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서윤이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은아, 진짜?"
상담실 문을 닫기 전에 이미 그 한숨은 나와 있었다. 나는 서윤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준호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월급을 받고 감정을 가르치는 일. 계약. 펜트하우스.
"진짜 하려고?"
"응."
"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내 침묵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1인 심리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나와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흡수했고, 서윤은 타인의 감정을 거리 두고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넌 자기 감정이 뭔지 알아?"
"무슨 말이야."
"너는 항상 남을 구하려고만 해. 누군가가 너를 구할 때는 언제야?"
서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정확했다. 마치 스스로 쓴 진단서를 읽는 것 같았다.
"이준호라는 남자가 너한테 뭘 하든 간에, 넌 그걸 자신을 증명하는 기회로 만들 거야. 넌 항상 그래. 누군가를 구원해야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껴."
내 목에 무언가 걸렸다. 서윤은 계속했다.
"그 남자가 감정이 없다고? 그럼 더 위험해. 넌 그런 사람한테 더 끌려."
"서윤."
"뭐."
"나는 괜찮아."
그것은 거짓이었다. 서윤이 그것을 알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내 눈을 봤다. 그 눈동자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는 봤어?"
"아직."
"봐.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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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법무팀이 만든 계약서는 두 장이었다. 종이가 하얀색에서 약간 크림색을 띠었고, 글씨는 9포인트의 고딕체였다. 법적 효력이 없다는 조항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제1조. 본 계약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쌍방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
그 아래에는 지은(을)이 이준호(갑)에게 감정 표현 교육을 제공하고, 갑이 월급 3천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3천만 원. 내 1년 상담료가 그 정도였다.
**제3조. 을은 갑의 모든 질문에 거짓 없이 답변할 의무를 진다.**
**제4조. 갑은 을의 감정 표현을 판단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
준호가 나를 바라봤다.
"문제 있으세요?"
"없는데... 이게 정말 계약서일까요?"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계약입니다."
준호가 펜을 집으려 할 때, 그의 손이 떨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손가락이 펜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손목의 근육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1초도 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포착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신호였다.
"손이 떨렸어요."
준호가 멈췄다.
"아니에요."
하지만 이미 그의 눈이 변했다. 무언가를 인정하려는 눈. 그것을 부인하려는 눈. 두 가지가 겹쳐 있었다.
"감정 결핍증이 있으신 분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의 신체는 이미 반응하고 있어요."
준호가 펜을 다시 집었다. 이번에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힘을 줬다. 그 긴장감이 더 명확한 증거였다.
서명은 한 번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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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의 거실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아니, 따뜻해 보이려고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회색 소파, 검은 테이블, 흰 벽. 모든 것이 정렬되어 있었다. 어떤 감정도 새어나갈 틈이 없을 정도로.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나는 소파에 앉으면서 준호를 마주봤다.
"감정이란 뭘까요?"
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이요?"
"네. 당신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정의해야 해요."
내가 일어났다.
"따라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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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의 골목은 강남과 다른 냄새를 풍겼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집, 빨래를 말리는 베란다, 아이들의 목소리. 모든 것이 불완전했고, 모든 것이 살아있었다.
상담실 '감정의 방'은 2층 건물의 한쪽 모퉁이에 있었다. 준호가 문을 열며 천천히 들어왔다.
"여기가?"
"네."
벽은 연분홍색이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수십 개, 수백 개. 글씨는 각양각색이었다.
'고마워요' '살고 싶어요' '혼자가 아니군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계속하고 싶어요'
준호가 포스트잇들을 천천히 읽었다.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감정의 데이터군요."
"뭐라고요?"
"상담자들의 감정 표현을 수치화하면, 긍정 감정이 약 70%, 부정 감정이 약 30%입니다. 이것은 심리 치료의 효과를 증명하는 데이터입니다."
내 목소리가 나왔다. 차갑고 선명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내가 한 장의 포스트잇을 가리켰다. 글씨는 흔들렸다. 아주 가는 선으로 쓰인 글씨였다.
'살고 싶어요'
"이 글씨를 보세요. 이건 데이터가 아니라 절망이에요. 이 사람은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손을 잡아줬고, 이 메모를 남겼어요."
준호가 그 포스트잇을 들었다. 손가락이 글씨 위에서 멈췄다.
"이건 인간입니다. 데이터가 아니라."
"그렇다면 감정이란 뭐죠?"
준호의 질문이 나를 멈추게 했다.
"감정이요?"
"네. 당신이 말하는 인간의 감정이란 뭐죠? 신경신호일 뿐 아닙니다. 뇌의 화학 반응입니다. 그걸 어떻게 데이터가 아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논리적이었다. 완벽히 방어된 요새처럼.
"좋은 질문이에요."
나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감정은 신경신호이자 동시에 인간입니다. 뇌의 화학 반응이면서도 영혼의 울음입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둘을 나누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감정은 나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감정을 느끼나요?"
준호가 반문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뭘 느끼고 있어요?"
내가 침묵했다. 그것이 내 대답이었다.
"당신도 모르는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가르칠 수 있죠?"
준호가 포스트잇을 내 손에 돌려줬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그것을 따라가고 있었다.
"당신이 왜 나를 고용했어요?"
준호가 침묵했다.
"효율성 때문입니다."
"정말요?"
"..."
"당신이 나를 고용했을 때, 손이 떨렸어요. 펜을 들 때, 계약서에 서명할 때. 당신의 신경신호가 당신의 뇌에 신호를 보냈어요. 그 신호가 뭐라고 생각해요?"
"..."
"두려움이에요. 혹은 기대. 혹은 둘 다. 당신은 그것을 느끼고 있어요.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으로. 당신의 몸이 이미 알고 있는데, 당신의 마음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에요."
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상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감정 교육의 첫 번째 원칙은 이거예요. 당신이 느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당신의 신체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것은 밤 열시였다. 서울의 야경은 더 밝아져 있었다. 준호는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당신은 제 모든 질문에 거짓 없이 답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첫 질문을 하겠습니다."
나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필요로 느꼈나요?"
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과거를 향해.
"모르겠습니다."
"정말요?"
"네."
오래 기다렸다. 준호의 입이 열리려는 듯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나올 때, 그의 목이 움직였다. 음식을 삼키는 것처럼.
나는 일어났다.
"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준호가 나를 바라봤다.
"그 침묵 자체가 당신의 감정입니다. 당신은 이미 느끼고 있어요. 당신이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준호의 표정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입가의 근육이 떨렸다. 눈가에 그림자가 생겼다. 이것이 감정의 신호였다.
계약서에 양쪽이 서명한 후, 준호가 나를 따라 현관으로 나왔다.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간청에 가까웠다.
"네."
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미 내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준호를 구하려는 욕망 안에서 내 감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준호의 눈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눈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준호가 문을 열었다. 밤거리가 보였다.
"내일은요?"
"내일도 올게요."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서윤의 말이 들릴 것 같았다.
'누가 너를 구할 때는 언제야?'
그 말은 아직도 내 목에 걸려 있었다.
펜트하우스의 불이 꺼졌다. 준호는 창가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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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 나는 준호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거실의 소파는 어제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준호도 어제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치 밤새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은 뭘 배우나요?"
준호가 물었다.
"감정의 이름을 붙이는 법이에요."
나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것을 말해보세요."
"특별히 느끼는 게 없습니다."
"거짓이에요. 당신의 손가락이 소파의 팔걸이를 누르고 있어요. 당신의 호흡이 얕아졌어요. 당신의 눈이 나를 피하고 있어요. 이것들이 뭘까요?"
준호가 침묵했다.
"불안이에요. 당신은 지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느껴보세요. 당신의 가슴 안에서."
"..."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다릅니다. 당신은 이미 느끼고 있어요. 이제는 그것을 인정하고, 이름을 붙여야 해요."
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안... 합니다."
"좋아요. 그게 첫 번째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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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후, 준호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떻게 감정을 배웠어요?"
나는 준비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뭐요?"
"당신은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어요?"
"저는... 상담을 받으면서 배웠어요."
"누구에게서요?"
"제 엄마가 아팠거든요. 정신질환이 있었어요. 저는 그걸 치료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치료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저처럼 누군가를 구하려고 했던 거네요."
준호의 말이 나를 관통했다.
"당신은 엄마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 나를 구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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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 나는 준호의 펜트하우스에 가지 않았다. 대신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은아, 뭐 해?"
"서윤, 나... 잘못 생각했어."
"뭘?"
"이 계약. 나는 준호를 구하려고 했는데, 사실 나를 구하려고 했던 거야."
서윤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깨달았어?"
"응."
"그럼 이제 어떨 거야?"
"모르겠어. 근데 계속해야 할 것 같아. 준호도 변하고 있고, 나도 변하고 있어."
"위험해."
"알아."
"그 남자가 너한테 상처 줄 수도 있어."
"알아."
"그래도 할 거야?"
나는 침묵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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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준호가 처음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당신이 어제 오지 않았을 때, 저는 화났어요."
나는 소파에 앉았다.
"화났어요?"
"네. 당신이 저를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당신도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떠날 거라고."
"준호..."
"그리고 동시에 두려웠어요.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이건 약함이에요. 약함을 느끼는 게 싫어요."
준호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제 명확했다.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저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군요. 당신도 약한 사람이군요."
"네."
내가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도 약해요. 나도 누군가를 필요로 해요."
"그렇다면 이 계약은 뭐죠?"
준호가 다가섰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준호..."
"정말요?"
그의 분노는 계속됐다. 나는 그것을 견디려 했다. 그의 화난 얼굴을 바라봤다. 입술이 떨렸다.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눈은 나를 놓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고용했을 때, 손이 떨렸어요. 펜을 들 때, 계약서에 서명할 때. 당신은 효율성 때문에 나를 고용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에요?"
"두려움 때문이에요. 혹은 기대. 당신도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어요. 당신도 나처럼 외로웠어요."
"지은..."
"우리가 서로를 구하는 거예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배우는 거예요."
준호가 멈췄다. 그의 분노가 천천히 사라졌다. 입술이 떨렸다. 눈가가 붉어졌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도...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어요."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어요. 제 엄마를 구하지 못했어요."
눈물이 흘렀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감정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제 당신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함께 배우는 거예요. 구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예요.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완벽하게 구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우리는 함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이미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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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준호가 처음으로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대신 문자가 왔다.
'오늘은 당신의 상담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감정의 방'을 정리했다. 벽에 붙은 포스트잇들—'고마워요', '살고 싶어요', '사랑해요', '혼자가 아니구나'. 이것들은 내 상담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일부는... 내가 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상담자인데 동시에 내가 상담받는 그런 포스트잇들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준호는 정각 5시에 도착했다.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펜트하우스에서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호기심. 아니, 불안이었다.
"여기가 '감정의 방'이군요."
그는 천천히 걸어다녔다. 책장을 살폈다. 상담 사례집, 심리학 서적, 그리고 내가 직접 정리한 노트들. 그의 눈이 벽의 포스트잇에 멈췄다.
"이것들이 뭐예요?"
"제 상담자들이 남긴 말들이에요."
"모두가요?"
"네."
준호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한 장씩 읽기 시작했다.
"'죽고 싶었는데 살아도 될 것 같아요.'"
그가 읽었다.
"'엄마가 날 안아줬어요. 처음으로.'"
다시.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또.
준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이 포스트잇들 중에 당신이 쓴 게 있어요?"
"뭐요?"
"당신이 쓴 거요."
나는 침묵했다.
"당신도 상담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건 저의 상담실이에요. 저는 상담사예요."
"그게 핑계는 아닐까요?"
준호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당신이 나를 구하려고 하는데, 누가 당신을 구하나요?"
그 질문이 나를 관통했다. 마치 화살처럼. 내가 이 계약에서 준호를 '구하는' 위치에 있다고 믿었던 나의 확신이 흔들렸다.
"그건..."
"당신이 나에게 묻는 질문들을 당신 자신에게 물어본 적 있어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필요로 느꼈을 때가 언제였어요?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뭐예요?"
"준호..."
"당신은 나를 거울로 보고 있어요. 하지만 거울에 비친 건 나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아닐까요?"
나는 뒤로 물러났다. 상담 소파에 앉았다. 준호는 내 앞에 섰다. 처음으로 내가 아래에 있었다. 그가 위에 있었다.
"이 계약이 정말 나를 치료하는 건지, 아니면 당신 자신을 치료하려는 건지... 당신도 모르는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거짓이에요."
준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당신이 자신을 잃어가고 있으니까. 당신이 나를 구하려는 척하면서 실은 자신을 구하려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내 가슴이 철렁했다. 서윤의 말이 떠올랐다.
'누가 너를 구할 때는 언제야?'
그리고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네'라고 대답했을 때, 나는 이미 자신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입을 열었을 때, 나의 목에 뭔가가 걸렸다. 눈물이었다. 처음으로 계약 이후 흘리는 눈물이었다.
"당신이 저를 구할 수 있어요?"
준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분노가 사라졌다. 눈가가 붉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그가 속삭였다.
"당신을 구하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나왔을 때, 준호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것이 감정이었다. 진정한 감정이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어요."
준호가 말했다.
"제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어요. 제 엄마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럼 우리는 뭐죠? 서로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난 거예요?"
"아니에요."
나는 일어났다. 준호를 바라봤다.
"우리는 함께 배우는 거예요. 구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예요."
나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나를 구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완벽하게 구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우리는 함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이미영'이었다.
내 손이 멈췄다. 준호도 멈췄다. 전화벨이 울려 퍼지는 상담실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알았다. 무언가가 끝나려 한다는 것을. 무언가가 시작되려고 한다는 것을.
준호가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받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이미 받았다.
"지은 씨, 우리 준호가 당신과 뭘 하는 건가요?"
이미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목소리 뒤에는 명확한 위협이 있었다.
"당신이 우리 아들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하세요. 계약을 깨세요."
"저는..."
"아니면 당신이 후회할 일을 만들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준호가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엄마가..."
"네. 알아요."
나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제 명확했다.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 그것이 감정이었다. 진정한 감정이었다.
"우리가 계속할 수 있을까요?"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네. 계속하자."
내가 말했다.
"당신의 엄마와 마주할 준비가 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