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준우의 사무실은 루미에르 건물의 맞은편에서 서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지은이 들어섰을 때 그는 창가에 서 있었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너 남친 있잖아. 프리랜서 작가?"

문 닫히는 소리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은의 눈살이 모였다.

"왜?"

"조사했어. 꽤 흥미로운 이력이 있더라."

준우가 턴 모니터 화면에는 준호의 얼굴이 떠 있었다. 지은의 호흡이 얕아졌다. 그것은 단순한 신상 조회가 아니었다. 화면 아래에는 준호의 이름 옆에 '계약연애 중개소', '가입 기록', '2년 전'이라는 텍스트가 붙어 있었다.

"이건 개인정보 유출이야."

지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내부는 뒤흔들리고 있었다.

"너 그 사건 기억하지? 2년 전, 계약연애 중개소 사기. 여자들이 수십억 잃어버린 그 사건."

준우가 화면을 넘겼다. 뉴스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이 모자이크된 가해자들의 사진, '피해자 규모 확대', '추적 중인 용의자'. 그리고 한 장의 이미지에서 준호의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사건에 가입했던 사람이 너 남친이야. 지금 이 시점에, 너 회사가 신제품 발표회를 앞두고 있을 때."

"그건 과거야. 그리고 그는 피해자였어."

지은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이 얼마나 위험한 신호인지 준우는 정확히 포착했다.

"피해자? 그 중개소 직원이야. 여자들한테 거짓 감정을 팔아서 돈을 뜯어낸 놈들 중 한 명이야. 아, 근데 넌 아직 그걸 모르고 있구나. 지은."

준우가 웃었다. 그 웃음은 지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었다.

"내일 신제품 발표회에서 이게 터질 거야. 루미에르의 마케팅 아이디어가 가짜 감정 팔던 사기꾼한테서 나왔다고. 기자들한테 이미 정보를 흘렸거든. 언론이 얼마나 좋아할까?"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우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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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준호를 불렀다. 전화는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준호는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중요해. 빨리 와.'

답장은 없었다.

1시간 뒤, 준호가 나타났을 때 지은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야경이 시작되던 시점이었고,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뭐야? 뭐가 중요한데?"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지은은 그 밝음이 얼마나 얇은 종이처럼 다루기 쉬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너 계약연애 중개소 일. 다시 말해줄래?"

침묵이 흘렀다.

"왜?"

"그냥... 궁금해."

거짓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안이 스쳐 지나가는 눈동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헤아리려는 듯한 표정. 그 순간 지은은 준호가 자신에게 설명할 기회를 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준우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은, 너는 나를 믿어?"

준호가 역으로 물었을 때, 지은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음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준호의 얼굴이 굳어갔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준호를 내려치는 펀치보다 훨씬 더 아팠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답을 못 하는 거구나."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잠깐."

지은이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팔을 잡았을 때 그는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뒷모습만 보였다. 어깨가 움츠러든 뒷모습.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우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해자. 사기꾼. 그런데 준호의 뒷모습은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준호의 말이 맞는 걸까? 그가 피해자였다면? 아니면 준우가 맞는 걸까? 가해자였다면?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할 수 없었다.

지은은 준호의 과거 말들을 떠올리려 했다. 그가 중개소에 가입했던 이유. 그가 한 설명들. 하지만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 이제 와서 의심하려니 그 말들이 다시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잘못 믿었다면? 만약 준호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또 다시 누군가에게 속은 것이다. 회사도, 자신의 마음도 모두 무너질 것이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것이 신뢰를 짓눌렀다. 신뢰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내일부터 우리 만나지 말자."

그 말이 나온 순간, 지은은 자신의 목소리를 남이 하는 것처럼 들었다. 감정 없는 CEO의 목소리. 거래를 종료하는 목소리.

"뭐?"

"계약 기간이 끝났어. 이제 필요 없어."

준호가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상처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 절망.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하던 눈빛이 닫혔다. 문을 닫듯이.

"지은, 우리가 이 정도면 끝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상처받은 동물처럼. 아니, 상처받은 사람처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려지는 상처.

"우리는 처음부터 끝이 정해진 거야."

그 말을 하는 순간, 지은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준호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시 얼려버리는 것. 그렇게 하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이미 상처받은 것을 다시 죽이는 것일 뿐이었다.

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아니, 말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그래. 그럼 난 갈게."

준호가 나갔다. 이번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혔을 때 지은의 몸이 흔들렸다. 무릎이 순간적으로 굽혀졌고, 손이 책상을 짚었다. 목이 메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눌렀다. 깊게 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물을 닦아냈다. 거울을 찾았다. 침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여자는 다시 완벽했다. 눈빛이 차갑고, 입가가 평탄했다. CEO 민지은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 깨지고 있었다. 매끈한 표면 아래에서.

휴대폰을 집었다. 시간은 저녁 8시 42분. 내일 신제품 발표회까지 17시간 18분.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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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0분, 루미에르 그룹 신제품 발표회 현장.

강남 코엑스 컨퍼런스홀은 회사의 새로운 스킨케어 라인으로 가득 찼다. 무대 위에는 LED 조명 아래 세 가지 제품이 놓여 있었고, 지은은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검은색 슬릿 드레스, 완벽한 메이크업, 움직임 없는 표정.

"루미에르의 이번 신제품은 단순한 화장품이 아닙니다."

지은의 목소리가 컨퍼런스홀을 가득 채웠다. 정확하고, 차갑고, 설득력 있었다.

"과학과 감정의 경계를 허무는 제품입니다. 피부의 결을 이해하듯, 마음의 결을 이해하는 제품.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신뢰를 판매합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졌다. 플래시가 번쩍거렸다. 지은의 피부가 순간적으로 하얀색으로 물들었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녀의 감정처럼.

발표 5분 차. 지은의 귀에 진동이 전달되었다. 휴대폰의 알림. 그것은 무음 상태였지만, 그녀는 알았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CEO님, 루미에르의 마케팅 컨셉이 외부 프리랜서의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루머가 나왔는데?"

기자의 질문이 날아왔다. 홀 안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지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것뿐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평탄했다. 하지만 마이크를 쥔 손가락이 희어졌다. 손가락 끝이 마이크를 누르는 힘이 세어졌다. 준우가 준비한 질문이었다. 기자들에게 미리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그건 루머일 뿐입니다."

"정말요? 해당 프리랜서가 계약연애 중개소 사기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루미에르가 그런 사람과 협력했다는 건 사실인가요? 투자자들도 이미 우려를 표시했고요."

기자의 질문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준우의 손짓이 보였다. 투자자들의 우려. 회사 내부의 반발. 루머와 의심.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려 했다. 회사도, 신뢰도, 모두가.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마이크가 그것을 증폭했다. 청중들이 그것을 감지했다. CEO의 흔들림을. 그녀의 손가락이 마이크 손잡이를 더 강하게 쥐었다.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시선이 기자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다시 향했다. 떨어졌다. 마치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것처럼.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대해 답변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루미에르는 모든 협력자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거치고 있습니다. 법적 대응을 검토 중입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지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냉정한지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이미 그녀는 준호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를 밀어냈다. 밀어내면 자신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준호도 보호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건 거짓이었다. 단지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다.

발표회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은의 마음은 무대 위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자동 조종장치가 켜진 몸처럼 움직였다. 말하고, 웃고, 손짓하고. 모두가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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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3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표회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직후였다. 화면에 'NEWS ALERT'가 떴다.

**[속보] 계약연애 중개소 사기사건, 새로운 증언 제출**

기사의 첫 문장이 눈에 띄었다. '프리랜서 작가 준호(가명)가 피해자 편에 섰다. 당시 피해자 유진 씨는 준호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고 밝혔다. 준호는 중개소 직원으로 가입했다가 여성 가입자들이 사기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해자들의 진술을 기록하고 증거를 제출했다고…'

지은은 기사를 읽으며 준호의 말들을 역순으로 떠올렸다.

'난 그 일을 후회해.'

'피해자들을 도와야 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였어.'

그 말들이 다시 들렸다. 자신이 제대로 듣지 않았던 말들이. 자신이 의심했던 말들이.

준호는 처음부터 자신을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자신이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도 듣지 않았다.

지은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

준호가 피해자였다. 그는 가해자가 아니라 증언자였다. 그는 스스로 증거를 제출했다. 피해자들을 도왔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민준이었다.

"지은아, 봤어? 뉴스..."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거칠었다.

다시 울렸다. 서연이었다.

"지은! 지금 봤어? 준호가 피해자 편에 섰대. 그 중개소 직원이 아니라..."

"알았어. 끊을게."

지은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아졌다.

또 울렸다. 아버지였다.

"딸아, 내가 본 뉴스가 맞니? 그 친구가..."

지은은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 메시지를 읽었다. 민준이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민준: '지은, 준호는 절대 가해자가 아니야. 그 중개소에서 돈 벌려고 가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자들이 사기를 당한 거였어. 준호는 피해자들한테 미안해했어. 그리고 증언도 제출했어. 지금 이 상황에서 준호를 버렸다면, 정말 미안해. 준호는 지금 너한테 연락이 안 된대.'**

지은은 메시지를 읽고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준호가 자신에게 말했었다. 자신은 듣지 않았지만.

아니다. 준호는 말하려 했다. 자신이 묻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밀어냈다.

휴대폰을 집었다.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톤톤톤. 톤톤톤.

전화는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지은은 대기실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집었다. 발표회장을 빠져나갔다. 준호가 자주 가던 카페로 달려갔다. 문을 열었다. 준호는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톤톤톤. 톤톤톤.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지은은 택시를 탔다. 준호의 집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랐다. 현관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톤톤톤. 톤톤톤.

여전히 울리기만 했다.

문자를 보냈다.

**지은: '준호, 미안해. 나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제발 전화 받아 줄래? 너는 피해자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제발…'**

메시지는 전송되었다. 하지만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뜻이었다.

지은은 준호의 집 앞 계단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몸 전체가 떨렸다. 목이 메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번엔 닦지 않았다. 그냥 흘렀다.

'거짓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있다.'

준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이 지금이었다. 자신이 준호를 거짓으로 판단했고,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준호를 밀어냈다.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지은은 계단에서 일어섰다. 거울을 찾지 않았다. 거울 속의 완벽한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준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그를 믿을 수 없는 자신. 그 신뢰 없이는 사랑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신뢰를 되찾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은은 휴대폰을 집었다. 민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호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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