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상담실의 공기가 걸쭉해졌다. 창문 너머 강북의 저녁이 붉게 물들고 있었는데, 그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빠져나갔다. 반복되는 움직임, 마치 파도처럼. 나는 준호가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서윤이 항상 말하던 것처럼—침묵을 견디는 것도 공감의 일부라고.
"제 아버지는 감정 때문에 회사를 잃었습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아래 무언가 떨리는 게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손을 봤다.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이 서서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버지는 감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모임에서 웃고, 집에서는 울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그걸 약함이라고 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불리한 약함이라고."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기록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제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중요한 회의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어머니는 계속 반복했어요. 그 감정적인 결정이 얼마나 회사에 손실을 입혔는지. 아버지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는지."
준호가 마침내 나를 봤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과거를 따라가려는 듯이.
"그 이후로 저는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 하지만 그것이 전부를 설명했다.
"아버지를 봐야 할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는 '약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회사도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저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기로."
나는 호흡을 천천히 했다. 그의 말이 나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제게 매번 말씀하셨거든요. '당신의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 때문에 모든 걸 잃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울고 돌아오면 약한 거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도 표현하면 안 되는 거고, 두렵거나 외로워도 그런 감정은 없는 척해야 하는 거였어요."
준호가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배웠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아무도 나의 약함을 이용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멈췄다. 내 눈을 직시했다.
"저는 아버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처럼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감정을 버렸습니다. 완전히."
상담실의 벽에 붙어있는 포스트잇들이 떠올랐다. 상담자들이 써준 감사의 말들. 나는 그것들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한 일은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더 들춰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준호를 구하려고 했다. 다시 한 번.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자신을 잃어갈 것이다.
"저는 당신을 구하려고 했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당신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호가 몸을 앞으로 굽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닙니다. 당신은 제 상처를 더 깊게 파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제 상처에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의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저는 평생 동안 이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외로움인지,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구분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말해줬어요. 그것이 '외로움'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나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그것 때문에 내가 약한 게 아니라 인간다운 거라고."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눈물이었다.
"당신도 두려워하나요?"
준호의 질문이 나를 관통했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못했는데, 준호가 나를 기다렸다. 그는 내 침묵을 존중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네. 저는 제 감정이 타인을 힘들게 할까봐 두려워해요. 제가 약해 보일까봐, 제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우선시했어요. 내 감정은 감춰두고, 남의 감정만 읽고, 남을 구하는 데만 집중했어요."
준호가 나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왜요? 왜 자신을 그렇게 대합니까?"
"내가 충분하지 않으면 누군가 나를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내 목구멍이 조여왔다. 내가 평생 숨겨온 진실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남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정작 내 자신의 감정은 외면하고 있었다. 내 손이 떨렸다. 준호의 손이 그 떨림을 감싸 안았다.
"당신은 충분합니다."
준호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의 감정이 타인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감정은 정당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약함 때문에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완전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무감각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아래 있던 진실한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준호가 일어섰다. 상담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았다.
"준호."
그가 돌아봤다.
"당신의 형과 어머니는 당신이 감정을 배우는 것을 반대할 겁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감정을 드러낼수록 그들은 당신을 약하다고 볼 것 같아요. 준비가 되셨나요?"
준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이 상담실 전체를 밝혔다.
"당신이 함께라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의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내가 다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준호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다시 갇혀가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거짓말했다. 하지만 뭔가가 깊숙이 잘못되고 있었다. 나는 준호를 구원하려고 했다. 다시 한 번.
준호의 손이 나의 뺨을 스쳤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당신이 우리를 구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함께 걸어가야 해요. 당신이 나를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선택하는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그 밤, 준호가 간 후 나는 상담실에 혼자 남았다. 포스트잇들은 여전히 벽에 붙어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영이었다.
"아 맞다. 당신이 누구였지. 우리 형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여자."
박준영의 음성이 상담실을 침범했다.
"형은 지금 뭘 하고 있어?"
"준호는 감정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당신을 위협하나요?"
박준영의 웃음이 들렸다. 차갑고 예리한 웃음이었다.
"위협? 아니지. 그건 약함이야. 그리고 약한 놈은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강하게 만들려고 하나요?"
"강하게? 아니지. 내 일은 이 회사를 지키는 것뿐이야. 형이 감정에 빠져 의사결정을 흐리는 순간, 이사회는 경영권 재편을 논의할 거야. 이미 움직임이 시작됐어. 주가 조작, 내부 고발, 모든 게 준비됐다고."
"구체적으로 뭘 하려고..."
"아직은. 당신이 형을 더 약하게 만들면, 우린 더 빠르게 움직일 거야."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박준영의 말을 반복했다. 이사회 긴급 소집, 경영권 재편 논의, 주가 조작. 이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준호가 이겨낼 수 있을까. 자신의 형과 어머니를 상대로, 회사 전체를 상대로.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나는 내려갔다. 집은 아직 멀었다. 나는 걷기로 했다.
거리의 편의점 앞에서 나는 멈췄다. 형광등 아래서 나는 내 얼굴을 봤다. 창백했다. 두렵고 창백했다.
나는 커피를 샀다. 핫 아메리카노.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시간은 밤 11시.
"뭐 해? 아직도 상담실에 있어?"
"아니. 집에 가는 중이야."
"혼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너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 하지 마. 너는 거짓말을 잘 못 해. 목소리에 다 나와."
내 눈이 따끔거렸다.
"서윤..."
"뭐?"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해친다면?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더 깊은 상처로 밀어낸다면?"
전화 너머 서윤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너의 책임이 아니야. 그건... 함께 짊어지는 거야."
"함께?"
"응. 넌 혼자가 아니야, 지은."
전화가 끊겼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쓴 맛이 혀에 남았다. 그런데 그 쓴맛이 나를 조금 깨어나게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준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전의 따뜻함이 사라져 있었다.
"네?"
"당신은 지금 집에 있나요?"
"응. 방금 도착했어."
침묵이 흘렀다.
"제가 당신에게 짐이 되고 있나요?"
그 질문이 나를 깨웠다. 내 어깨가 움찔했다.
"왜 그런 말을..."
"박준영이 전화를 했습니다. 당신과 통화했다고. 당신이 그 전화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이미 압박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준호..."
"상민이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감정 결핍증의 가장 위험한 순간은 감정이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그 순간 모든 억압된 감정이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준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얕아지고, 끊겨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감정을 버리려고 할 것이라고."
"준호, 넌 견딜 수 있어."
"정말인가요?"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신도 모르는군요."
"알아. 난 안다. 넌... 넌 충분히 강해."
"강함이 뭔가요?"
그 질문이 나를 멈추게 했다.
"강함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저를 가르쳐준 것처럼."
"난 그렇게 강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전화 너머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불규칙하고 얕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감정이 깨어나는 과정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그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당신이 함께라면, 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난 너를 보호할 수 없어. 나도 나를 보호하기 힘든데, 어떻게 너를 보호해?"
"저는 당신의 보호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그냥. 당신 자체를."
그 말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울었다. 밤 중에, 혼자,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는 울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냥 원하는 것.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지 못해도, 내가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도, 그냥 나를 원하는 것.
"당신이 울고 있나요?"
"응."
"좋습니다."
"뭐가 좋아?"
"당신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나처럼 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나는 웃으면서 울었다. 두려움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절망과 희망이 함께 있었다.
"내일 만날 수 있나요?" 준호가 물었다.
"응. 만날 거야."
"약속인가요?"
"약속이야."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누웠다. 천장을 봤다. 내일은 뭐가 달라질까. 내일도 박준영의 위협이 있을 것이고, 회사 내부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준호는 감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 옆에서 그저 함께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새벽 3시. 나는 아직도 깨어 있었다. 휴대폰을 집었다.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도 자. 우린 함께 이겨낼 수 있어.'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3초 후, 준호의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나서.'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이 단순한 상담 관계나 계약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나의 인생을 바꿀 무언가라는 것을.
하지만 그 변화가 좋은 것일지, 나쁜 것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침이 왔다. 창문을 통해 서울의 햇빛이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봤다. 어제보다 더 창백했다.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결의가 더 많았다.
상담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폰을 켰다. 뉴스가 떴다.
'이준호 회장, 최근 의사결정 능력 저하 우려... 경영진 내부에서 경영권 재편 논의'
준호 그룹의 주가가 5% 하락했다. 박준영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었다. 전화 위협을 넘어 실제 액션이 시작된 것이다. 이사회 소집, 주가 조작, 경영권 재편 논의. 모든 것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깨달았다. 전쟁이 정말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준호가 감정을 배우는 과정이 곧 자신의 회사를 잃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담실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뉴스 기사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봤어?"
나는 물었다.
"네. 봤습니다."
"겁나?"
준호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의지.
"네. 겁납니다."
그 대답이 좋았다. 거짓이 없었다. 그냥 솔직했다.
"그래도 계속할 거야?"
"네."
준호가 한 발 더 나아갔다. 내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저는 제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함께여도, 아니어도."
그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어제의 '당신이 함께라면'과는 다른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몰라."
"정직하네요."
"난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너한테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상담실의 문이 열렸다. 이미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구부러진, 누군가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해온 사진.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사진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