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거짓의 끝, 진실의 영원함」
옥상 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준호는 내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지난 가을에서 겨울로, 봄을 지나 여름으로. 계약이 시작된 지 정확히 1년.
"지은아, 들어봤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야경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서, 그 얼굴 없이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뭘?"
"루미에르 신제품 론칭이 뉴스 1위래. 광고까지 포함해서 '감정 경영'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준호가 휴대폰을 켜 보여줬다.
화면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내가 준호의 손을 잡고 있고, 그 아래에는 '루미에르 CEO, 감정의 가치를 선언하다'라는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민지은 CEO는 신제품 론칭 행사에서 "완벽함은 감정을 배제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감정 위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발표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렸다. 이 말이 과거의 내 입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감정을 약함이라 생각하던 여자가, 이제는 그것을 강함이라 선언하고 있다니.
"너 때문이야." 내가 중얼거렸다.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너 때문이지. 넌 용감했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는데, 감정을 선택했어."
---
갈라 행사 이후 일주일, 준우는 나를 불렀다. 회사 기밀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이었다.
"넌 끝났어, 지은." 준우가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이 광고, 이 캠페인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폭로하면 루미에르는 한순간에 무너져."
나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넌 CEO 자리에서 내려올 거고, 준호 작가도 함께 망할 거야. 계약연애 사기꾼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그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법무팀장이었다.
"회장님, 준우 부회장의 모든 통화 기록과 메시지를 확보했습니다. 협박 혐의로 고소 가능한 상태입니다."
준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넌 날 협박하려고 했지만, 난 이미 준비했어."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법무팀이 지난 일주일간 모든 것을 기록했고, 너는 지금 협박죄로 고소될 거야."
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은, 제발... 난 그냥..."
"나가." 내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루미에르에 나타나지 마."
---
그 다음은 이사회였다.
"감정 중심의 경영 철학? 이건 기업의 약함입니다." 이사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가가 폭락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봤다. 의심, 불안, 그리고 계산.
"주가가 떨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당신의 무분별한 경영 때문이지요."
"아니에요." 나는 자료를 펼쳤다. "주가가 떨어진 건 준우 부회장이 시장에 루머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루머는 이미 해명되었어요."
나는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준우의 협박 기록, 그리고 루머 유포 증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거예요." 나는 다시 말했다. "신제품 론칭 이후 고객 만족도가 전년 동기 대비 34% 상승했습니다. 재구매율은 42% 올랐고요. 이건 감정 경영이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실제 성과라는 뜻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감정이 약함이라면, 왜 우리 고객들은 계속 돌아올까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신뢰는 감정입니다. 충성도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감정 위에 세워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회의 지지가 필요하다면, 저는 여기서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이 길을 계속 갈 겁니다. 준호 작가와 함께."
나가 문을 향해 걸어갈 때, 가장 오래된 이사가 입을 열었다.
"잠깐."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우리는 당신의 경영 철학에 반대했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루미에르는 당신과 함께 간다."
다른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
3주 후, 루미에르 신사옥의 상담실. 계약연애 피해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여성은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눈가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저... 계약연애를 했어요. 3년을 함께했는데, 모두 거짓이었어요." 여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람은 저한테 결혼을 약속했고, 저는 그걸 믿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내 과거를 봤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계약을 사랑이라 착각했던 내 모습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돈을 받고 사라졌어요." 여성이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날 선택한 사람이 없어요?"
나는 그녀를 안았다. 상담실이 아닌, 한 여자로서.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당신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저도 같은 경험을 했어요. 거짓을 진실이라 믿었고, 상처받았어요. 하지만 그 상처가 저를 더 진정하게 만들었어요."
여성이 나를 바라봤다.
"당신도... 계약연애를?"
"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요." 나는 손가락의 반지를 보여줬다. "이제는 선택으로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도 그럴 수 있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게 될 거예요."
여성은 계속 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눈물이었다. 희망의 눈물.
---
저녁, 준호의 오피스텔. 우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오늘 그 여자, 많이 울었더라." 준호가 중얼거렸다.
"응. 봤어."
"넌 왜 자리를 떴어?"
"넌 그럴 때 더 진정하니까. 내가 없을 때가."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날 너무 잘 알아."
"그럼 넌 나를 몰라?" 내가 묻자, 준호가 나를 돌아봤다.
"난 너를 매일 새로 배워. 매일 다른 너를 발견해." 준호가 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상대를 계속 발견하는 것."
나는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
한 달 후, 준호의 책 '거짓에서 시작한 진실'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서점 진열대에는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의 피해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낸 사랑과 신뢰의 이야기.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우리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울 줄은 몰랐어." 준호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
민준이가 강북의 카페에서 우리를 찾아왔다. 세 명이 앉았을 때, 그가 준호를 바라봤다.
"너, 지은이를 정말 행복하게 했어."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은이가 날 행복하게 했어. 난 그것을 받아줬을 뿐이야."
민준이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준호를 봤다.
"그런데 말이야. 넌 정말 그 사건 이후로도 계속 지은이와 함께 있겠어?" 민준이가 물었다.
준호는 나를 봤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응. 계약이 끝났지만, 우린 여전히 함께야. 이제는 선택으로."
민준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게 진정한 사랑이야."
---
루미에르 신사옥 옥상. 저녁 7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박준석 회장과 그의 새 아내가 우리를 방문했다.
"지은아, 넌 변했어."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응. 아버지도 변했어." 나는 웃었다.
"그래, 우린 둘 다 변했어. 그리고 이제 행복해." 아버지가 준호를 보며 말했다. "이 친구 덕분에."
"아니에요, 회장님. 지은이 덕분입니다." 준호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를 봤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정한 행복이 피어올랐다. 완벽함을 추구하던 박준석 회장이, 이제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아버지, 미안해." 내가 말했다.
"뭐가?"
"전에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어. 감정을 약함이라고 생각했어. 당신처럼."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래도 넌 변했어. 그게 중요해. 우린 둘 다 변했고, 이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우리는 함께 서울의 야경을 봤다. 아버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나와 준호. 네 명이 함께.
---
루미에르의 새로운 광고 캠페인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거짓에서 시작해 진실로 변한 사랑의 여정.
첫 방영은 골든타임 드라마 사이에 나왔다. 광고는 3분 30초. 계약이라고 믿었던 처음, 감정을 드러내기 두려웠던 중간, 그리고 선택으로 함께하기로 결정한 지금.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SNS는 폭발했다. 댓글이 쏟아져 나왔고, 공유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완벽함을 추구하다가 잃어버렸던 감정,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는 여정에.
주가는 상승했다. 광고 방영 이후 첫 거래일에 루미에르 주식은 전날 대비 12% 상승했다.
---
밤 11시 15분, 루미에르 신사옥 옥상.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강이 흘러가고, 빌딩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 영원할까?"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 물음은 불안함이 아니었다. 단지 확인이었다.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정으로 영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순수한 물음.
1년 전, 계약을 맺을 때의 나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 아마 "계약은 끝나면 끝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계약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원해."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은아, 넌..."
"결혼하자. 계약이 아니라, 선택으로." 나는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거짓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진정한 약속을 하고 싶어."
준호는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응. 영원해. 넌 내 영원이야."
우리는 서로를 안아당겼다. 서울의 야경이 우리를 감싸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으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거짓이 아닌 진정함이 있었다.
카메라는 천천히 줌아웃되었다. 루미에르 신사옥이 작아지고, 강남 전체가 보이고, 한강이 보이고, 서울 전체가 빛나는 야경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 한 쌍의 인영은 작지만 분명하게 빛났다.
'거짓에서 시작한 진실, 이제 영원한 사랑이 되다.'
자막이 떠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루미에르 그룹의 새로운 로고가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한 줄의 문구가 있었다.
'감정은 약함이 아니라, 진정함입니다.'
그 문구 옆에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모습이 있었다. 거짓의 계약으로 시작한 손이, 이제는 진정한 사랑의 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정지 화상으로 멈췄다. 루미에르 신사옥 옥상에서 서로를 안고 있는 우리. 그 뒤로는 영원히 빛날 서울의 야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