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자기기만의 끝

상담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지은은 어두운 방 안에서 포스트잇 하나를 떼어내고 있었다. 노란 종이에 쓰인 '감사합니다'라는 글씨. 그 아래 또 다른 포스트잇. 그 아래 또 다른 포스트잇. 벽 전체가 감사의 말로 채워져 있었고, 그 중 몇 개는 자신의 필체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포스트잇을 떼어낼 때마다 벽이 드러났다. 흰 벽. 아무것도 없는 벽.

지은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떨림을 멈추려는 듯이.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면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뭐 하는 거야?"

서윤이 상담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불을 켜려다 멈췄다. 어두운 방에서 지은의 모습을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포스트잇들을 떼어내고 있어."

지은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준호를 닮아가는 목소리.

"왜?"

"이 글씨들이 누구 거라고 생각해?"

서윤이 멈췄다. 지은은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불이 없어도 보일 정도로 밝은 글씨.

"내 거네."

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맞아."

지은이 또 다른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그리고 또 다른 것.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호흡이 더 가빠졌다.

"나는 클라이언트들의 감사 메모를 받고, 몰래 똑같은 글씨로 내 감정을 채워넣었어. 마치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마치 내가 누군가를 구한 것처럼."

"지은."

"누가 나를 구해? 서윤. 내가 모두를 구했을 때, 누가 나를 구해?"

목소리가 떨렸다.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 감정이 흘러나왔다. 준호가 배웠던 감정들이 지은의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서윤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포스트잇을 떼어내는 손을.

"너는 남을 구했지만, 자신을 구하지 못했어. 그게 전부야. 그게 너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패턴이야."

"내가 뭘 했는데."

지은이 서윤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강하지 않았다. 밀어내는 척했을 뿐이었다.

"너는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싶었어. 그것만이 너를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줬어. 준호도 그거였어. 처음엔."

"준호는 달라."

"그래. 준호는 달라. 준호는 너를 구하려고 하고 있어. 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고 있어. 근데 넌? 넌 여전히 누군가를 구하려고 하고 있어. 이제는 준호를."

서윤이 지은의 어깨를 잡았다.

"기억나? 지난달에 상담했던 그 클라이언트. 남편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데 자기가 남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여자."

"네..."

"넌 그 여자한테 뭐라고 했어?"

지은이 침묵했다.

"넌 그 여자한테 말했어. '당신이 남편을 구할 수 없다'고. '당신이 자신을 먼저 돌봐야 한다'고. 그리고 그 여자가 울면서 깨달았어. 자기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자기가 남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자신을 학대했는지."

서윤이 지은의 눈을 봤다.

"넌 그 여자를 구했어.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해서. 그런데 넌 왜 자신에겐 그 말을 해주지 않아?"

지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번엔 더 많은 눈물이었다.

"또 다른 클라이언트도 있었지.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 넌 그 남자한테 뭐라고 했어?"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라고..."

"맞아. 넌 그 남자한테 말했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누군가를 구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가 아니라'고. 그 남자가 얼마나 편해했는데. 얼마나 자유로워했는데."

서윤이 지은의 손에 떨어진 포스트잇을 들었다.

"이건 뭐야?"

"'누가 나를 구할까?'"

"이건 넌데. 이건 너 자신이 너에게 쓴 거야. 너는 너를 구하려고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호를 구하려고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클라이언트를 구하려고 했어."

서윤이 포스트잇을 벽에서 떼어냈다.

"넌 상담사야. 구원자가 아니야."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상담실의 조용함. 이 방은 타인의 침묵을 감싸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침묵이 지은 자신의 침묵이었다.

지은의 호흡이 더 깊어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그 다음엔 빠르게. 입술이 떨렸다.

"나는 나를 구해야 한다."

지은이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맞아. 넌 넌 자신을 구해야 해. 그리고 그건 누군가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는 거야."

서윤이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켜졌고, 상담실이 드러났다. 벽은 여전히 포스트잇으로 가득했다. 지은이 떼어낸 것은 겨우 서너 장뿐이었다.

지은이 일어섰다. 천천히.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는 것처럼. 손을 짚고 벽을 짚으며. 그리고 포스트잇 하나를 더 떼어냈다.

"누가 나를 구할까?"

포스트잇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자신의 필체. 자신의 절망. 자신의 자기기만.

손가락이 포스트잇을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지은의 어깨가 들썩였다. 울음이 나왔다. 소리 없는 울음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이제 나야. 나 자신이."

지은이 그 포스트잇을 버렸다. 떨어지는 종이를 바라봤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류의 떨림이 올라왔다. 두려움이 아닌 결심의 떨림. 그리고 그 결심 아래 숨겨진, 아직도 남아 있는 불안감.

---

준호 그룹의 회의실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박준영이 자료를 펼쳤다. 주가 하락, 투자자 이탈, 신용등급 하향. 모두 준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회장님의 최근 의사결정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박준영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하지만 칼날처럼 예리했다.

"감정적인 판단이 증가했고,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이사회의 임원들이 준호를 바라봤다. 판단의 눈빛. 약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빛.

이미영이 뒷줄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떠 있었다. 아들이 약해지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미소.

"회장님이 개인적인 관계로 인해 경영 판단을 왜곡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사회는 회장 교체를 제안합니다."

준호가 일어섰다.

"당신은 내가 감정 때문에 약해졌다고 생각하는군요."

박준영이 미소를 지었다. 승리의 미소.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아버지도 감정 때문에..."

"나는 약해지지 않았다."

준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회의실 전체를 울렸다. 임원들이 몸을 뒤로 빼며 움찔했다.

"나는 인간이 되었다."

이사회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것은 예상된 대사가 아니었다. 감정 없는 사업가의 침착한 반박이 아니었다. 이것은 선택이었다.

"당신들은 내 아버지를 약하다고 말합니다. 감정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 아버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살았는지."

준호가 박준영을 바라봤다. 형의 얼굴을 찾아봤다.

"당신도 감정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박준영이 대답했다. 너무 빨리. 너무 강하게. 방어적으로.

준호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회의실의 긴 테이블을 가로질러 형에게 다가갔다. 임원들의 눈이 따라왔다. 긴장이 실처럼 팽팽해졌다.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박준영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눈꼬리 아래 근육이 떨렸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지은이 자신을 가르쳤던 대로, 무표정 뒤에 숨겨진 감정을 봤다.

"내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준호가 박준영의 앞에 섰다. 형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안에서 흔들림을 읽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형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두려워할 수 있고,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박준영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 것처럼. 그 입술이 떨렸다.

"나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으로 살 것입니다. 그것이 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이 강함입니다."

준호가 박준영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박준영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한 동요였다.

준호가 회의실 문에 손을 올렸다.

"형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준호가 돌아보며 말했다.

"형도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싶은 거죠. 나처럼. 하지만 형은 그걸 감정이라고 부르지 못했어요. 약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형은 계속 혼자였던 거고."

박준영이 준호를 바라봤다.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준호가 회의실을 나갔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임원들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박준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준호."

박준영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펜트하우스의 창문을 통해 서울이 보였다. 밤의 서울. 준호는 그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민이 옆에 서 있었다.

"어때요?"

"좋아요."

준호가 답했다.

"처음으로 감정이 좋다는 걸 알 것 같아요. 두려움도 느껴져요. 그리고 그 두려움이 제 것이라는 걸 알아요."

상민이 웃었다.

"그럼 이제 가야겠네요."

"어디로?"

"지은이를 찾아가야죠. 당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걸 보여줘야죠."

준호가 펜트하우스를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갔다. 로비를 통과했다. 그리고 차를 타고 강북으로 향했다.

---

상담실의 문을 열었을 때, 지은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여전히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지은이 하나씩 떼어내고 있던 중이었다.

준호를 본 지은이 멈췄다.

"당신이 자신을 구하고 있군요."

준호가 말했다.

"네."

지은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떨림이 약함이 아니었다. 결심의 떨림이었다.

"이제 저는 제 감정을 선택합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준호가 지은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당신은 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나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지은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누군가를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요?"

"당신은 이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준호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제 준호의 손은 안정적이었다. 감정을 느끼는 손이었다.

"계약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어떻게요?"

"이번엔 다릅니다."

준호가 웃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였다.

"이번엔 우리가 서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선택하는 겁니다."

지은이 준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그 순간, 상담실의 불이 깜빡거렸다. 형광등이 흔들리면서 불안정한 빛을 내보냈다.

그리고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 하지만 발신자는 이름이 있었다. '준호 그룹 인사팀'.

지은과 준호의 눈이 마주쳤다.

"뭐죠?"

지은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 번호로 연락드리는 이유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이어졌다. 다른 목소리였다.

"이미영입니다."

준호의 어머니였다.

"당신이 내 아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우리 집에 오세요. 아니면 당신의 상담실 라이센스를 취소하겠습니다. 당신의 모든 클라이언트 정보를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격증까지."

이미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협박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웠다.

"법적 절차를 거쳐서 진행할 것입니다. 당신의 상담 기록, 클라이언트 정보, 모든 것이 공개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누구를 상담했는지, 무엇을 상담했는지. 당신이 얼마나 무능한 상담사인지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창백함이었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의 창백함. 그리고 그 분노 아래 숨겨진, 현실적인 두려움.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내일 오전 10시. 당신의 어머니 집. 라이센스 취소, 클라이언트 정보 공개. 그리고..."

지은이 목소리를 낮췄다.

"법적 절차를 거친다고 했어. 모든 정보가 공개될 거라고."

상담실의 불이 또 다시 깜빡거렸다. 밝음과 어둠이 교대로 지은의 표정을 지워냈다 다시 그렸다. 지은은 준호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유일한 현실 같았다.

"내일 10시."

지은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어머니가 직접 나를 소환했어요. 라이센스 취소, 클라이언트 정보 공개, 자격증까지. 모든 협박을 다 꺼냈어요."

"알고 있었어요."

준호가 말했다.

"뭘요?"

"이런 일이 올 거라는 것. 어머니가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실 거라는 것."

준호가 말을 멈췄다. 형광등 아래서 그의 눈이 뭔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떨렸다.

"그리고?"

"당신이 두려워할 거라는 것. 당신이 다시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릴 거라는 것."

준호가 지은의 눈을 봤다.

"이번엔 당신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라는 것. 그게 가장 무서워요."

"뭘 구한다고요? 당신은 이미 충분해요. 당신 혼자로도."

지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충분하지 않아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일 그 집에 가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니까요. 당신의 꿈, 당신의 일, 당신의 미래. 어머니는 당신을 완전히 부숴버릴 거예요. 그리고 나는..."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당신을 지킬 수 없어요. 지금 나는 경영권을 잃을 위기에 있고, 형이 날 짓누르고 있고, 어머니는 당신을 제거하려고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지은이 준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이제는 준호가 손을 빼려고 할 정도로.

"당신은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해요.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해요. 그런데 준호, 그게 바로 내 병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 둘 다의 병이에요."

"뭘 말하는 거예요?"

"내일 10시에 나는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만나요. 내 라이센스를 지키기 위해. 내 클라이언트들을 지키기 위해."

지은이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목소리는 점점 안정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선택하기 위해서."

상담실의 불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더 오래 어둠이 지속됐다. 그 어둠 속에서만 준호가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내를 구한다면, 나는 당신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요. 그럼 우리는 영원히 이 악순환에서 못 벗어나요. 하지만 우리가 각자 자신을 선택한다면? 그럼 우리는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어요. 약한 것도, 강한 것도 아닌. 그냥 인간으로서."

준호가 지은의 얼굴을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내일 내가 당신의 어머니를 만날 때, 나는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그 두려움은 나의 것이에요. 당신의 책임이 아니에요. 알겠어요?"

지은이 준호의 손을 놓았다. 이번엔 준호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지은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일 회사에서 형과 어머니를 만날 때, 당신도 두려울 거예요. 그 두려움도 당신의 것이에요. 내 책임이 아니에요."

"네."

준호가 대답했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전쟁을 치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전쟁에서 우리가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지은이 상담실의 벽을 봤다. 여전히 몇 개의 포스트잇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것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포스트잇들이 떨어져 내렸다.

"누가 나를 구할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까?"

"나는 왜 계속 약할까?"

마지막 포스트잇에는 다른 글씨로 쓰여 있었다. 지은 자신의 글씨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남겨놓은 것 같았다.

"당신이 없으면 난 못 살아요. 감사합니다."

지은이 그것을 봤을 때,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이게 누가 쓴 거죠?"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누군가 남겨놓은 것 같은데... 어쩌면 내가 쓴 걸 수도 있어요. 내가 내 자신에게."

지은이 그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비틀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예요. 이제는 '나 없으면 난 못 살아'가 아니라 '나 있으면 난 살아'라고 쓸 거예요."

준호가 지은의 옆에 섰다. 어깨가 거의 닿을 정도로.

"당신 혼자 할 수 있어요?"

"네.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는 거고, 할 거예요."

"혼자가 아니에요."

준호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구하지 않겠지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잊지 말아요. 그건 약함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서로를 선택했다는 증거예요."

지은이 준호를 봤다. 형광등 아래서 그의 얼굴이 더 이상 냉정해 보이지 않았다. 뭔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감정이 들어온 얼굴이었다.

지은이 벽에 새로운 포스트잇을 붙였다. 노란 종이에 검은 글씨로.

"나는 나를 선택한다."

그것을 붙인 후, 지은은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문장을 바라봤다.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서윤이 들어섰다. 숨을 헐떡이며.

"뭐 해? 내가 몇 번을 전화했는데."

서윤이 지은을 봤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아. 뭔가 일 있나?"

"네."

지은이 대답했다.

"큰일이."

"뭔데?"

"내일 오전 10시에 준호 그룹 회장모와 만나야 해. 그 전에 준호 그룹 이사회에 문제가 터질 거야."

서윤이 지은의 손을 봤다. 그리고 준호의 손을 봤다. 손을 놓고 있었다.

"너희가 손을 놓는다는 건 뭐라는 뜻인데?"

"뜻은..."

지은이 말을 멈췄다. 준호가 서윤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이제 각자의 발로 서 있다는 뜻이에요."

서윤이 지은을 봤다.

"넌 뭘 선택한 거야?"

"나 자신을 구하는 것."

지은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은 거죠."

준호가 지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유하는 손이 아니라, 함께하는 손으로.

서윤이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럼 내일을 대비해야겠네. 너 혼자는 못 버텨. 나도 같이 가."

"어디에요?"

"이미영 만나는 데. 넌 혼자면 또 누군가를 구하려고 할 테니까."

서윤이 지은의 다른 손을 잡았다. 이제 지은은 양쪽 손에서 다른 온기를 느껴야 했다. 한쪽은 준호의 것이고, 한쪽은 서윤의 것이었다.

"그럼 준호는?"

서윤이 물었다.

"준호는 뭘 할 거야?"

"회사로 가야 해요."

준호가 대답했다.

"형을 만나야 해요."

"형이 뭘 할 것 같아?"

"모르겠어요. 하지만 형도 두려워할 거예요. 내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준호가 지은을 봤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것처럼, 나도 형에게 보여줘야 해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게 가능할까?"

서윤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자신을 선택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은이 준호의 눈을 봤다. 그 안에 처음으로 진정한 감정을 봤다. 두려움도, 희망도, 그리고 결심도.

"그럼 우리는 내일 각자의 전쟁터로 가는 거네요."

지은이 말했다.

"네."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에요."

상담실의 불이 다시 깜빡거렸다. 밝음과 어둠이 교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밝게 켜졌다. 형광등이 안정적인 빛을 내보냈다.

세 사람이 그 빛 속에 서 있었다.

지은의 양손에는 준호와 서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상담실의 벽에는 이제 한 개의 포스트잇만 남아 있었다.

그것에는 새로운 글씨로 쓰여 있었다. 지은의 글씨였다.

"나는 나를 선택한다."

지은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미완성의 문장.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내일 10시, 나는 그 선택을 지킬 거예요."

준호의 손이 지은의 손을 놓았다. 천천히. 마치 확인하듯이. 지은이 두 손으로 포스트잇을 들었다. 그리고 벽에 다시 붙였다.

"내일 10시."

준호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각자의 선택을 증명하는 시간."

지은은 포스트잇을 바라봤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감이 올라왔다. 내일이 정말 올까. 내일 10시에 자신이 정말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을까. 준호는 정말 형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이후는?

준호가 지은의 표정을 봤다.

"두려워요?"

"네."

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일이 올까봐."

"내일은 온다."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날을 견뎌낼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

"당신은요?"

"나도 견뎌낼 거예요."

준호가 상담실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멈췄다.

"당신이 내일 10시에 그 집에 들어갈 때, 나는 회사에서 형을 마주보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기억할게요."

지은이 대답했다.

"나도 당신이 회사에서 형을 만날 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거예요."

준호가 상담실을 나갔다. 복도의 불빛이 그의 뒷모습을 삼켰다.

지은은 여전히 포스트잇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선택한다."

그 문장 아래에 뭔가를 더 쓰고 싶었다. 하지만 쓸 말이 없었다. 그 문장만으로 충분했다.

서윤이 지은의 어깨를 잡았다.

"내일 10시. 우리가 함께 그 집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나 자신을 위해 싸울 거고, 나는 당신 옆에서 당신이 자신을 지키는 것을 지켜볼 거야."

"고마워요."

지은이 중얼거렸다.

"감사 말고, 자신을 선택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서윤이 웃었다.

상담실의 불이 한 번 더 깜빡거렸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켜졌다.

벽에 붙은 포스트잇이 형광등 아래서 노란 빛을 냈다.

"나는 나를 선택한다."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은과 서윤이 눈을 마주쳤다.

"누구죠?"

서윤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지은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지은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박준영입니다."

준호의 형이었다.

"내일 10시. 당신이 우리 집에 가기 전에, 나와 먼저 만나고 싶습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