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적 대립
새벽 4시 23분.
상담실의 불이 꺼졌고, 벽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만 희미한 거리 조명에 떨렸다. "나는 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하다." 내 손글씨가 맞다. 어제 밤 서윤과 준호의 손을 잡은 채로 쓴 글귀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이미영'이라고 떠 있었다. 오전 10시 약속까지 6시간이 남았는데, 그녀는 지금 나한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나는 한 번도 받지 않은 번호였다. 단지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강남 상류층의 명부에서 나를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도로.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기 전에, 나는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여보세요."
"지은입니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침 햇빛이 아직 들지 않은 서울의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는 더 차갑게 들렸다.
"네, 안녕하세요."
"당신이 나를 만날 시간이 있겠지요."
"약속된 시간이 있습니다. 오전 10시—"
"지금 만나세요."
나는 상담실의 어두운 천장을 바라봤다. 벽시계의 바늘이 4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요?"
"당신이 준호를 사랑한다면, 이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내렸다. 귀에서 떨어진 그 음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나는 상담실의 불을 켰다. 밝은 조명 아래서 벽의 포스트잇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내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지은, 이건 함정이야.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가방을 들고 있었다.
---
강남 카페는 새벽 5시에도 문을 열어 있었다. 강남에는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들이 많다. 준호의 펜트하우스처럼, 이미영이 기다리는 이 카페도 밤과 낮의 경계에 존재했다.
그녀는 커피 앞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드레스, 진주목걸이, 완벽하게 정돈된 헤어. 새벽 5시라는 시간이 그녀의 외모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앉으세요."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회색 종이봉투.
"당신은 준호를 사랑합니까?"
이미영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나는 그대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이것을 받으세요."
그녀가 봉투를 밀어냈다.
"무엇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나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을 봤다. 새벽빛 아래서 그녀의 눈은 검은 진주처럼 빛났다. 감정이 없는 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감정을 느끼되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눈이었다. 준호의 눈과 같은 눈.
내 1등급 능력이 울렸다. 그녀의 감정을 읽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완벽함 뒤에 있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억압된 감정들이 그녀 내부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당신은 심리 상담사입니다. 그러면 알 것 아닙니까. 당신이 준호와 함께 있으면 그 아이는 망가집니다."
"아니요. 준호는—"
"당신은 그 아이의 약점입니다."
이미영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감정이라는 것은 약함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전문가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인 사실을 모릅니까? 감정을 버리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강한 사람 앞에서 나는 자동으로 작아진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작아지지 않았다.
"감정을 버리는 것이 강함입니까? 아니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천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내 능력이 그녀의 내면을 더 명확히 비춰냈다. 그 얼어붙은 감정들 아래 있는 것은 아들을 잃을까 봐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것을 강함으로 위장해야 했다.
"당신은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감정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모순입니다."
이미영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미묘하게. 하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입니다. 그것을 부정하시면, 당신은 아들을 영원히 잃을 것입니다."
카페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 6시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은 정지해 있었다.
이미영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입술의 떨림이 그녀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 이 돈을 준비했습니다."
이미영이 다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만큼 차갑지 않았다. 그 아래로 무언가 다른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3억 원입니다. 당신이 준호를 떠나면, 당신은 이 돈으로 상담실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유혹 때문이었다.
3억 원. 그 숫자는 내 상담실의 2년 운영비였다. 그 돈이 있으면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더 큰 상담실을 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준호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봉투를 들어올렸다. 종이의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가락 끝이 봉투의 모서리를 만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돈을 받으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미영이 말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옳은 일이 정답입니다."
나는 봉투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니요."
"뭐라고요?"
"저는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또렷했다.
"왜냐하면 이것도 또 다른 자기기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영의 눈이 커졌다.
"저는 항상 남을 도우려고만 했습니다. 그것이 저를 구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제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남을 도왔습니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부르죠."
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돈을 받으면, 저는 또 다른 누군가를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히 제 감정에서 눈을 돌리면서."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이미영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저는 제 감정을 선택합니다."
내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저는 준호를 선택합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미친 여자입니다."
이미영이 일어섰다.
"아니요."
나도 일어섰다.
"저는 처음으로 정상입니다."
이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봤다. 그 얼어붙은 눈 속에서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그런 떨림이었다. 나는 그 순간이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
강남 준호 그룹 본사의 회의실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밖의 모든 것이 안으로 침투했다.
박준영은 회의실의 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사들이 줄을 서 있었고, 준호는 회의실의 입구에 서 있었다.
"형."
준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당신이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준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미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빨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당신의 경영 능력에 대해 이사회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최근 당신의 의사결정이 감정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은 지난 3개월간 주가를 15% 하락시켰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박준영이 서류를 넘겼다. 준호는 서류를 받았지만 펼치지 않았다.
"이사회는 즉시 경영진 교체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의 경영권을 회수하고, 이사회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박준영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회의실 밖의 직원들도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지분 회수 절차를 법무팀에 지시할 것입니다."
박준영이 옆의 법무팀장을 가리켰다. 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법무팀장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사회 결의서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신호였다.
"추가로, 당신의 지분 동결을 공시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증권거래소에 보고됩니다."
박준영이 또 다른 문서를 넘겼다. 그것은 이미 서명된 상태였다. 그 아래에는 언론사 보도자료도 함께 있었다. '준호 그룹 회장, 경영권 분쟁으로 지분 동결' 이미 작성된 헤드라인이었다.
회의실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회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박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패배합니다."
"아니요."
준호가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회의실 유리에 그의 그림자가 크게 비쳤다.
"나는 이기고 지는 것에서 벗어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형, 당신을 봅니다. 진짜로."
박준영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은 감정을 버렸습니다. 아버지처럼.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입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당신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것을 강함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 쌓입니다. 한 사람 안에 쌓인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폭발합니다."
박준영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준호의 말이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도 외면해온, 깊숙이 묻어둔 무언가였다.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박준영이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전만큼 단호하지 않았다.
"아니요. 나는 형을 압니다. 나는 형의 모습 속에서 나의 미래를 봤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가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준호가 회의실의 문으로 걸어갔다. 이사들이 길을 비켰다.
"회사는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나는 감정을 느끼는 CEO입니다. 그것이 당신과 다른 점입니다."
준호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형, 당신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회의실의 유리 문이 닫혔다. 박준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닫힌 문을 바라봤다. 옆의 이사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법무팀장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박준영의 명확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준영은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다. 준호의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당신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자신의 내부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
상담실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7시 42분이었다.
서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이 책상 위에 식어 있었다.
"만났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했어?"
"돈을 거절했어."
서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3억?"
"응."
"미쳤네."
"아니야. 처음으로 정상이야."
나는 서윤의 옆에 앉았다. 벽의 포스트잇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하다."
"이미영이 뭐라고 했어?"
"당신은 미친 여자라고. 하지만 그 말 뒤에는 뭔가 다른 감정이 있었어. 아마도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두려움 같은 것."
"그래도 준호는?"
나는 서윤의 손을 잡았다.
"준호는 회사에서 박준영과 만났어. 경영권 박탈 위협, 지분 동결, 언론 보도. 모든 게 현실화되고 있어."
서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끝이네."
"아니야. 준호가 박준영에게 뭔가를 건넸어. 내가 이미영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당신이 나를 선택했나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나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왜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준호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
펜트하우스의 창밖으로 강남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준호가 나를 안았다. 그의 팔에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보호하려는 팔이 아니라, 함께하려는 팔이었다.
"내일은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지 않을 거죠?"
"아니요. 내일은 우리가 함께 만들 것입니다."
준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강남과 강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마치 두 도시가 한 곳으로 만나는 순간처럼.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펜트하우스의 책상 위에는 회사 서류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사회 소집 공지, 언론 기사 스크린샷들, 법무팀 연락처가 적힌 메모. 박준영의 위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손에 잡힐 수 있는 위험이었다.
나는 준호를 더 깊이 안았다.
"두려워요."
내가 처음으로 그 말을 했다.
"메시아 콤플렉스가 또 다시 나타날까 봐. 내가 이 상황을 당신을 구하는 것으로 왜곡할까 봐."
"그럼 우리가 함께 조심하면 돼요."
"하지만 당신도 위험해요. 회사, 경영권, 모든 게—"
"알아요."
준호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해요. 내가 혼자가 아니라."
나는 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다. 결연함이었다.
"내일 아침 9시에 박준영과 협상이 있어요."
준호가 말했다.
"법무팀, 이사회, 모두가 준비되어 있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했어요."
"뭘요?"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요."
준호가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또 다른 문서가 나타났다. 그것은 준호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였다. 그 내용은 명확했다. 회사 지분의 일부를 신탁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졌어요."
내가 말했다.
"아니요."
준호가 내 눈을 봤다.
"우리는 이미 이겼어요. 당신이 나를 선택했을 때."
"그건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도 감정으로 만들어져요."
준호가 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이 심장이 뛰고 있는 이유는 당신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충분해요."
나는 준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있었다. 그의 심장박동이 내 손에 전해졌다. 빠르고, 강하고, 살아있었다.
"내일 협상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할까요?"
내가 물었다.
"함께 가요."
준호가 말했다.
"당신도 함께 가요. 상담사로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박준영이 허락할까요?"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물어볼 거예요."
준호가 휴대폰을 들었다. 박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내일 협상에 나의 파트너가 함께하겠습니다. 그것이 조건입니다.'
메시지를 보낸 후, 준호는 나를 다시 안았다.
"우리가 지더라도, 함께 질 거예요."
"그건 패배예요."
"아니요. 그건 선택이에요."
나는 준호의 말을 이해했다. 구원이 아닌 함께함. 승리가 아닌 선택.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