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오피스텔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유진수가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당신은 정말 이 악순환을 끊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목소리에 물음표는 없었다. 판단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가 돌아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그 감정이 벌써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뜨거움. 팔뚝의 표식들이 살짝 욱신거렸다.

"내 마지막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신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솔직했다. 유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는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떠오른 영상은 자정 게이트 내부에서 수집한 것이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붉고 푸른 에너지가 파동처럼 퍼져 나갔다. 마치 심장이 고동치듯이.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죠."

유진수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에너지의 파동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팔뚝을 들어올렸다. 진홍색 표식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같은 패턴이다."

"정확합니다. 당신의 표식은 신호 수신기가 아닙니다. 당신 자체가 게이트와 공명하는 매개체입니다. 게이트가 당신을 통해 감정을 수집하고, 당신은 그 과정에서 감정을 잃어갑니다. 악순환의 완벽한 구조죠."

나는 의자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유진수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10년 전 강남역 인근 실험실. 공식 명칭은 '감정 에너지 통제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이준영 박사가 주도 연구원이었죠."

화면에 떠오른 것은 낡은 신문 기사였다. '강남역 인근 건설 중 대규모 폭발, 원인 불명. 사망자 다수.' 날짜는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폭발의 원인은 실험 실패입니다. 감정 에너지를 추출하고 제어하는 장치를 만들려던 프로젝트인데, 어떤 이유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고... 폭발했죠. 그 폭발이 게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폭발이 게이트의 문을 열었다는 게 맞겠네요."

나는 말을 잃었다. 유진수가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CCTV 화면이었다. 폭발 직전의 실험실. 그리고 복도. 누군가 어린 아이를 안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아이는 나였다.

"당신은 폭발 지점 근처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데려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순간 감정 에너지의 폭발이 당신의 신경계와 얽혔고, 게이트와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었죠."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손. 뜨거운 열기.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그 다음은... 공백이었다. 나는 팔뚝을 내려놨다.

"당신의 아버지는?"

"실험실에 남았습니다. 폭발을 막으려고."

침묵이 흘렀다. 2년 전 아버지는 게이트 사냥 중 사망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아버지는 10년 전 이미 죽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당신은 설계된 결과물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게이트 관리청은 당신을 추적해왔습니다. 처음엔 실패한 프로젝트의 부산물로 취급했지만, 자정부터 게이트가 당신에게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당신을 통제하려고 했죠."

나는 일어섰다. 자정을 지난 시간이었다. 창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분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 내가 설계된 결과물이라는 깨달음이 뇌를 관통했다. 팔뚝의 표식들이 욱신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심장처럼 나를 채우고 있는 감정을 흡수하려 하듯이.

"게이트의 근원은 여전히 작동 중입니다. 당신을 통해 감정을 수집하고 있죠. 하지만 당신이 마지막 감정을 되찾았다면, 그건 게이트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이제 게이트의 도구가 아니라 게이트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게이트의 심장을 찾아야 합니다. 10년 전 폭발이 일어났던 그곳. 아직도 당신의 팔뚝 표식이 그곳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팔뚝을 봤다. 다섯 개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쪽. 깊숙한 곳으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만 게이트가 열립니다. 그 시간 안에 근원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표식이 게이트와 공명할 때, 게이트를 폐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당신이 마지막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게이트의 일부가 아니니까요."

유진수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지도가 있었다. 강남역 일대의 지도였다. 그 위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강남역 지하 5층. 폐기된 연구시설 구역.'

"이곳입니다. 당신이 가야 할 곳."

나는 지도를 들었다. 종이가 낡아서 부스러질 것 같았다. 손가락이 동그라미 위에서 멈췄다. 10년 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뛰어나갔던 그곳. 그리고 지금도 내 팔뚝이 가리키고 있는 그곳.

"현재 시각은 자정 13분입니다. 당신은 4시간 47분 안에 그곳에 도달해야 합니다. 게이트는 당신을 따라갑니다. 당신이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게이트는 완전히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게이트의 심장을 파괴하면, 모든 게이트가 닫힙니다. 당신도 포함해서."

내 호흡이 가빨라졌다. 당신도 포함해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게이트가 나를 통해 작동한다면, 게이트가 닫힐 때 나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이 될지는 모릅니다. 감정 수집 능력은 사라질 것이고, 당신의 기억도 일부는 손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감정을 잃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선택지를 마주했다. 현재의 나로 살아가거나,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다시 시작하거나. 둘 다 죽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 다 새로운 형태의 죽음이기도 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생각했다. 아버지의 손. 뜨거운 열기.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 '넌 살아야 한다.' 그 말이 내 팔뚝에 새겨진 표식처럼 남아 있었다.

"내 마지막 감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나는 이미 결정했다. 유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빨리 가세요. 강남역으로."

나는 지도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유진수가 나를 현관까지 데려갔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잊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을 열었다.

거리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자정을 지난 서울. 아무도 없는 골목. 나는 걸었다. 팔뚝의 표식들이 더욱 밝아지고 있었다. 마치 게이트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강남역에 도달하는 데는 30분이 걸렸다. 역사는 텅 비어 있었다. 모니터에는 운행 중단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2층, 3층.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4층에 도달했을 때, 나는 첫 번째 게이트를 봤다.

벽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검은 균열이 생겨났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게이트는 내 몸을 빨아들였다.

게이트 내부는 지난번과 달랐다. 더 깊었다. 더 어두웠다. 그리고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심장처럼. 나는 그 소리를 따라갔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나는 멈췄다. 앞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 중앙에는 형상이 서 있었다.

인간의 형태였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몸이 반투명했고, 그 안에는 수천 개의 감정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분노, 공포, 슬픔, 욕망. 모든 감정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내가 지난 2년간 흡수한 모든 감정들.

그 형상이 나를 봤다. 아니, 나를 인식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순간, 공간이 밝아졌다. 뜨거운 빛이 퍼져 나갔다. 팔뚝의 표식과 형상 안의 에너지가 공명했다. 그 순간 기억이 돌아왔다.

10년 전. 실험실 내부. 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

"미안해, 준호.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그 말은 끝나지 않았다. 폭발이 모든 것을 삼켰다. 하지만 내 팔뚝에는 표식이 남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건넨 것. 게이트와의 연결고리. 나를 살리기 위해.

나는 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식들이 폭발적으로 빛났다. 형상이 울음을 질렀다. 그것은 내 울음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모든 감정의 울음.

그 순간, 게이트가 흔들렸다. 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는 달렸다. 형상이 내 뒤를 따라왔다. 아니, 형상이 나였다. 내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통로를 빠져나갔다. 게이트의 입구가 닫히고 있었다. 나는 뛰어나왔다. 강남역 지하 4층. 게이트는 닫혔다.

하지만 다른 게이트들이 열리고 있었다. 벽 곳곳에서. 지하 3층, 2층, 1층.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역사에 도달했을 때, 나는 멈췄다.

박태현이 서 있었다. 뒤에는 그의 팀원들. 그리고 한서윤. 그리고 이미영 국장.

"이준호. 당신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미영이 말했다. 그녀 뒤에는 국가 추적팀의 요원들이 있었다.

"지하 5층으로 가는 길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박태현이 손을 들었다. 그는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아니, 나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영 국장, 당신의 명령권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순간, 나는 팔뚝을 봤다. 표식이 변하고 있었다. 다섯 개에서 열 개로. 열 개의 눈이 나타나고 있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 눈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로.

게이트 내부에서 나온 지 2분이 채 되지 않았다. 팔뚝의 열 개 눈이 모두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고, 지하 4층부터 1층까지 모든 벽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이준호, 움직이지 마."

박태현이 총을 겨누었다. 이미영 국장이 아니라 나에게 겨누었다. 그의 눈빛에서 '시간 지각' 능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몇 초 앞의 미래를 보고 있다는 신호였다.

박태현의 손이 떨렸다. 이전의 냉철함이 사라져 있었다.

"당신이 아래로 내려가면 게이트가 완전히 열린다. 나는 그걸 봤다."

그의 목소리도 흔들렸다.

"어떤 미래를 봤습니까?"

나는 물었다.

박태현이 총을 내렸다.

"당신이 손을 그 장치에 대면 3초 후 이 지점이 붕괴된다. 5초 후 강남역 전체가 게이트로 변한다. 그 다음은... 서울 전체다.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활성화되고, 현실과 게이트의 경계가 사라진다."

박태현의 말이 끝나자 지하 4층의 벽에서 더 큰 균열이 생겼다. 게이트가 아니라 현실의 벽 자체가 부서지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먼지처럼 떨어졌다.

이미영 국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강남역 사거리를 막았다. 비상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역내 방송에서는 '게이트 발생, 전원 대피'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준호 님. 국가를 위해 협력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게이트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당신입니다."

이미영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협력하지 않으면 강제된다는 뜻이었다.

한서윤이 박태현 뒤에서 나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준호, 정말 아무것도 못 느껴?"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이 나를 멈추게 했다. 팔뚝의 열 개 눈이 깜빡였다. 아래로의 신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지만, 한서윤의 목소리가 그것을 흐트러뜨렸다.

느낌이 돌아오고 있었다. 분노, 슬픔, 그리고... 두려움.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내가 아래로 내려가면, 모든 게이트가 열리고,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감정이 내 안에서 흔들렸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진정한 갈등. 죽음과 변화 사이에서. 그리고 그녀를 지키고 싶은 마음.

"느껴져. 지금 느껴지고 있어."

나는 대답했다.

그 순간, 팔뚝의 눈들이 갑자기 빛났다.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게이트의 에너지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신호였다. 더 강한 신호. 더 오래된 신호.

지하 5층의 장치가 울음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위층까지 전해졌다. 벽이 더욱 부서졌다. 1층의 천장이 갈라지고, 위층 게이트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전체가 흔들렸다.

"이건 뭐예요?!"

이미영이 외쳤다.

박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래가 바뀌었다. 내가 본 미래와 다르다. 장치가... 장치가 조기 활성화되고 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태현의 휴대폰이었다. 그가 화면을 봤을 때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열리고 있습니다. 서울 전역에서. 강남역 외에도 코엑스, 강남 구청역, 한강 대교 밑... 자정이 되자마자 동시에."

박태현의 팀원이 외쳤다.

"자정? 지금 자정이 아닌데?"

나는 시계를 봤다. 오후 11시 47분이었다. 13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들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규칙이 깨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영 국장이 휴대폰을 들었다.

"'제로 프로젝트' 실행 단계 5로 상향. 모든 헌터 소집, 게이트 폐쇄 작전 개시."

그녀의 목소리에서 계산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무언가를 놓친 자의 당황함이 있었다.

"이건... 이건 예상 밖이다. 게이트가 조기 활성화되고 있다."

박태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총을 내렸다. 더 이상 겨누지 않았다.

"당신이 게이트의 신호수신자라고 했잖습니까. 그럼 이게 뭐예요? 이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

박태현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팔뚝의 열 개 눈이 계속 깜빡였다. 마치 신호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게이트를 따라, 신호를 따라.

강남역의 게이트들이 더욱 커져 갔다. 벽의 균열이 넓어졌다. 하나의 게이트가 아니라 여러 게이트가 겹쳐 있었다. 마치 한 번에 열린 것처럼.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동시에 열린 것처럼.

"유진수는 뭐라고 했습니까?"

박태현이 나를 붙잡았다.

"게이트의 근원이 깨어나고 있다고요. 그게 뭔 뜻입니까? 당신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팔뚝을 봤다. 열 개의 눈이 모두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 5층. 그 아래. 그 더 아래.

그곳이 시작점이었다. 10년 전 폭발의 중심. 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던 그곳.

"가야 한다."

내가 말했다.

"왜?"

박태현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 몸이 알고 있다."

나는 박태현의 손을 뿌리쳤다. 이미영 국장을 지나쳤다. 강남역 안내 표지판을 따라 더 깊은 지하로 향했다.

"이준호! 멈춰!"

이미영이 외쳤다.

"병력 헌터들이 올라가는 길을 막아라!"

요원들이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게이트를 볼 수 없었다. 나만 볼 수 있었다. 나만이 이동할 수 있었다. 나만이 이 신호를 따를 수 있었다.

지하 5층에 도달했을 때, 벽에는 더 이상 게이트가 아니라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는 붉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 팔뚝의 표식과 같은 색의 빛.

나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폐허였다. 10년 전 폭발로 무너진 실험실의 지하. 벽에는 전기 배선이 튀어나와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장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중앙에 무언가가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장치. 길이 3미터, 높이 2미터. 그 표면에는 나의 팔뚝과 같은 형태의 눈들이 수천 개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아버지였다.

아니, 아버지의 형상이었다. 투명한 액체 안에 떠 있는 신체. 그 몸에서는 붉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 10년 동안. 폭발 이후 계속.

나는 장치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차가운 표면에 닿았다.

순간, 기억이 폭발했다.

10년 전. 실험실 내부. 아버지의 목소리.

"미안해, 준호. 너는 살아야 한다. 너는 내 실패의 유산이 아니라, 내 희망이어야 한다."

폭발. 열기. 고통.

그리고 나. 팔뚝에 표식이 새겨지고 있는 나. 아버지의 손이 나의 팔을 만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표식이 활성화되면, 넌 진실을 찾을 수 있어. 그리고 나를 구할 수 있어."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장치를 보았다. 그 안에서 아버지의 신체가 떠 있었다. 죽어 있지 않았다. 단지 보존되어 있었다. 게이트의 에너지로. 감정의 에너지로.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10년 동안 내가 흡수한 모든 감정들. 그 감정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게이트에서 생성된 게 아니라, 여기서 방출된 거였다. 이 장치에서. 아버지의 몸에서.

내가 게이트의 신호수신자가 된 이유가 아니라, 게이트 자체가 나를 통해 감정을 수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였다. 아버지의 지시로.

그 순간, 장치 주변의 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위층의 게이트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활성화되면서 이 지하 장치까지 공명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졌다.

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만약 내가 이 장치를 건드리면, 박태현이 본 미래가 현실이 될 것이다. 강남역이 붕괴되고, 서울 전체가 게이트로 변할 것이다. 수백만 명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치를 놔두면, 게이트는 계속 작동할 것이다. 내 감정은 계속 빨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폭발할 것이다.

팔뚝의 눈들이 깜빡였다. 다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향이었다. 옆으로. 동쪽으로.

나는 손을 떼었다.

"준호!"

한서윤이 내려왔다. 박태현도 함께였다. 그들은 게이트를 통해 내려올 수 있었다. 이 장소가 이미 게이트와 현실의 경계가 붕괴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뭘 하는 거예요?"

박태현이 물었다.

"다른 장치가 있다."

나는 말했다. 팔뚝의 표식 변화가 단순 신호 증폭이 아니라, 다중 장치를 감지한다는 뜻이었다. 열 개의 눈은 열 개의 신호원을 의미했다.

"이것과 같은."

나는 덧붙였다.

박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찾아서 파괴하는 것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위층에서 더욱 큰 폭발음이 들렸다. 장치가 울음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신체가 액체 속에서 움직였다.

"준호, 우리 나가야 한다!"

한서윤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의 온기가 나를 현실로 돌려놨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박태현이 위층을 가리켰다.

"이미영 국장의 요원들이 온다. 그리고..."

그가 말을 멈췄다. 지하 5층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신호가 나타나고 있었다. 팔뚝의 눈들이 모두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위층의 경보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다른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준호에 대한 구금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제로 프로젝트 최종 단계. 모든 헌터 소집."

이미영의 목소리였다. 무선 통신을 통해.

"당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항복하세요. 아니면 제거됩니다."

박태현이 나를 봤다. 그의 눈빛에서 미래를 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흐릿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모르고 있었으니까.

"도망쳐야 합니다."

박태현이 말했다.

"한서윤, 준호를 데리고 나가. 나는 여기서 이미영을 막는다."

"박태현..."

한서윤이 거절하려 했다.

"빨리!"

박태현이 위층을 향해 총을 쐈다. 요원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와 한서윤은 달렸다.

폐허의 지하를 빠져나갔다. 게이트를 통해. 실험실의 또 다른 출구를 찾아. 강남역 뒤쪽의 골목으로.

새벽 1시. 자정의 게이트가 모두 닫혔다. 하지만 서울 전역에서는 여전히 붉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 게이트가 닫혔어도 그 에너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서윤이 내 손을 잡았다.

"준호, 우리 어디로 가?"

그녀가 물었다.

나는 팔뚝을 봤다. 눈들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에는 남쪽으로. 강남역에서 남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다음 장치가 있는 곳으로."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밤의 서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