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계약의 균열

이사회 회의실의 온도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준호 그룹 본사 35층, 긴 테이블 양쪽에 앉은 이사진들의 시선이 모두 준호에게 쏠렸다. 박준영이 입을 열었다.

"지난 분기 실적을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금융 부문 수익률이 전년 대비 12% 하락했고, 부동산 프로젝트는 일정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박준영이 자료를 넘겼다.

"강남역 복합개발 프로젝트는 초기 예산을 30% 초과했습니다. 형이 도시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지역 주민 보상에 과도하게 책정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시티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 검증 단계에서 성급하게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고, 결과적으로 손실을 입었습니다."

박준영이 한 장의 자료를 더 펼쳤다.

"이 모든 결정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감정입니다. 형의 최근 판단들은 과거와 다릅니다. 비즈니스에 있어서 감정은 독입니다."

회의실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사들 중 누구도 박준영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준호는 자신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형을 믿습니다. 하지만 최근 경향을 보면 형의 판단력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박준영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형을 걱정하는 표정이 있었다. 하지만 눈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승리의 예감. 자신도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형의 감정을 무기로 삼는 그의 계산.

"회사를 위해서, 형을 위해서 실질적인 경영진 교체를 제안합니다."

그 말이 나온 순간, 준호가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 나갔다. 테이블을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나는 약해지지 않았다."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준호는 천천히 앉았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움직임 자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사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박준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떴다.

준호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신이 방금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감정적인 반응. 그리고 그것이 회사를 위협한다고 이사들이 읽었다는 것.

회의가 끝났다. 박준영은 준호를 따라나가며 팔짱을 꼈다.

"형, 좋은 결정 내려. 상담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회사를 살리는 길이야."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준호는 지은을 바로 찾지 않았다. 거실의 창밖으로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빛들이 흐릿해 보였다.

지은이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준호의 뒷모습을 보고 멈췄다.

"이사회에서 박준영이 내 경영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준호의 음성은 평탄했다. 하지만 지은은 알았다. 그것이 제어된 음성이라는 것을. 감정을 누르고 있는 음성이라는 것.

"강남역 복합개발에서 예산을 초과했고, 스마트시티 투자에서 손실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감정적으로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감정이 회사를 위협한다고."

준호가 돌아섰다. 지은은 그의 얼굴을 봤다.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눈이 말하고 있었다. 불안이 눈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내 감정 표현이 회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은이 한 발 다가갔다.

"당신은 진정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약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준호가 끊었다.

"이사회에서 내가 반응했을 때, 모든 사람이 내 약함을 봤습니다. 박준영이 원하던 바가 그것입니다. 나를 약해 보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는 성공했습니다."

준호가 창가로 돌아갔다. 지은은 그의 옆에 섰다.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벽이 이미 세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미영이었다.

"상담실에서 만나겠습니다."

지은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음성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강북의 골목 상담실. 이미영은 지은보다 먼저 와 있었다. 앉지도 않고 지은을 바라봤다.

"당신이 내 아들을 파멸시키고 있습니다."

이미영이 말했다.

"제 아들은 준호 그룹의 경영자입니다. 감정은 경영의 독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감정을 깨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회사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은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그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인간입니까?"

이미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따뜻하지 않았다.

"내 아들은 이미 인간입니다. 그는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진 인간입니다. 능력, 지위, 부. 오직 감정만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미영이 지은에게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어린 시절 준호와 그의 아버지. 준호의 아버지 얼굴은 흐릿했다.

"내 남편은 감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감정적인 결정들이 회사를 무너뜨렸습니다. 그것이 내가 준호에게 가르친 첫 번째 교훈입니다. 감정은 약함이라는 것."

이미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계약을 끝내세요. 내 아들을 놓아주세요.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지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영의 말이 자신 안에 박혔다.

펜트하우스로 돌아간 지은이 준호를 찾았을 때, 준호는 이미 침실 문을 닫고 있었다.

그 밤, 지은은 거실에서 기다렸다. 준호가 나올 때까지. 새벽 3시, 준호가 마침내 거실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상담을 거부하겠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당신과의 상담이 필요 없습니다. 당신과의 모든 대화가 필요 없습니다."

지은이 일어났다.

"당신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사회에서 당신이 보인 반응이 그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회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준호가 지은을 마주봤다. 그의 눈은 이미 어두웠다.

"내가 감정을 느낄 때마다 회사가 흔들립니다. 이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파멸입니다."

"그렇다면—"

지은이 한 발 가까워졌다.

"당신이 감정을 느끼면서 회사가 흔들렸나요? 아니면 당신의 형이 당신을 흔들고 있는 건가요?"

준호가 멈췄다. 진짜로 멈춘 것이었다.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열렸다 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박준영이 형이 아니라 정부인가요?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경쟁자인가요?"

지은이 계속했다.

"당신의 감정이 회사를 무너뜨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형이 당신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것을 감정이 약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준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하지만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불명확했다. 자신을 향한 것일까. 박준영을 향한 것일까. 지은을 향한 것일까.

"당신은 내 상담사입니다. 나의 감정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탄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 평탄함은 무감정이 아니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힘이었다.

"내가 당신을 고용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준호가 돌아섰다.

"당신은 나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패턴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지은에게 박혔다. 칼처럼.

"내 형이 나에게 전화했습니다. 1시간 전입니다."

준호가 침묵 속에서 말했다.

"당신과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면 경영권을 박탈하겠다고 했습니다. 보드 멤버들은 이미 그의 편입니다. 이사회 표결이 내일 오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은이 숨을 쉬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야 합니다."

준호가 말했다.

"당신과의 계약을 종료합니다. 내가 감정을 느낀다면, 나는 회사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사를 지킬 수 없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당신입니다."

지은이 말했다.

"당신은 회사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나는 회사가 아닙니다. 나는 회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준호가 침실 문으로 향했다.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것은 끝이었다.

지은은 혼자 남겨졌다. 펜트하우스의 거실에서. 야경 밖의 불빛들이 흐릿했다.

이미영의 말이 떠올랐다. 서윤의 목소리도. '너는 항상 남을 구하려고만 해. 누군가가 너를 구할 때는 언제야?'

지은은 벽에 기댔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다른 생각이 밀려왔다.

준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것이 구원이 아니었다는 것. 상호성이었다.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같았다.

준호가 자신을 떠나기로 선택했다면,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을 할 것인가.

휴대폰이 울렸다. 상민이었다.

"박준영이 내일 보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경영권 변동 표결입니다. 준호는 알고 있습니까?"

지은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임이 바뀌었습니다."

상민의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결연함. 혹은 분노.

"지금까지 박준영은 준호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상민이 침묵했다. 지은은 그 침묵 속에서 상민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는 박준영의 의도를 이미 파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경영권 탈취를 위한 계획입니다. 강남역 프로젝트의 실패도, 스마트시티 투자의 손실도 준호를 약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무대 장치였습니다. 박준영은 준호의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고, 그것을 이용해 이사회를 움직였습니다."

지은의 심장이 빨라졌다.

"준호가 당신 곁에 있으면 준호는 이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면 준호는 질 것입니다. 그것이 박준영이 원하는 것입니다."

"준호가 저와 계약을 끝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준호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선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상민이 끊었다.

지은은 거실에 남겨졌다. 펜트하우스의 야경 앞에서. 선택의 무게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준호는 자신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 하지만 그것이 정말 회사를 지키는 방법일까. 아니면 자신을 더 깊이 무너뜨리는 방법일까.

지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침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침실 문이 여전히 닫혀 있었다. 지은은 문 앞에 섰다.

"내일 이사회에 함께 갑시다."

침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은 알았다. 준호가 듣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박준영이 당신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감정이 회사를 흔들린 게 아닙니다. 당신의 형이 회사를 빼앗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침실 문이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변했다. 침묵의 질감이. 그 안에 있는 감정의 온도가.

"당신이 나를 구하는 게 아니고, 내가 당신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선택하는 겁니다."

지은이 말을 마쳤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준호가 거기 있었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은 젖어 있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분노였다. 슬픔이었다. 그 아래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결연함. 혹은 두려움을 딛고 서 있는 용기.

"당신이 옆에 있으면 나는 이길 수 있습니까?"

준호가 물었다.

지은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2화에서 계약서에 서명할 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떨림이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의 떨림이었다.

"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지은이 말했다.

그리고 새벽의 펜트하우스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진정한 계약을 맺었다. 월급도 없고, 계약서도 없는. 단지 서로를 선택하는 계약.

하지만 그것이 가장 강력한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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