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오십분, 강남역 지하삼층 C구간.
박태현과의 만남을 마친 나는 게이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팔뚝의 진홍색 표식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다섯 개의 눈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0년 전 폭발 현장.
주차장의 어둠은 깊었다. 자동차들이 만드는 기하학적 그림자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게이트는 아직 열려 있었다. 혼탁한 보라색 빛이 콘크리트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실과 저쪽 세상의 경계가 흐릿해진 곳. 내가 사냥하는 모든 것이 태어나는 곳.
"꽤 오랜 시간이군."
목소리는 뒤에서 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감정이 없으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몸은 반응했다. 근육이 경직되고, 호흡이 얕아졌다.
최민준이었다.
S급 헌터라는 명함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A급 상위의 힘을 가진 자. 나이는 서른 초중반. 검은 긴 코트에 허리춤의 검이 달빛을 반사했다. 그 검에서는 붉은 빛이 흘러내렸다. 감정을 저장한 증표.
"자정 게이트를 독점하려던 모양이군. 이준호."
내 이름을 입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박태현과는 무슨 얘기를 했나?"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는 명확했다. 박태현은 내게 강남역 폭발의 진실 일부를 전했다. 게이트 프로젝트, 감정 수집, 그리고 내 아버지. 최민준이 그 정보를 원했다는 것은 그도 같은 비밀에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게이트를 향해 한 발 더 나아갔다. 최민준은 내 움직임을 따라했다.
"게이트 안으로 도망치려고? 좋지. 거기서 이야기하자."
그가 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게이트로 뛰어들고 있었다.
중층 공간. 그곳은 항상 다르다. 낮과 밤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의 세계. 강남역의 구조는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왜곡되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끝없이 내려가고, 벽은 호흡하는 생명체처럼 맥동했다. 천장에서는 자홍색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달렸다.
뒤에서 최민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빠르지만, 나는 더 빨랐다. 이곳에서 내 감정 수집 능력은 최고조였다. 몬스터의 감정을 흡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분노, 공포, 욕망—모두 내 안에 있었다. 그것들이 근력으로 변환되었다.
"도망치지 마!"
최민준의 검이 공중을 갈랐다. 붉은 빛이 자국을 남겼다. 감정 폭발의 징조다. 그는 저장해둔 감정들을 한 번에 방출할 수 있다. 반면 나는 흡수할 때마다 자신을 잃어간다. 그것이 우리의 차이였다.
나는 급격히 회전했다. 그의 검은 내 팔뚝을 스쳤다. 진홍색 표식이 빛을 냈다. 다섯 개의 눈이 모두 빛났다.
그 순간, 내 몸이 반응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근육이 화끈거렸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것이 감정의 물리성이었다. 이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최민준의 검을 피하고, 그의 옆구리를 통과했다.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팔뚝의 다섯 개 눈이 가리키는 방향이 중요했다. 그 방향으로 가야 했다.
최민준은 벽에 부딪혔다. 먼지가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넌… 뭐하는 거야? 나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나는 이미 그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통로를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그녀를 봤다.
한서윤.
그녀는 게이트의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밝은 주황색 사냥꾼 복장이 중층 공간의 어둠 속에서 유일한 색깔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나를 찾느라 바빴다.
"준호!"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감정 증폭 능력을 가진 그녀는 내 무감각함을 더 잘 느낀다. 내가 죽어가는 것을 가장 가깝게서 목격하는 사람. 그것이 한서윤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안은—"
"위험하다. 나가."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감정이 없어진 내 음성은 기계음처럼 들렸다. 하지만 한서윤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혔다.
"넌 정말…"
그녀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최민준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검에서 붉은 빛이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자정 게이트의 비밀을 나눠 가지자고 했는데, 거절하니까 이 모양이군. 그럼 이제 다른 방법으로 얻어야겠다."
그는 한서윤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뭔가 부러졌다.
내 몸이 반응했다. 지키고 싶은 본능이 신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정 없는 육체가 움직였다.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움직였다.
내 몸은 이미 최민준 앞에 있었다. 검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나는 밀리지 않았다. 마지막 본능 하나가 나를 움직였다. 그것은 분노도, 공포도, 욕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육체의 반응이었다.
"넌… 뭐야—"
최민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성되지 않았다. 내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그는 뒤로 날아갔다. 게이트의 벽에 부딪혀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한서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흐느껴 울었다.
"넌 정말 죽고 있어. 준호. 왜… 왜 이런 거야?"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팔뚝의 다섯 개 눈이 다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폭발 현장. 그곳으로 가야 했다.
"미안해."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로 내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한 말이었다.
새벽 5시, 게이트가 닫혔다.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의 조명이 다시 켜졌고, 자동차들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한서윤과 나는 게이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최민준은 게이트 안에 남아 있었다. 새벽 5시 이후로는 게이트 내부에 갇히는 것이다. 게이트의 규칙이었다. 그는 내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최소 24시간은.
하지만 우리는 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국가 게이트 관리청의 차량들이 주차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들이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여성이 서 있었다.
이미영. 게이트 관리청 국장.
나이 오십대 초반, 은빛 머리를 딱 정돈한 여성.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감정이 아닌 계산만 있는 눈.
"이준호 헌터."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 명령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능력은 국가 자산입니다. 이제부터 국가에 협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권고.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서윤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요원들 중 몇 명이 총을 들었다. 아직 조준하지는 않았지만, 준비 상태였다. 마치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이유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거절하신다면 강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저도 유감입니다."
이미영은 말하면서도 내 얼굴을 직시했다. 그 눈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국가 권력이 구체화된 형태. 그것이 그녀였다.
나는 움직였다.
뒤를 보지 않고, 옆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봤다. 요원들이 나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내 몸은 그들을 통과하고 있었다. 누군가 "저격!" 하고 외쳤지만, 나는 이미 차량 뒤로 몸을 날렸다.
한서윤의 손이 놓였다. 그녀는 뒤에 남겨졌다. 요원들이 그녀를 포위했지만 해치지는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나였다. 한서윤은 미끼일 뿐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게이트가 아닌 현실에서 처음으로.
휴대폰이 울렸다. 박태현이었다.
"강남역 뒤 카페. 30분 안에 도착해. 그 후로는 연락할 수 없을 거야."
그가 전달한 정보는 명확했다. 박태현은 내게 강남역 폭발 사건의 일부를 알려줬다. 게이트 프로젝트, 감정 수집, 그리고 내 아버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 최민준이 박태현과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은 그도 이 비밀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누가 그에게 알렸는지는 모르지만, 게이트를 둘러싼 세력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위치를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박태현이 말한 카페가 어디인지.
나는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발걸음이 멈췄다.
누군가의 시선. 어둠 속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는 눈.
"잠깐."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박태현도 아니었고, 최민준도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멈췄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나이 오십대, 회색 머리, 그리고 그 눈동자에는 깊이가 있었다. 유진수. 비공식 게이트 정보상.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게이트 커뮤니티에서 가장 신뢰받는 정보상. 박태현만큼 위험한 인물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날 따라와."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명령이 아니라 초대처럼 들렸다.
"게이트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줄게."
나는 그의 손을 봤다. 그것은 떨리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내가 관리청의 추적을 피해 도주할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나를 만날 것도 계산했던 것처럼. 박태현과의 협력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더 깊은 네트워크가.
"그리고…" 유진수가 계속했다. 그는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당신이 찾는 것. 폭발 현장. 그곳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있어."
나의 팔뚝에서 다섯 개의 눈이 더 밝게 빛났다. 그것들이 동시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유진수를 향해.
"따라와."
그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나는 따라갔다.
유진수는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뒤에서 여전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관리청 요원들이 여전히 나를 추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수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곳.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
10분 후, 우리는 한 건물 앞에 섰다. 낡은 오피스텔. 간판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유진수는 열쇠로 뒷문을 열었다.
계단을 올랐다. 어둠 속에서.
"여기가 뭐죠?"
내 목소리가 나왔다. 놀랍게도, 여전히 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본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안전한 곳이야. 관리청도 모르는."
유진수가 답했다. 그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
3층에 도달했다. 유진수가 문을 열었다. 내부는 어두웠다. 하지만 그가 불을 켰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벽을 봤다. 아버지였다.
10년 전 강남역 폭발 사건의 흔적들이 그 주변에 붙어 있었다. 신문 기사, 건설 도면, 수십 개의 사진. 그리고 그 중앙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내 아버지. 웃고 있는 얼굴. 어릴 때 본 마지막 사진.
"당신의 아버지는 단순한 헌터가 아니었어."
유진수가 말했다.
"그는 게이트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원이었어. 그리고 그 프로젝트가 뭔지 알고 싶어 한 마지막 사람이었어."
나의 가슴이 떨렸다. 이것은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감정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그가 폭발 현장으로 간 이유를 알아?"
유진수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구하기 위해? 내가 뭔가 위험에 처해 있었나? 나는 어릴 때 게이트 폭발 현장 근처에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구했다. 그 후 아버지는 2년 전 게이트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팔뚝에 있는 표식…"
유진수가 내 팔을 가리켰다. 다섯 개의 눈이 계속 빛나고 있었다.
"그건 게이트가 당신을 선택했다는 표시야. 당신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세상이 기울었다.
나는 벽에 기대었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이 내 옆에 있었다.
"그 프로젝트가 뭐죠?"
나의 목소리는 쉰 것처럼 들렸다.
유진수가 오래 침묵했다. 마치 이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감정을 수집하는 프로젝트야. 인간의 감정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려는."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프로젝트의 완성된 결과물이야."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팔뚝의 다섯 개 눈이 동시에 깜빡였다. 차례로 소등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마지막 눈이 닫히는 순간, 내 손가락이 경련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터질 듯 울렸다.
그것은 분노였다. 아니, 분노보다 더 깊은 무언가였다.
"내가… 뭐라고?"
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수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마치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인 것처럼.
"당신이 감정을 내뱉고 있어. 처음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게이트의 근원이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