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이 펜트하우스에 들어선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준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의 맞은편에서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상담에서 준호가 느낀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벨이 울렸고, 준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형이군요."
준호가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자 준호와 닮은 남자가 들어섰다. 하지만 준호와는 확연히 달랐다. 준호의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 표현의 서툼이 있었다면, 이 남자의 얼굴은 마치 돌상처럼 딱딱하게 경화되어 있었다. 검은색 정장, 완벽하게 고정된 머리, 그리고 어떤 감정도 흘러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눈빛.
박준영이었다.
"형."
준호가 일어나며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박준영은 준호를 지나 나를 봤다. 그의 시선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마치 상품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은입니다. 준호 님의 상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상담사시군요."
박준영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놨다. 악수라기보다는 접촉을 피하는 동작이었다.
"감정 상담?"
그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자체가 이미 답변이었다.
박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입가만 올라갔을 뿐,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형이 약해지는 건가?"
준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는 그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야."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박준영이 거실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상담실은 따로 있지 않나요?"
"펜트하우스에서 더 편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답했다.
박준영이 소파에 앉았다. 그는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집처럼 행동했다.
"형을 구하려고 하지 말아요."
박준영이 갑자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감정은 약함이고, 약함은 전염돼. 형이 지금 감정을 배우고 있다면, 형은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는 자신의 무감정을 마치 자랑처럼 말했다. 준호가 눈을 감았다.
박준영이 나를 봤다. 그의 눈에서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공허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박준영이 일어났다.
"형, 일주일에 몇 번 이 상담을 받나요?"
"주 3회."
준호가 대답했다.
"경영 일정에 지장은 없나요?"
"없다."
박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이 아니었다.
"형을 구하려고 하지 말아."
그가 나를 바라봤다.
"약함은 전염돼. 그리고 형이 약해지면, 회사도 약해져."
그는 휴대폰을 꺼내 내 얼굴을 촬영했다. 카메라 셔터음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당신의 정보를 조사할 거예요. 상담사 자격증, 경력, 가족 관계. 모든 것."
박준영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형이 약해지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필요하면 경영진에게 보고할 자료도 준비해두겠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순간이 왔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차가움 뒤에 숨겨진 어떤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분석하지 않았다. 단지 감지했을 뿐이다.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박준영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형, 조심해. 감정은 독이야."
그가 준호를 봤다.
"그리고 저는 이미 백신을 맞았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준호가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형이 나를 멀리하게 될 거야."
준호가 중얼거렸다.
나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당신이 형을 구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했다.
"형은 이미 자신의 선택을 했으니까요. 대신 당신은 당신 자신을 선택하세요."
준호가 나를 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가능해요?"
"모르겠어요."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
준호가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결심의 떨림이기도 했다.
펜트하우스의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강남의 불빛들은 모두 같은 색이었다. 차갑고 명확하고, 감정 없는 빛. 하지만 거기 서 있는 두 사람의 손은 따뜻했다. 그 따뜻함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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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이 떠난 후, 준호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실루엣은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형이 회사에 보고할 거야."
준호가 중얼거렸다.
"감정 상담사 때문에 경영진이 흔들린다고."
나는 준호의 옆에 섰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준호가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을 펜트하우스에서 내보내야 해요."
"아."
"형이 감시하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형은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나는 침묵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박준영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그는 나를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펜트하우스에서 내보낼 거예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계약은 끝내지 않습니다."
"준호..."
"형이 당신을 추적할 거야. 그 과정에서 당신이 나와 만나면, 그건 형한테 증거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만나지 않는 척해야 합니다."
준호가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형이 감시를 풀 때까지."
나는 준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됐다.
"당신은 형을 포기하신 거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준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제 형과 저는 이미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저는 형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저는 당신을 구할 수 있어요."
"저는 구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거짓이었다. 내가 얼마나 구해질 필요가 있는지,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신은 구해질 필요가 있어요."
준호가 내 눈을 마주봤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구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맺혔다. 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준호가 내 뺨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의 손가락이 따뜻했다.
"언제까지 만나지 않아야 하나요?"
내가 물었다.
"형이 움직일 때까지."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계속 당신의 상담실에 문자를 보낼 거예요. 당신이 저를 잊지 않도록."
"그럼 형은 그것을 발견할 거 아닌가요?"
"네. 그래서 당신이 저를 거절하는 척해야 합니다."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상담실에 제 문자를 무시하고. 형이 감시할 때는 당신이 저를 제거한 것처럼 보여야 해요."
나는 준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말의 의미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게임인가? 거짓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준호, 이건..."
"당신이 저한테 해줬던 말 기억하세요?"
준호가 나를 중단시켰다.
"'내가 너를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선택하는 거야.'"
"네."
"이제 저도 당신을 선택합니다."
준호가 나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저는 당신을 놓아줍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 한 곳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동시에 무언가가 부풀어올랐다. 이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것은 더 이상 계약이 아니었다.
펜트하우스의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강남의 불빛은 여전히 차갑고 명확했다. 하지만 우리의 손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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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트하우스를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눈물로 범벅인 얼굴. 하지만 눈빛은 더 선명했다. 나는 이제 알았다. 내가 준호를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준호와 함께 싸우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이준호: 계약을 종료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상담은 필요 없습니다. 계좌로 잔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한참을 멍했다. 준호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박준영을 위한 연기였다. 하지만 내 가슴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내 가슴은 진짜 이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준호의 지시가 떠올랐다. 침묵. 손가락이 키보드에 닿으려다 멈췄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타인을 구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준호가 나를 구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더 이상 준호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준호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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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나는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클라이언트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당신도 누군가를 구하려고 하나요?"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물었다.
"네?"
"상담사님 표정을 보니까요. 마치 내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도 그래요. 제 남편을 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구해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계속 상처를 받았어요."
클라이언트가 천천히 말했다.
"혹시 당신도 그런 건 아닐까요? 누군가를 구하려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호흡이 얕아졌다. 클라이언트의 말이 정확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상담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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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서윤의 전화가 울렸다.
"지은, 뉴스 봤어? 준호 회사 주가가 떨어지고 있어."
"네?"
"3일 사이에 8% 떨어졌어. 박준영이 주주들한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지금 경영진 사이에서 준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대. '감정 상담을 받으면서 경영 판단이 흐려졌다'는 식의 평가가 나오고 있어."
서윤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호흡음을 들었다.
"그리고 박준영이 당신을 조사하고 있어. 당신의 자격증, 경력, 모든 것. 경영진에게 당신의 정보를 제공했대. 당신이 준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나는 말을 잃었다.
"지은? 당신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거짓이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 준호 회사가 흔들리고 있어. 박준영이 주주들한테 준호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대. 만약 준호가 CEO에서 물러나면..."
"그럼 준호는 어떻게 하나요?"
내가 물었다.
"모르지. 하지만 준호가 당신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상황은 더 악화될 거야. 박준영은 당신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어."
나는 준호의 말을 생각했다. '형이 감시를 풀 때까지.' 하지만 형은 감시를 풀지 않고 있었다. 형은 더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지은, 당신이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준호와 관계를 끊어. 그게 준호를 위하는 거야."
서윤이 말했다.
"이미 끊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준호가 어제 계약을 종료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야."
서윤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박준영은 계속 당신을 조사할 거야. 당신이 준호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증명하기 위해서."
전화가 끝났다.
나는 상담실의 창밖을 봤다. 저녁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강남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빛들은 모두 같은 색이었다. 차갑고 명확하고, 감정 없는 빛.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이준호: 계약을 종료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상담은 필요 없습니다. 계좌로 잔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이 메시지가 진짜 이별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박준영은 이것을 진짜 이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준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준호를 생각했다. 펜트하우스에서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회사에서 주가 하락을 지켜보고 있을 그를. 형의 공격을 버티고 있을 그를.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준호가 나를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를. 나는 그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을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이었다.
나는 준호를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