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강남-강북

강남 펜트하우스의 창을 통해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이준호는 비즈니스 미팅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마주앉은 거래처 대표는 계약금 조정 문제로 목소리가 떨렸다.

"조건을 다시 검토해주실 수 없을까요? 저희 회사의 현황을..."

준호는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의 눈은 상대방의 떨리는 손가락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불안. 준호의 입가에 미묘한 곡선이 생겼다.

"조건은 변경 불가능합니다."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상대방이 추가로 말을 이으려 했지만, 준호는 계약서를 밀어냈다. 약점을 드러낸 자는 항상 지는 법이다. 준호는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살았다.

회의가 끝나고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거래처 대표의 절박함, 상민의 경고, 자신의 무감각함. 이 모든 것들이 한 점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지난달 상민이 던진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당신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잃을 거야.'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준호는 무언가를 잃었는지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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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북의 골목 어딘가에 위치한 상담실 '감정의 방'은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했다. 벽에는 손글씨로 쓴 포스트잇들이 가득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여기서 처음으로 울 수 있었어요.' 그 포스트잇들 사이에서 지은은 마주앉은 여성 클라이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 어제 이혼 통보를 했어요."

여성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지은은 그것을 포착했다. 떨림의 의미를 읽어냈다. 놀라움이 아니라 절망. 예상했던 일인데도 현실이 되는 순간의 그 절망.

"오랫동안 기다리셨군요."

지은의 목소리는 낮았다. 상대방의 말을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느끼고 있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을 언어로 만들어냈다.

여성의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봤을 때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인정받은 것 같은 그런 눈물.

"제가 뭔가 잘못한 거 아닐까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 너무 오래 무거워졌던 거예요."

지은은 손수건을 건넸다. 여성이 눈물을 닦으면서 한 마디 더했다.

"이렇게 말해주니까 좀 나아요. 혼자 짊어진 게 아니었구나, 이 무게가."

상담이 끝나갈 무렵, 여성은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다. 펜을 움직이더니 벽에 붙였다. '처음으로 울면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은은 그 포스트잇을 바라봤다. 자신의 능력이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는 믿음이 가슴을 채웠다. 자신의 민감함이 약점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하는 도구일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이 지은을 상담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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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준호의 개인 의사 박상민이 펜트하우스로 찾아왔다. 그는 준호의 건강 검진 결과를 가지고 왔다. 수치는 모두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당신의 감정 결핍증은 신경생물학적 문제예요. 약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 결핍증. 그 단어를 처음 진단받을 때도 그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약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없으니 사업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심리 상담이 필요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의 반복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상민은 지은의 연락처를 건넸다. 심리 상담사. 준호는 그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들었다. 가늘고 하얀 카드였다. '감정의 방' 지은이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심리 상담이 필요해?"

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본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

상민은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준호와 오래 지낸 사람만 알 수 있는 그 감정의 신호. 눈꼬리의 변화. 호흡의 깊이. 상민도 같은 것을 느낀다. 자신도 느끼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그 감정들.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혼자로는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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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의 문이 열렸을 때, 지은은 처음 느꼈다. 뭔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준호는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펜트하우스에서 그냥 내려온 듯한 그 검은색은 강남의 냉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지은은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났지만, 이런 종류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감정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준호는 침대 같은 카우치에 앉으면서 단순히 사실을 말했다. 진단을 받았다. 마치 혈당 수치가 높다는 것을 말하듯.

"언제부터 그렇게 느껴지셨어요?"

지은은 노트북을 들지 않았다. 펜을 들지도 않았다. 대신 준호의 눈을 봤다. 그의 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감정이 정말 없을까.

"어렸을 때부터요. 다른 사람들처럼 느끼지 못했어요."

준호는 담담했다. 마치 자신의 결핍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실적을 설명하는 것처럼.

지은은 준호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손을 봤다. 그의 손은 카우치의 팔걸이 위에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누르고 싶지만 누르지 못하는 그런 움직임. 지은은 그것을 포착했다.

"당신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게 아니에요."

지은이 말했다. 준호가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초점을 맞췄다. 평탄했던 눈에 뭔가가 깃들었다. 놀라움인지 안도감인지, 지은은 그것을 정확히 분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누르려고 움직이고 있어요. 그것도 감정이에요. 당신은 느낄 수 있어요. 다만 그 신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은은 준호의 손을 계속 바라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 자체가 답변이었다.

"당신은 나를 구하려고 하는데, 누가 당신을 구하나요?"

준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지은은 그 말에 순간 동요했다. 자신이 구하려고 하는 것. 누가 자신을 구하는가. 그 질문이 가슴에 박혔다.

지은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전문가로서의 객관성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민감함이 약점이 아니라고 믿었던 지은이, 처음으로 그 민감함이 자신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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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을 나가는 준호의 뒷모습을 지은은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없음' 자체가 가장 큰 감정처럼 느껴졌다. 마치 깊은 우물의 밑바닥처럼, 그 공허함 속에 뭔가 거대한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뒤돌아섰다.

"당신이 내게 감정을 가르쳐주면, 월급을 드리겠습니다. 계약으로요."

지은은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준호의 눈을 봤다.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필요'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감지했다. 평생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지은은, 그 눈빛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지은이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하려고 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누가 나를 구하나요. 준호가 던진 그 질문이.

문이 닫혔다. 상담실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포스트잇들이 벽에서 지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그 감사 속에서, 지은은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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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신경을 조종하는 것처럼.

'당신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누르려고 움직이고 있어요.'

그 말이 자꾸만 되돌아왔다. 준호는 지난 서른 해 동안 자신을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왔다. 그것이 강점이라고 믿었다. 감정은 약함이고, 약함은 패배라고 배웠다. 그래서 자신은 패배하지 않았다. 회사를 지배했고, 거래 상대방들을 제압했고, 모든 것을 계산으로 통제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준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사. 뭐 있어?"

"그 심리 상담사. 지은이라고?"

전화 너머에서 상민의 숨소리가 변했다. "응. 왜?"

"계약을 하려고 한다."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상민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으로 들었다. 상민이 웃다니.

"진짜? 너 미쳤어. 그런데 좋아. 진짜 좋은 결정이야."

"계약이니까 월급을 주는 거고, 감정에 대해 가르쳐달라는 거야. 그게 전부야."

"응, 응. 뭐든 좋아. 내일 만나자고 해. 그리고…" 상민이 말을 멈췄다. "너 정말 그 상담사한테서 뭔가 느꼈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지. 느낌인지, 필요인지, 아니면 단순한 생리 반응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

"내일 만나자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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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지은은 상담실에 남았다. 벽의 포스트잇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밤을 새웠다.

'선생님이 제 말을 들어줬어요.' '처음으로 누군가 제 감정을 이해해줬어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수백 개의 메모. 수백 명의 감사. 지은은 그것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했다. 타인의 상처를 듣고, 그들의 감정을 언어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것이 자신을 살게 하는 이유다.

그런데 누가 자신의 상처를 들어줄까. 누가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만들어줄까.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뭐 하고 있어?"

"상담실에 있어. 막 클라이언트 하나가 나갔어."

"누구?"

지은이 잠시 생각했다. 클라이언트의 개인 정보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친구다. 그리고 준호는... 지은도 무엇이라 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특이한 사람이야."

"특이한 게 어떻게?"

"감정이 없대. 의학적으로 진단받은."

전화 너머에서 서윤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넌 그 사람을 구해주려고 하겠지?"

"뭐?"

"항상 그래. 넌 항상 남을 구하려고만 해. 그 사람이 넌 좋으면 어떻게 하니?"

지은이 침묵했다. 서윤의 말이 준호의 질문과 겹쳤다. 누가 당신을 구하나요.

"그런 말 하지 마."

"왜? 사실이잖아. 너 혼자 남겨져 있어. 항상."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윤의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 밤, 지은은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다. 펜을 들고 한참을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썼다.

'누가 나를 구할까요?'

포스트잇을 벽에 붙였다. 자신이 남긴 첫 번째 메모였다. 그리고 그 메모를 붙이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위험한 경계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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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준호는 상민과 함께 '감정의 방'을 다시 찾았다. 상담실의 벽에는 어제 없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누가 나를 구할까요?' 지은의 글씨였다.

상민이 지은을 소개했다.

"이분이 심리 상담사 지은 선생님이고, 이분이 우리 준호예요. 준호가 감정 표현 계약을 하고 싶대."

지은의 눈이 커졌다. "계약?"

"네. 월급을 받고 저에게 감정을 가르쳐주는 계약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지은은 그의 눈을 봤다. 어제의 눈과는 달랐다. 오늘의 눈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그건 전문적이지 않습니다. 상담은 계약 관계가 아니라..."

"정확하게 계약이어야 해요."

준호가 끊었다. "감정이 없는 사람한테는 의무감이 필요하거든요. 월급을 받으면, 당신도 의무를 갖게 돼요. 날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도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지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감정이 가득했다. 자신이 구할 수 있다는 희망. 자신이 필요하다는 믿음.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를 필요로 할 수 있다는 깨달음.

상민이 웃음을 흘렸다. 상민도 변하고 있었다. 준호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신도 감정 결핍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상민이 계약서를 펼쳤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것 같았다. 계약 기간, 월급, 만남의 횟수와 장소. 모든 것이 세심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계약 기간은 3개월입니다. 주 2회 만남. 장소는 펜트하우스로 정했어요."

상민이 설명했다. "월급은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지은이 숫자를 봤다. 상담료의 10배였다. 그것은 월급이 아니라 투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입니다."

상민이 가리켰다. 계약서의 맨 아래.

'계약자는 상대방에게 거짓 없이 답할 의무가 있다.'

지은은 그 문구를 읽으면서 숨이 멎었다. 거짓 없이. 그것은 자신의 전문성과 거리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자신의 모든 방어를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이건 상담 윤리를 위반하는 조항입니다."

지은이 말했다. "저는 클라이언트의 개인 정보를 보호해야 해요.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나를 구하려면, 먼저 당신이 구해져야 해요. 당신이 거짓 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게 나예요."

지은은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정확히 봤다는 증거였다.

"저는 이미 다른 클라이언트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저를 필요로 해요."

"알아요. 그래서 월급이 이 정도예요. 당신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상민이 덧붙였다. "그리고 기존 클라이언트들을 위한 슈퍼비전 비용도 따로 책정했어요. 당신이 전문성을 잃지 않도록."

지은은 상민을 봤다. 상민의 눈에도 변화가 있었다. 준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상민 자신도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 결핍을 마주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지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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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지은은 상담실로 돌아갔다. 기존 클라이언트 김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상담 이후 회복되고 있던 김 씨가 갑자기 악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상담사로서의 책임감이 흔들렸다. 계약을 맺으면, 자신의 에너지가 분산될 것이다. 기존 클라이언트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은은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재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준호와의 계약은 그 이후에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클라이언트들을 안정화시킨 후에.

이틀 뒤, 지은은 상민에게 연락했다. 계약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조건이 있다고. 기존 클라이언트들의 안정화가 우선이라고. 준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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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감정 수업은 일주일 뒤였다.

펜트하우스의 거실. 창 밖으로 강남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지은과 준호는 소파에 마주 앉았다. 계약서에는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서명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추가 조항이 있었다. '상담자의 전문성과 클라이언트의 개인정보 보호는 최우선한다.'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네."

"감정이란 무엇인가. 그것부터 정의해야 해요."

지은이 생각했다. 감정의 정의. 그것은 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 순간 준호와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했다.

"감정은 신체의 신호예요. 뇌에서 나온 화학 물질이 신체 곳곳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기는 반응. 당신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도, 호흡이 변하는 것도, 눈동자가 확대되는 것도 모두 감정의 신호예요."

"그럼 그 신호를 인식하는 것이 감정을 느끼는 거네요."

"맞아요. 당신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다만 그것을 '감정'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했을 뿐이에요."

준호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카우치의 팔걸이에서 떨어진 손. 그 손이 천천히 지은의 손 위에 놓였다.

"지금 이 순간, 뭔가 느껴져요."

"뭔가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가 있어요."

지은은 준호의 손을 봤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호흡도 변했다. 눈동자도 확대되어 있었다. 모든 신체 신호가 말하고 있었다. 불안이 아니라 기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

"그게 감정이에요.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기대라고 할 수 있어요."

"기대?"

"네. 당신이 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그리고 나와 함께라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

준호의 눈이 지은을 향했다. 그 눈에는 처음으로 명확한 감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지은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이 맞닿았다.

"당신이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요?"

지은의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거실의 조명이 강남의 야경과 어우러져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손. 감정 결핍과 감정 과잉을 잇는 손.

그리고 그 손들이 맞닿는 순간,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당신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고백.

지은은 준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우리 함께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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