을 위해 필요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박태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이미영처럼, 박태현도 자신의 논리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 나를 도구로 보는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오직 국가의 이익, 그것만 있었다.
"당신이 만든 것이 당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내가 웃음을 흘렸다. 목에서 나온 음성은 거칠고 낡았다.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팔뚝의 회로가 피부 아래서 맥박치듯 활성화되었다.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당신들이 만들어낸 질서를 자연이라고 부르는군."
박태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지하 5층의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서윤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가 흘렀다. 박태현이 몸을 날려 나를 막아섰다.
"준호!"
그녀가 박태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능력이 발동했다. 감정 증폭. 박태현의 몸을 파란 에너지가 휩쓸었다. 그의 내장이 울부짖는 듯한 표정이 얼굴을 뒤덮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몸이 벽에 부딪혔다.
한서윤이 박태현을 노려봤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넌 또 다른 이미영이야. 누군가를 도구로만 생각하는, 그런 놈. 준호는 당신의 것이 아니야!"
그녀의 손이 떨렸다. 감정 증폭 능력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입술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박태현을 노려봤다. 그의 몸이 천천히 일어나려 했다.
내가 한서윤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를 뒤로 당겼다. 내 몸이 박태현과 그녀 사이에 섰다.
"이제부터는 내 선택이다."
말이 입에서 나왔다. 2년 동안 거의 말하지 않은 입에서. 나는 한서윤을 보지 않고 박태현만 봤다. "당신의 국가, 당신의 선, 모두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겠다."
박태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한 발, 또 한 발 물러섰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당신은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끝낸다."
나는 한서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혈온이 느껴졌다. 내 손은 이미 차갑고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것이 마지막 따뜻함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중얼거렸다.
"뭐가?"
"모든 게."
나는 게이트 경계로 향했다. 박태현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경계의 막을 통과했다.
막이 내 몸을 저항했다. 뜨거운 통증이 피부를 태웠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나아갔다. 한서윤이 따라왔다. 그녀도 경계를 통과했다. 막이 그녀를 더 강하게 저항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준호, 아파—"
내가 그녀를 안았다. 내 몸으로 막을 막았다. 분노가 마지막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근력이 극도로 상승했다. 내 팔뚝의 열 개 눈이 모두 빛났다.
막이 깨졌다.
우리는 다른 쪽으로 떨어졌다. 게이트의 심장 공간으로.
순간, 세상이 폭발했다.
에너지가 모든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내 몸이 빛났다. 팔뚝의 표식이 더 이상 눈이 아니라 회로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 회로들이 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팔, 다리, 가슴, 목—모든 곳에서 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통증만 있었다. 뜨거운 통증이 신경을 태웠다.
"준호!"
한서윤이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짚었다.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파란 회로가 그녀의 손을 태웠다.
"놔, 놔!"
내가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내 신체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회로가 내 피부 아래를 헤집고 다녔다.
한서윤이 비틀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봤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하 5층의 거대한 실험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 액체가 흘러내렸다. 강남역 지하 5층 폐허의 모든 액체가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는 거대한 탱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버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전 폭발 사건에서 사라진 남자. 내 친생부 이준원. 그는 액체 속에 떠 있었다. 몸은 썩어 있었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팔뚝의 표식처럼, 수십 개의 눈이 액체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 10년 만에 마주한 그 이름. 내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모든 것을 깨웠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를 죽게 내버렸다는 죄책감. 그런데 그가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은 것이 나았을 것 같은 형태로 살아 있었다. 배신감이 뒤따랐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었나? 내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나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나?
"준호."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액체 자체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게이트의 심장에서.
"이제 시작이다."
탱크가 깨졌다. 폭발이 아니라 녹아내렸다.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액체 속에서 아버지의 형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끝없는 액체 덩어리. 그 안에 수억 개의 눈이 떠 있었다.
내 몸이 경직되었다. 떨림이 발가락부터 시작되었다. 다리 전체로 퍼졌다. 팔뚝까지.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경련했다. 근육이 수축하고, 호흡이 끊어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한 프레임씩 움직였다.
"넌 뭐야?"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액체가 움직였다. 아버지—혹은 그것이 부르는 이름이 아버지라면—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액체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안에 수억 개의 눈이 떠 있었다. 모든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 물러나!"
한서윤이 나를 뒤로 밀었다. 그 순간, 액체가 그녀를 감싸려 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내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액체를 뿌리쳤다. 회로가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파란 빛이 게이트 전체를 밝혔다.
"준호, 내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태현이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나가!"
내가 한서윤을 밀었다. 그녀는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박태현이 그녀를 받아안았다.
"준호, 같이 가!"
한서윤이 외쳤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발걸음이 계단 위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계속 나를 찾고 있었다. 돌아서려는 손, 멈추려는 발. 박태현이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녀가 저항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가."
내가 말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내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회로가 나를 묶고 있었다.
아버지—그것—가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완성되었다."
그 순간, 게이트의 심장 공간 전체가 빛났다. 강남역 지하 5층의 모든 벽이 액체로 변했다. 천장에서 수억 개의 눈이 나를 내려다봤다.
박태현과 한서윤이 계단을 올랐다. 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1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 아버지의 프로젝트의 진정한 목표. 감정 수집이 아니라, 감정 전송.
내 팔의 회로가 더 이상 눈이 아니라 기호로 변하기 시작했다. 문자. 수식. 명령어.
신경이 끊어지는 감각. 뇌에서 심장으로 향하던 신호들이 차단되었다. 그 자리를 낯선 것들이 채워 나갔다. 아버지의 것. 게이트의 것.
나는 깨달았다.
내가 게이트가 아니라, 게이트의 열쇠라는 것을.
그리고 그 열쇠가 이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하 1층에서 박태현이 한서윤의 손을 놓았다. 그의 통신기에서 음성이 울렸다.
"팀장, 지하 5층에서 에너지 방출 감지. 강도 계속 상승 중."
박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서윤이 돌아섰다.
"준호!"
그녀가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박태현이 그녀를 붙잡았다.
"늦었다."
동시에, 강남역 지하의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닫혔다.
새벽 5시가 아닌데.
자정이 되지 않았는데.
게이트의 심장이 손을 거두며 나를 완전히 감싸안았다.
"이제 당신은 게이트입니다, 준호."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몸 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게이트는 깨어났습니다."
한서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액체에 닿았다. 그 순간, 내 감정이 색을 잃기 시작했다. 투명해졌다. 마치 물에 녹아드는 잉크처럼. 감각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따뜻함이 사라졌다. 통증이 사라졌다. 그녀를 지키고 싶던 절박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사라졌다.
세상이 천천히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한서윤의 눈물이었다. 그것도 곧 사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