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공감의 대가

펜트하우스의 응접실은 역시나 차가웠다. 회색 대리석 바닥, 검은색 소파, 그리고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 창. 이곳에서 나는 항상 한 가지를 느낀다. 공기 중에 떠도는 고독함.

준호는 소파의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어제 이미영의 전화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평온함 아래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어제 어머니께서 전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침묵은 나를 자극했다. 마치 내가 그 침묵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당신이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당신의 심장은 어떻게 뛰었나요? 목이 조여왔나요? 손에 힘이 들어갔나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준호의 반응을 읽으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의 눈썹, 입 꼬리, 목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모두 포착하려고 했다. 한 가지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밀려왔다.

"당신은 그때 두려웠을 겁니다. 어머니의 반대가 당신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화났을 거 같아요.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지은."

준호의 목소리가 나를 멈추게 했다. 그것은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단호했다.

"숨을 쉬세요."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내 가슴이 얼마나 팽팽하게 조여 있었는지.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내가 지금 준호의 감정을 느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준호의 감정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 그의 외로움이, 그의 두려움이, 그의 답답함이 내 가슴에 층층이 쌓여가는 기분.

이건 다르다. 이건 공감이 아니었다.

"당신이 지쳐 보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자동으로 대답했다. 상담사로서의 습관이었다.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항상 괜찮아야 한다. 흔들리면 안 된다.

"지은."

그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엔 더 낮은 목소리로.

"나를 위해 당신의 감정을 버리고 있나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내가 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준호의 감정에 모든 것을 쏟아붣고 있었다는 것을 이 순간 알았다. 마치 내가 그의 감정을 느껴줘야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명이 되는 것처럼. 마치 내가 그를 구해야만 내 존재가 의미 있다는 것처럼.

"그런 것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내 손을 집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손인지, 아니면 내 손인지 구분이 안 갔다.

"당신이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당신 자신을 느껴보세요. 당신의 감정은 어디 있나요?"

그 말이 떠나간 후, 나는 혼자 남겨졌다.

---

상담실 '감정의 방'은 조용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벽에 붙은 포스트잇들이 나를 맞이했다. 클라이언트들이 쓴 감사의 말들. '고마워요', '선생님이 제 마음을 읽어주셨어요', '저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 포스트잇들 중 몇 개를 집어 들었다.

'누가 나를 필요로 할까?'

'혼자가 아닐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필체가 내 것이었다. 깔끔하고 작은 글씨. 하지만 그 글씨들은 명확하게 내 손으로 적힌 것이 아니었다. 아니, 손으로는 적었지만 마음으로는 적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손을 빌려 쓴 것처럼. 혹은 내가 클라이언트들의 마음을 가져와 내 포스트잇에 붙여놓은 것처럼.

포스트잇을 떼어내려다 손이 떨렸다. 작은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줍지 못했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는 또 그러고 있어."

서윤의 목소리가 뒤에서 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윤, 언제 왔어?"

"너에게 전화를 몇 번 했는데 받지 않아서 왔어. 지난 사흘 동안 너한테 연락이 없었어. 너 뭐 하고 있었어?"

내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 사흘이라고? 나는 준호의 펜트하우스에서 보낸 시간을 세어보려고 했다. 하루가 몇 시간이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클라이언트 상담을 하고 있었어."

"준호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다른 사람들은? 정수, 희진이, 그리고 그 아주머니? 지난주에 자살 충동을 호소했던 그분?"

"그들은..."

"뭐했어?"

서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것을 싫어했다. 동시에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상담 시간을 조정했어."

"조정? 지은아, 너 얼마나 조정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수는 지난주 화요일 상담을 취소했다. 희진이는 다음달로 미뤘다.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윤이 내 앞에 앉았다. 그녀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번엔 다르다고 했잖아. 이번엔 상호적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래? 준호가 너를 위해 뭘 했어? 정말로?"

"그는..."

"뭐? 말해봐."

나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준호가 나를 위해 한 것. 내가 정말로 묻지 않았던가? 그가 나를 도우려고 했던가? 아니면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감정을 쏟아붣고 있었던가?

"너 자신을 본 적 있어? 거울에 비친 너를 본 적 있어?"

서윤의 말이 맞았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내 얼굴은 창백했을 것이다. 내 눈은 침침했을 것이다. 내 손은 떨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너는 항상 남을 구하려고만 해. 누군가가 너를 구할 때는 언제야?"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또 말이 없었다.

---

상담실을 나서는 길이었다. 서윤을 배웅하고 혼자 남겨진 순간, 떠오른 것은 아주머니였다.

지난주 목요일 상담. 아주머니는 테이블 앞에 앉아 손을 비틀고 있었다.

"선생님, 저 정말 죽고 싶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아주머니의 눈을 봤다. 그리고 느껴줬다. 아주머니의 절망을. 아주머니의 외로움을.

하지만 내가 느껴준 것이 정말로 아주머니의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내 감정을 아주머니에게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주머니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정수. 대학 입시에 떨어진 정수는 매주 월요일 상담을 받았다.

"선생님, 저 왜 이렇게 무능한가요?"

정수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 속에서 나 자신을 들었다. 내 목소리를. 내 의심을. 내 두려움을.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수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설득하려는 말이었다.

희진이는 어떨까?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던 희진이.

"누가 저를 도와줄까요?"

희진이가 물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희진이를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도 도울 수 없는데, 어떻게 희진이를 도울 수 있겠는가?

내가 한 일은 도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는 클라이언트들의 감정을 읽어주는 척했지만, 실은 내 감정을 그들에게 투영했다. 나는 그들을 구하는 척했지만, 실은 그들의 필요함 속에서 내 존재를 증명받으려 했다.

그 깨달음은 서늘했다.

---

상담실을 나서려는 찰나, 검은 승용차가 골목 입구에 나타났다.

뒷자리에서 내려온 여인은 우아했다. 검은색 정장, 진주 목걸이, 그리고 차가운 눈빛. 그것이 이미영이었다. 그녀가 이곳을 알아낸 방법은 묻지 않았다. 준호의 어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지은 상담사."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그것은 위협이었다. 마치 내가 누군가를 훔친 도둑인 것처럼.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했다.

"우리 대화를 나눌까요?"

그녀는 내게 차를 타도록 손짓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준호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차 안은 더 차가웠다.

"당신이 내 아들을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영의 첫 마디였다.

"제가 준호님을 약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요? 감정을 드러내도록 부추기는 것이 약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뭡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미영의 눈이 나를 노려봤다. 마치 내가 대항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미영이 계속했다.

"제 남편을 아시나요? 준호의 아버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풍부해서 회사를 거의 망치는 지경까지 갔죠. 감정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했고, 감정 때문에 신뢰를 잃었고, 감정 때문에 회사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았다. 이미영이 두려워하는 것. 감정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때문에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준호가 아버지처럼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 마치 내가 준호를 구하려다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준호는 약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 회사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미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위협적으로.

나는 침묵했다.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것처럼. 아니, 동조하고 있었다. 내가 대항할 힘이 없었다. 내 신념도, 내 의지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이미영의 눈이 예리해졌다.

"당신과는 더 이상 대화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당신이 내 아들을 계속 망친다면, 당신이 얼마나 후회할지 모를 겁니다."

그것이 위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내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이미 누군가를 망쳤을 수도 있다는 것.

---

상담실로 돌아온 나는 벽의 포스트잇들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 내 글씨.

'필요해요.' - 내 글씨.

'누가 나를 구할까?' - 내 글씨.

포스트잇을 떼어낼 때마다 손이 떨렸다. 하나를 떼어내자 다음 것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내가 쓴 글씨들. 클라이언트들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내 것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클라이언트들의 감정을 읽어주고, 그들의 진심을 언어화해주고, 그들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했던 내가, 실은 그들의 감정 속에 내 감정을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감정이 내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남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렇다면 준호는 어떨까?

나는 준호를 정말로 돕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의 감정 결핍이 내 공감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의 외로움이 내 필요성을 증명해주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그 깨달음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무거운 돌이 내 가슴 위에 올려진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포스트잇들이 내 손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준호였다. 펜트하우스를 나온 직후 서윤에게 전화를 받았다. 서윤이 상담실로 향했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왔다. 어두운 밤거리를 헤치고 이곳까지.

그의 얼굴은 진지했고, 그의 눈은 나를 향했다.

"내가 당신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떨어진 포스트잇을 하나씩 주워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상담실의 불을 켜주었다. 어두움이 걷혔다.

"지금부터 이건 계약이 아닙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으로.

"이건 선택입니다. 내 선택이고, 당신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는 내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당신이 날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도울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니까요."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 아버지는 감정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두려워하셨고, 그 두려움이 나를 만들었어요. 감정 없는 사람으로. 하지만 감정이 없다는 건 죽어있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어요."

그가 내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당신이 나를 구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도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단지 나를 봐줬어요. 있는 그대로.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는 건 당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이 자신을 잃고 있다는 거. 그래서 내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감정은 어디 있나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게 뭔가요?"

나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눈물이었다. 준호를 구하기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내가 드디어,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 하는 질문들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이었다.

"나는... 나는 모르겠어요."

내가 겨우 말했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하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찾을 때까지, 내가 옆에 있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준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받아야 해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울음소리가 상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받지 마세요."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아래로 불안감이 흘러나왔다.

"받아야 해요. 준호님을..."

"지은."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눈을 마주봤다.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뭘 하든,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울리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준호와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았다.

"지은, 너는 이제 준호를 다시 만나면 안 된다."

박준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갑고, 결정적이었다.

"내가 조건을 제시한다.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상담실의 모든 클라이언트들의 정보를 공개하겠다. 그들의 약점, 비밀, 모든 것을."

나는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손이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 선택을 기다리는 손이었다.

정수, 희진이, 아주머니. 그들의 비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약함들. 모두가 공개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믿었다. 나는 그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것도 떠올랐다.

내가 그들의 감정을 느껴줌으로써 내 존재를 증명받으려 했다는 것. 내가 그들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하려 했다는 것. 그들의 필요함이 내 필요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박준영의 위협 앞에서도 나는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들을 보호하는 것이 선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형태의 자기기만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상담사라는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 깨달음이 왔을 때, 나는 말했다.

"없습니다."

"뭐라고?"

박준영이 물었다.

"없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했다. 클라이언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당신이 공개하고 싶으면 공개하세요. 하지만 그것도 당신의 선택이고, 이것은 제 선택입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

전화를 끊은 후 상담실은 조용했다. 준호의 손이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뭘 한 거야?"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두려움과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제 선택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처음으로 진실처럼 들렸다.

"당신이 뭘 했는지 알아요?"

준호가 말했다.

"뭘요?"

"당신이 당신 자신을 선택했어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눈물이었다.

"박준영이 정말로 그 정보들을 공개할까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중요하지 않아요."

준호가 말했다.

"왜요?"

"왜냐하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선택했으니까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상담실을 잃을 수도, 신뢰를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도 있었다.

내 자신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것. 그것이 공감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자기기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담실의 조명 아래, 나는 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돼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함께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준호가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약속이 없었다. 보장도 없었다. 단지 함께 가겠다는 의지만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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