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정의 게이트
자정 00시 정각, 강남역 지하 1층 승강장.
경찰 사이렌이 멀어지던 찰나, 손가락 세 개가 내 팔을 낚아챘다.
"따라와. 지금 여기는 위험해."
한서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마주친 첫 번째 사람이 그녀인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그녀의 감정 증폭 능력이 자신도 모르게 나를 향해 작동했을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안해."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2년 동안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느껴서 낸 말. 그녀의 손이 더 강하게 내 팔을 잡았다.
우리는 지하 1층 대합실을 빠져나가 비상 계단으로 올라갔다. 위층으로, 아래층으로가 아니라. 위로. 지표면으로. 밤의 도시로 나왔을 때 서울은 이미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자정의 게이트들이 열려 있었다.
강남역 위, 코엑스 방향, 한강 대교 밑. 내 팔뚝의 표식이 일제히 반응했다. 그 표식들—지금은 여섯 개가 되어 있었다—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로. 깊숙이. 강남역 지하 어딘가로.
"넌 혼자 하기엔 너무 많이 잃었어."
한서윤이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의 눈이 내 표식을 따라갔다. 그녀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B급 헌터였고, 감정 증폭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표식이 뭔지는 몰랐을 것이다. 내 팔뚝에 새겨진 것이 게이트의 신호수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태현, 유진수, 그리고 지금 나뿐이었다.
"강남역 아래 뭔가 있어, 그지?"
한서윤이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내 표식을 봤다. 그 표식이 떨리고 있다는 걸 봤다.
"응."
대답했다. 한 음절. 그것도 반응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서윤의 어깨가 펴졌다.
"그럼 우리가 가자. 나도 함께할게."
"위험해."
말했다. 이번엔 조금 더 길게.
"알아. 그래서 더 함께해야지."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밤의 거리를 누비면서, 매 블록마다 떠오르는 게이트들을 지나면서,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강남 CGV 앞, 테헤란로 지하. 게이트가 떠 있었다. 내 표식의 세 번째 눈이 격렬하게 떨렸다.
"저기 봐. 너의 표식이 반응해."
한서윤이 내 팔을 들어 올렸다. 밤 하늘 아래, 그 표식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약하지만 분명한 광채. 마치 나침반처럼. 마치 나를 어디론가 불러내는 신호처럼.
우리는 계속 내려갔다.
강남역 지하 2층, 3층, 4층. 각 층마다 새로운 게이트가 떠 있었고, 각 게이트마다 내 표식이 더 강하게 반응했다. 다섯 번째 눈, 여섯 번째 눈이 깨어났고, 이제 일곱 번째가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공식 지하다."
한서윤이 말했다. 우리는 지하 4층의 유지보수 통로 앞에 서 있었다. 녹슨 철문. 그 위에 붙은 출입금지 표지판. 하지만 표지판 아래로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게이트의 어둠. 나만 볼 수 있던 어둠.
"아래가 있어?"
한서윤이 물었다.
"응. 지하 5층."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유진수가 말해준 주소가 떠올랐다. 강남역 지하 5층. 폐기된 연구시설. 10년 전 폭발 사건이 일어났던 정확한 위치. 그리고 게이트의 심장.
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단이 보였다. 어둠 속의 계단. 10분을 내려갔다. 시계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 심장의 고동으로는 10분이 맞았다. 빨라진 맥박.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 그것도 감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 집의 지하실이었다.
아니, 내 집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회색 콘크리트 벽. 낡은 선반. 그 위에 쌓인 짐들. 하지만 이것은 내 집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 기억 속의 지하실이었다. 게이트가 만든, 나만을 위한 공간. 나의 무의식이 구현한 형태.
한서윤이 선반 위의 짐을 손으로 쓸어냈다.
약병들이 쏟아져 내렸다.
수십 개. 아니, 백 개가 넘었을 것이다. 모두 비어 있었다. 라벨에는 약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도파민 재흡수 억제제, 세로토닌 증강제, 감정 자극 신경 자극제. 2년 동안 내가 시도했던 모든 약들. 모두 실패했던 약들.
"준호..."
한서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가 집어 든 것은 약병이 아니었다. 일기장이었다. 낡은 노트. 표지는 벗겨지고 페이지는 누렇게 변했다.
그녀가 첫 페이지를 열었다.
"'다시 누군가를 느끼고 싶다.'"
한서윤이 읽었다. 그것은 내가 썼던 글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려서 글씨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 흐트러진 글씨 아래로는 이름이 하나 반복되어 있었다.
한서윤. 한서윤. 한서윤.
백 번을 넘게.
한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눈물이 내 피부에 닿는 순간, 내 표식이 울렸다. 일곱 번째 눈이 완전히 떠졌다.
"넌 혼자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나를 안았다. 2년 동안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안았다. 처음으로 내가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팔이 움직였다. 그녀의 등에 닿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목이 메었다.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맺혔다. 감정이었다. 2년 동안 사라졌던 감정이 돌아오고 있었다. 죄책감. 미안함. 그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것—사랑.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렇게 서 있었을까.
한서윤이 나를 놓았다.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녀도 내 얼굴을 봤다. 2년 만에 내 눈에 감정이 있다는 걸 본 첫 번째 사람.
"우리 여기서 나가자.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자."
한서윤이 말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콘크리트 바닥 아래로, 또 다른 어둠이 있었다. 게이트의 심장이 있는 곳.
"응."
대답했다. 이번엔 확신을 담아서.
우리가 바닥의 금속 해치를 열었을 때, 자정의 시계가 00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빛이었다. 게이트의 빛. 하지만 이전에 본 어떤 게이트의 빛과도 달랐다. 강렬했다. 격렬했다. 마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나의 팔뚝에서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눈이 동시에 떠올랐다.
열 개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로. 깊숙이. 게이트의 중심으로.
그리고 그 순간,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발, 한 발. 누군가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박태현인가. 이미영 국장인가. 최민준인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서윤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함께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가 빛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세상이 반으로 갈렸다.
위쪽은 여전히 낡은 지하실이었고, 아래쪽은 다른 차원이었다. 공기가 달랐다. 중력도. 시간의 흐름도. 한서윤의 손이 내 손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결의로.
"저기 봤어?"
한서윤이 속삭였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지하실의 한쪽 벽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반투명한 액체 탱크. 그 안에는—
"사람?"
한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탱크 안에는 신체가 있었다. 정확히는 뼈와 피부만 남은 것. 하지만 아직도 호흡하고 있었다. 흐릿한 빛이 그 가슴을 통과하고 있었다. 게이트의 에너지가 그것을 살려두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았다.
사진으로만 본 얼굴이었다. 유진수가 보여줬던 그 사진. 10년 전 폭발 사건 당일의 신문에 실렸던 그 얼굴.
아버지였다.
"준호?"
한서윤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숨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누구야?"
그녀가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얼굴과 너무 닮아 있었으니까.
"내 아버지다."
목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라기보다 신음에 가까웠다. 2년 동안 느끼지 않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슬픔. 분노. 죄책감.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무언가—사랑.
하지만 이것은 이상했다. 2년 동안 신경 마모로 감정을 거의 모두 잃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감정이 되살아날 수는 없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 감정 신경을 외부에서 강제로 깨우는 것처럼.
한서윤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우리가 여기 있을 시간이 없어. 계단에서 소리 들렸어. 저 위로 올라와."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한 세 명. 아니,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어? 여기 뭐가..."
목소리가 들렸다. 박태현이었다.
"빨리!"
한서윤이 나를 끌었다. 우리는 탱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우리가 숨은 자리는 구석진 선반 뒤. 어둠 속에서만 보이지 않는 정도.
박태현이 먼저 내려왔다. 그의 뒤로 이미영 국장과 두 명의 무장 요원이 따라왔다. 그들의 총구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미영이 탱크를 봤다.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라 인정 같은 것이 흘렀다.
"프로젝트 파이널의 원본이군요."
박태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가 이전에 수집한 정보를 확인하는 톤이었다. 유진수와의 접촉을 통해 얻은 정보였을 것이다.
"이준호는?"
이미영이 물었다.
"아래로 내려갔을 겁니다."
박태현이 손가락으로 게이트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빛이 분출되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그를 따라가십시오. 그리고 막으세요. 어떤 수단을 써서든."
이미영의 명령이 떨어졌다. 무장 요원들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총을 들고.
한서윤이 내 옆에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우리는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박태현이 이미영 국장과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준호를 생포해야 합니다."
박태현이 말했다.
"왜?"
이미영이 물었다.
"그가 이 게이트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팔의 표식. 그것이 없으면 이 장치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죽인다면, 게이트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박태현의 설명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팔의 표식이 단순한 통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나 자신이 게이트와 연결된 존재라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영이 물었다.
"당신은 여기서 이 장치를 보호하세요. 나는 아래로 내려가겠습니다."
박태현이 게이트 쪽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지금이야."
한서윤이 속삭였다. 그녀가 선반 뒤에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손을 펼쳤다.
빛이 터져나왔다.
한서윤의 감정 증폭 능력이 폭발했다. 이 순간의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나를 지키려는 결의를 모두 모아 방출했다. 좁은 공간에서 그 에너지는 증폭되었다. 이미영 국장이 뒹굴었다. 박태현도. 무장 요원들도 균형을 잃었다.
능력 사용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한서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가!"
한서윤이 나를 끌었다. 그녀의 손이 내 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능력 사용 후 급속도로 약해지는 그녀의 신체.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나를 밀어냈다.
우리는 게이트로 뛰었다. 아래로. 깊숙이.
우리가 빛을 통과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강남역 지하 5층. 하지만 내가 알던 강남역이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차원이었다. 현실과 게이트가 겹쳐진 곳. 이 차원에서는 중력이 역으로 작동했다. 무거운 것이 위로 떠올랐고, 가벼운 것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는 게이트의 내부 구조—현실의 물리 법칙이 역전된 공간—때문이었다. 하늘이 없었다. 대신 천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액체처럼 흐르고 있었다. 검은 액체. 그 안에는 눈들이 떠 있었다. 수천 개의 눈.
"저게 뭐야?"
한서윤이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내 손에서 떨어졌다. 능력 사용의 후유증으로 그녀의 몸이 이 차원의 역중력에 끌려가고 있었다. B급 헌터인 그녀도 이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게이트의 정체야."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내 안의 다른 목소리. 무언가가 내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내 팔뚝의 열 개 눈이 모두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를 통해 만든 신호 수신기. 게이트와 공명하는 매개체. 10년 동안 기다려온 신호.
내 팔에서 통증이 시작되었다. 표식들이 새겨진 부분이 타오르는 듯했다. 동시에 뇌 뒤쪽에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 두개골을 안쪽에서 누르는 것처럼. 신체 감각이 내 것이 아니게 변해가고 있었다.
"준호?"
한서윤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 차원의 역중력에 완전히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움직이면 안 된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순간, 천장의 액체가 움직였다. 액체 속의 눈들이 모두 나를 향해 열렸다. 수천 개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나를 향해.
"이제 시간이야."
무언가가 내 안에서 말했다. 그것은 내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게이트의 목소리였다. 나는 저항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저항할수록 그 목소리는 더 커졌다. 내 팔의 통증이 극대화되었다. 뇌의 압박감도. 마치 내 신체가 두 개의 의식으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한서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아래로. 더 깊은 어둠으로. 게이트의 심장으로.
그리고 거기에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