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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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가장 큰 비명이라는 걸 아는가.

강남 루미에르 그룹 45층 CEO 집무실. 벽이 회색이었다.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책상, 의자, 바닥, 천장. 심지어 창밖의 강남 풍경도 이곳을 통과하면서 회색으로 물들었다. 내가 만든 세계였다. 감정이 스며들지 않는 세계. 완벽한 색채학적 중립.

그런데 어제, 나는 그 벽을 칠하기로 했다.

따뜻한 베이지. 거의 살구색에 가까운 베이지.

"지은아, 미쳤나? 벽을 칠한다고?"

서연이 나타났을 때 나는 이미 롤러를 들고 있었다. 새벽 6시, 회사가 움직이기 전. 페인트통 옆에 내 손이 담가져 있고, 첫 번째 줄이 그어져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벽을 다시 칠해야 해."

내 목소리가 떨렸다. 서연이 나를 들여다봤다. 그 눈빛이 나를 안다는 신호였다.

"너... 정말 변했네."

"변한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야."

롤러를 다시 들었다. 페인트가 벽에 묻혀가며 회색을 덮었다. 한 줄, 또 한 줄. 마치 내 과거를 지워내는 것처럼. 서연은 가만히 나를 봤다가, 조용히 롤러를 집어 들었다.

"함께할게."

우리는 말없이 벽을 칠했다. 새벽 7시, 직원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30분.

그 30분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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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직원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얼굴이 다 같았다.

"어? 벽이..."

"CEO 집무실이 달라졌네요."

"살구색? 따뜻한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CEO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책장을 다시 정렬하고 있었다. 경영서와 마케팅 도서들을 빼내고, 대신 준호가 쓴 글들을 인쇄해 액자에 담았다.

"감정은 거래가 아니라 신뢰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맡기는 것과 같다."

"강함은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의 말들이 내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말들이 내 벽이 되어 있었다.

서연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정말 행복해 보여."

내 목이 메었다. 행복이 뭔지 알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그것은 준호가 내 손을 잡을 때였다. 아버지가 준호를 보며 웃을 때였다. 내 거짓이 모두 무너지고 진실만 남았을 때였다.

"그래. 나 행복해."

처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형용사가 아니라 사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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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회의실. 마케팅 팀.

"캠페인 결과입니다."

대화면에 숫자들이 떠올랐다.

주가 12% 상승. 그것만이 아니었다.

온라인 매출 156% 증가. 오프라인 매장 방문객 189% 증가. SNS 공유도 432만 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댓글들이었다.

"루미에르는 제 감정을 이해해주는 브랜드예요."

"화장품을 사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는 기분이에요."

"CEO님의 광고를 보니까... 저도 제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나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내 모습과 준호의 모습이 있었다. 강남역 카페에서. 옥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것은 광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이었다.

"CEO님, 이 캠페인은... 역대급이에요. 감정을 파는 건 처음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 줄은."

마케팅 팀장이 말했다.

"감정을 파는 게 아니야. 감정의 가치를 알려주는 거야."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루미에르 그룹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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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아버지의 사무실.

박준석 회장은 신문을 들고 있었다. 경제면에 '루미에르, 감정 마케팅으로 신뢰도 회복'이라는 기사가 떴다. 그는 천천히 기사를 읽고 있었고,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자랑스러운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슬픈 것이기도 했다.

"우리 지은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아버지가 나를 봤다.

"엄마도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감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 알았다. 아버지도 후회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처럼.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원했던 것들. 돈이 아니라 감정이었다는 것.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손을 잡는 것, 함께하는 시간.

"저도 이제 알아요. 엄마가 뭘 원했는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감정을 원했던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함께해주는 것을."

아버지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 행복하세요. 저한테 보여줬으니까요. 감정을 살아가는 방법을."

"그래... 난 이제 행복해."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자신을 설득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이것도 감정이었다. 용서도, 화해도 모두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강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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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준호의 오피스텔.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원고가 떠 있었다. 제목: '거짓에서 시작한 진실'.

"이 책이..."

준호가 말했다.

"내 이야기이면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야."

나는 옆에 앉아 그의 글을 읽었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녔어. 그들이 어떻게 속았는지,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들을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믿게 되었는지?"

내가 물었다.

준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의 눈이 빛났다.

"난 이제 알아, 지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내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 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나는 그를 안았다. 그의 따뜻함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출판사는 뭐라고 했어?"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가치를 알려줄 거라고. 단순한 고백이나 사건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준호가 내 손을 잡았다.

"그게 내가 원한 거야.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그래, 넌 충분히 그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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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강북의 카페.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이었다.

좁고 따뜻한 카페. 벽에는 여행 사진들이 붙어 있고, 카운터에는 손수 만든 케이크들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여전히 강남의 루미에르 그룹 45층과는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세계를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나를 구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만났지. 기억해?"

준호가 물었다.

"물론이지. 너를 거짓으로 고용했던 그 자리."

나는 웃었다.

"그때 넌 나한테 카페 주인이 보여줬어. 따뜻함이 뭔지."

"그리고 지금?"

"지금 넌 나한테 사랑이 뭔지 보여줬어. 진정한 사랑."

준호가 일어섰다. 무릎을 꿇었다.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봤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준호만 보였다.

"민지은, 나랑 결혼해줄래?"

그의 손에는 반지가 들려 있었다. 단순하고 따뜻한, 그의 손처럼.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이었다. 내가 감정을 거래가 아닌 진실로 흘리는 것.

"응. 응, 응, 응..."

나는 반복했다.

"응!"

그가 나를 일으켜 안았다.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 소리는 내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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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었을 때,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가 받았을 때 그의 얼굴이 변했다.

"아, 아버지..."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뭔가 예감이 들었다.

"...네? 어머니가?"

준호의 손이 떨렸다.

"지금?"

카페의 따뜻한 불빛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내 손은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반지는 여전히 내 손가락에 빛나고 있었지만.

세상이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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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아니,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준호?"

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늘 오후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반복했다.

"응급실에 가셨어. 뇌졸중이라고. 의사가 말했어, 지금 상태가..."

카페의 따뜻한 조명이 한순간 너무 밝아 보였다. 아니, 너무 어두워 보였다. 방금 전까지 내 손가락에서 빛나던 반지가 이제는 무겁게 느껴졌다.

"병원이 어디야?"

내가 물었다.

"강동구. 아버지가..."

준호가 일어섰다. 비틀거렸다. 내가 그를 붙잡았다.

"나 가야 돼. 지금 당장."

"나도 함께 가."

"아니야, 지은. 난..."

그가 내 눈을 봤다. 그 눈에는 공포가 있었다. 내가 처음 본 감정이었다. 준호라는 남자의 가면 뒤에 있던 진정한 두려움.

"난 혼자가 아니야. 넌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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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의 병원 중환자실 복도는 무겁고 차가웠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 마치 몇 주 전 내 오피스처럼.

준호의 아버지 윤석구는 중환자실 밖에서 서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손에는 컵이 들려 있었는데, 커피가 식어있는 듯했다.

"준호."

그가 아들을 봤을 때 처음으로 울음이 나왔다.

준호가 아버지를 안았다. 나는 한 발 물러섰다. 이건 가족의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가족이 아니었다. 반지를 받은 지 몇 분밖에 안 됐으니까.

"어머니 상태가?"

준호가 물었다.

"의사가 몇 시간 안에 상태가 나아질지 악화될지 알 수 있을 거래. 지금은..."

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서연이었다.

"지은, 뉴스 봤어?"

"뭔데?"

"준호 아버지 얘기. 20년 전 사건 관련자라는 게 또 나왔어. 이번엔 더 심해. 기사를 보니까..."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준호를 봤다.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뉴스는 이미 나왔을 텐데.

"준호."

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뭐야?"

"휴대폰 켜."

"왜?"

"그냥 켜."

준호가 휴대폰을 켰다. 화면은 즉시 뉴스 알림으로 가득 찼다.

[속보] '계약연애 중개소의 진짜 배후자 적발' — 20년 전 유사 사건의 주요 인물 윤석구, 현재 강동구 입원 중

그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뭐야?"

"모르겠어. 내가 방금 알았어."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준호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

그가 돌아섰다.

"이게 뭐예요? 이 기사가 사실이에요?"

윤석구는 준호를 봤다.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준호, 나는..."

"사실이야?"

준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환자실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20년 전에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했다고?"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나는 한 발 더 물러섰다. 이건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건 가족의 상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것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 상태에 대해 말씀할 거래요."

간호사가 나타났다.

준호의 아버지가 의사와 함께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준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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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준호의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뇌졸중의 후유증이 심했다. 의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말했다.

준호의 아버지는 중환자실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준호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20분 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복도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의 반지를 봤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건 행복의 증거였다. 지금은 아이러니해 보였다.

준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눈이 붉었다. 손으로 얼굴을 씻었는데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은."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나 이상해?"

"뭐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미웠어. 20년 전 일 때문에.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중환자실 앞에서 울고만 있는데, 나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분노가 사라져?"

내가 물었다.

"응. 그냥... 아버지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걸 느껴.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중요하다는 걸."

나는 그를 안았다. 병원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반복했다.

"항상."

준호가 내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언가 더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를 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은..."

한참 후 준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던 이유가... 아버지가 약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아버지는 약한 게 아니었어. 아버지는 누군가를 지키려고 했던 거야. 엄마를 지키려고. 나를 지키려고."

"그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실수했어. 하지만 그 실수도... 사랑이었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이제 알아. 아버지가 왜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아버지도 누군가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거야. 내처럼."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너도 누군가를 잃을까봐 두려워?"

"응. 너를. 엄마를. 아버지를. 모두를."

준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서 지은, 난 이제 결정했어.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로."

"준호..."

"아버지가 20년을 혼자 짊어졌다면, 이제는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해. 그게 가족이니까."

그의 말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단호함 아래에는 깊은 슬픔과 동시에 새로운 결의가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깨어나면...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낼 거야. 돈이 아니라 감정으로. 아버지가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나는 그를 다시 안았다. 이번엔 더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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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내 휴대폰이 울렸다. 루미에르 그룹이었다.

"대표님, 죄송한데... 아침 뉴스가..."

담당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 아버지 관련 기사가 또 나왔어요. 이번엔 루미에르 그룹까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준호를 봤다. 그는 아버지 옆의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손에는 여전히 내 손이 들려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준호 아버지 관련 건으로 이사회를 소집하세요. 아침 7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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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병원 로비의 카페에서 서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은, 미쳤어? 왜 연락을 안 했어?"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준호 아버지 뉴스 봤지?"

"응."

"루미에르까지 연루된대. 이사회에서 벌써 회의 준비 중이야.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커피를 마셨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진실을 말해. 너랑 준호의 관계가 지금은 진짜라는 거. 그리고 준호가 피해자라는 거."

"그래도 아버지 문제는..."

"남겨두는 거야. 준호 아버지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야. 너는 너 할 수 있는 것만 해."

서연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 손가락의 반지를 봤다.

"축하해. 결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울음 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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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루미에르 그룹 이사회.

회의실의 이사들은 모두 나를 바라봤다. 긴장한 표정으로.

"준호 윤과의 관계는?"

회장이 물었다.

"진짜입니다."

나는 선 채로 말했다.

"계약이었지만, 지금은 진짜입니다. 그리고 그는 피해자입니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의 피해자이고, 그의 아버지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루미에르의 이미지가..."

"루미에르의 이미지는 진실입니다."

나는 그들을 봤다.

"우리는 '감정의 가치'를 내세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거짓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실을 마주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그것을 증명할 시간입니다. 준호를 믿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가족을 믿는 것으로."

나는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20년 전 윤석구가 저지른 일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준호까지 정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그 사건의 영향을 받은 피해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준호가 그중 한 명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루미에르가 진정으로 감정의 가치를 믿는다면, 지금 준호를 보호하는 것이 맞습니다."

한 이사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캠페인으로 약속했습니다. 감정의 가치를. 이제는 그것을 실천할 때입니다."

다른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이 나를 봤다.

"좋습니다. 루미에르는 준호 윤을 지원합니다. 그리고 윤석구에 대해서는... 그것은 법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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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병원 복도.

준호의 아버지 윤석구가 나를 불렀다.

"지은 씨, 잠깐."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준호는 저를 용서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아버지."

"20년을 거짓으로 살았어요. 그리고 그 거짓이 결국 이렇게 되었어요. 제 아내가 쓰러지고, 제 아들이 고통받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 이제 진실을 말할 시간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준호가 원하는 건 아버지의 자책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진정한 사과입니다."

"어떻게?"

"자수하세요. 20년 전 일에 대해 자수하고, 그 이유를 말하세요. 왜 도망쳤는지, 왜 거짓으로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 왜 진실을 말하는지."

윤석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 아들이 저를 용서했으니까요. 이제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그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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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병원 중환자실.

준호의 어머니가 눈을 떴다.

"어머니!"

준호가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식을 되찾으셨네요. 다행입니다."

준호의 어머니는 천천히 준호를 봤다.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 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준호를 찾는 눈. 아들을 확인하려는 눈.

준호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 나야. 준호야."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괜찮아. 이제 모두 괜찮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여기 있어.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있어."

어머니의 손이 준호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말할 수 없는 입술이 움직였다. 아들의 이름. 그것만 반복했다. 준호. 준호. 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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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준호의 아버지는 경찰에 자수했다.

뉴스는 즉시 나왔다.

[속보] 윤석구 전직 사업가, 20년 전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 자수. "아들이 겪은 고통 때문에 진실을 결정했습니다"

기사에는 그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20년을 거짓으로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아들은 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진실로 제 죄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이 보여준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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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병원 옥상.

준호와 나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지은."

준호가 내 손을 잡았다.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당연하지. 난 어디로든 갈 거야. 너와 함께."

"우리 결혼식은 언제 할 거야?"

나는 웃었다.

"어머니가 나으면? 모두 함께."

"응."

준호가 내 손을 더 꼭 잡았다.

"난 이제 알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그래. 우리는 함께 살아갈 거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감정은 약함이 아니야, 준호."

"응. 감정은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야."

우리는 밤하늘을 봤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확실했다.

감정은 약함이 아니었다.

감정은 우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거짓에서 진실로. 혼자에서 함께로. 회색에서 살구색으로.

우리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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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후.

준호의 어머니는 재활 중이었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석구는 법정에 서 있었고, 그의 변호사는 '자발적 자수와 참회'를 강조했다.

나는 루미에르 그룹의 새로운 캠페인을 공개했다.

제목: '감정은 약함이 아니라, 진정함입니다'

광고에는 나와 준호가 나왔다.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거짓에서 시작한 관계. 진실로 끝난 사랑.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배운 것들.

언론은 난리났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난리였다.

루미에르 그룹의 주가는 올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의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댓글들이 쏟아졌다.

"CEO님과 준호님의 이야기를 보니까 제 가족과 다시 대화하고 싶어요."

"거짓에서 시작했어도 진실로 끝낼 수 있다니... 저도 용기를 내봐야겠어요."

"감정을 숨기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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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준호의 책이 출판되었다.

'거짓에서 시작한 진실'

출판사는 이 책을 '올해의 베스트셀러'로 추천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맞았다. 책은 첫 주에 10만 부가 팔렸다.

준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제 이야기이면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입니다. 계약연애 중개소의 피해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속았는지,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누군가를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시작했어도 진실로 끝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책의 인세는 계약연애 중개소의 피해자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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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준호의 어머니는 완전히 회복했다. 의사는 '기적 같은 회복'이라고 말했다.

윤석구는 법정에서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제 아들이 보여준 용서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저는 이 시간 동안 제 자신을 돌아보고, 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준호는 아버지를 안았다. 법정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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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후.

강북의 카페에서 우리의 결혼식이 열렸다.

작은 식이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모였다.

준호의 어머니는 휠체어에 타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준호의 아버지는 준호의 옆에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 아버지는 나를 준호에게 인도했다.

"우리 지은이를 잘 부탁합니다."

그가 준호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 저는 지은을 평생 사랑하겠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지은은 저를 구했습니다. 거짓의 세계에서 진실의 세계로."

나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난 너를 구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함께 구한 거야. 서로를."

그 순간,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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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끝난 후, 우리는 카페의 창가에 앉았다.

"지은."

준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앞으로 뭐가 있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응."

준호가 웃었다.

"난 이제 알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그래. 우리는 함께 살아갈 거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진정함이 우리를 만드는 거야, 준호."

"응. 그것이 가장 강한 것이야."

우리는 밤하늘을 봤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확실했다.

감정은 약함이 아니었다.

감정은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거짓에서 진실로. 혼자에서 함께로. 회색에서 살구색으로.

우리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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