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무실의 불을 껐다. 밤 열한 시 반. 서울의 야경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데, 그것만으로는 이 공간이 너무 차갑다.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의 마지막 메시지가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거짓의 끝'. 그 말이 자꾸 자꾸 떠올랐다. 읽을 때마다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는데, 이건 계약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면 준호도 끝난다.

내가 뭘 하는 거지.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카톡 창을 열고 준호를 찾아 메시지를 작성했다.

'내일 저녁, 내 집에 올래?'

보내기 버튼에 손가락이 멈췄다. 이건 계약이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다. 상류사회 행사도, 아버지의 모임도 없는 일요일 저녁. 나 혼자 있는 공간으로 그를 초대한다는 건... 뭐였을까.

나는 보냈다.

---

준호가 내 집에 들어섰을 때 뭔가 표정이 이상했다.

"와, 이게 집이야? 갤러리야?"

신발을 벗으며 한 바퀴 도는데, 그의 눈이 계속 이리저리 움직였다. 거실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흰색 소파, 검은색 테이블, 추상화 그림 세 점.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어긋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따뜻하지 않았다.

"여기 사람 냄새가 없어."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나야."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따랐다. 잔을 건네면서 그의 얼굴을 봤다. 그는 여전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누군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너 진짜 여기 사람처럼 살아?"

"뭐가 문제야?"

"문제는 없는데...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여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거실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따라왔다. 책장 앞에서 멈췄고, 그의 손가락이 책 등을 따라 움직였다. 모두 경영서와 자기계발서였다. '감정 경제학', '완벽한 리더십의 기술', '감정을 배제한 의사결정', 'CEO의 40가지 습관'...

"소설은 없어?"

"왜 필요해?"

"왜... 감정 소비는 비효율적이라고 할 거지?"

나는 대답했다. 정확히 그 말을 할 뻔했으니까.

"그래. 감정 소비는 시간 낭비야. 내가 매달 읽을 책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소설에 쓸 여유가 없어."

준호는 한 권의 책을 빼냈다. '감정을 느끼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소유한 책 중에 가장 얇고, 가장 읽지 않은 책이었다.

"이건?"

"... 증정받았어."

"누가?"

"아버지."

그는 책을 다시 집어넣었다.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자꾸 자꾸 나를 자극했다.

"뭐 해. 말해."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준호가 나를 봤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만났을 때, 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넌 자기 마음을 모르니까, 난 너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어."

"뭐?"

"내일 주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지금 줘도 될 것 같아."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건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였다. 제목은 '너를 위한 노래들'. 수십 곡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거 뭐야?"

"너의 마음."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인지 냉소인지 자신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있지. 넌 자기 마음을 모를 뿐이야."

나는 그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곡은 '혼자인 밤'이었고, 두 번째는 '그리움'이었고, 세 번째는 '언젠가는 날 찾을 거야'였다. 계속 넘겨봤다. '외로움', '사랑', '믿음', '두려움'. 모두 내가 자신의 사전에서 지워버렸던 감정들이었다.

분노가 올라왔다. 뜨거운 분노.

"이건 뭐야, 진짜."

"너의 마음이라고 했잖아."

"내 마음은 이런 게 아니야."

"맞아. 넌 마음이 없으니까."

내가 그의 팔을 쳤다. 그리 세지 않은 힘으로. 하지만 내 손이 떨렸다.

"넌 날 뭐라고 생각해?"

"... 소중한 사람."

그 말에 나는 한 발 물러섰다. 소중한 사람.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니. 그런 건 계약에 없었다. 계약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 '모든 관계는 거래일 것', '계약 종료 후 연락 금지'만 있었다.

"이건 계약 범위를 벗어나."

나는 거실로 돌아섰다. 소파에 앉았다. 준호는 계단 앞에 남아 있었다.

"지은."

"뭐."

"이건 거짓이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시간 확인만 했다. 밤 열한 시 반. 일요일.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

---

다음 날 루미에르 그룹의 경영진 회의실은 조용했다. 나는 스크린에 새로운 마케팅 방향을 띄웠다.

"신제품 라인의 콘셉트를 '감정'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경영진들의 눈이 모였다. 이전의 나라면 '효율성', '시장 점유율', '수익성'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감정?"

마케팅 이사가 물었다.

"고객이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아름다움 때문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채우고 싶어서, 자신감을 원해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그 감정을 팔아야 합니다."

서연이 나를 봤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모든 걸 안다는 듯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그녀가 나를 잡았다.

"지은, 너 변했어."

"뭐가."

"모든 게. 이건 넌 아니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건 비즈니스 전략일 뿐이야."

"거짓말."

"뭐?"

"넌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 그 말도 네가 믿지 않는 거 보여. 눈빛이 다르거든."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한 시간 뒤, 밤 열한 시경. 휴대폰을 들었다.

'너 지금 뭐해?'

답장은 바로 왔다.

'너 생각하고 있어.'

나는 한 번 더 울렸다. 쉼표를 두 개 붙인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내가 타이핑했다.

'그건 계약 범위를 벗어나.'

'그래. 이건 계약이 아니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 안에서 뭔가 무너졌다. 책상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렸다. 서울의 야경이 창밖으로 흘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깨지고 있었다.

---

금요일 저녁, 준호가 다시 내 집에 왔다. 이번엔 초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왔다. 마치 여기가 그의 집인 것처럼.

나는 침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그가 들어섰다. 침실은 거실보다도 더 냉정했다. 회색 침대, 검은색 옷장, 아무것도 없는 벽.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여기도 사람 냄새가 없네."

"내가 이런 사람이잖아."

"아니야."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이 내 얼굴에 가까워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준우'라고 떠 있었다. 메시지였다.

나는 준호를 밀어냈다. 벌떡 일어났다. 휴대폰을 들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내가 준호와 손을 잡고 있는 모습. 언제 찍은 건지 모르는 사진이었다. 메시지는 짧았다.

'재미있네. 넌 이 남자를 모르겠지?'

그 다음 사진. 신문 기사였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기사건 연루자'.

내 손이 얼었다.

"이건... 뭐야?"

준호가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봤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은, 이건..."

"이건 뭐야!"

내 목소리가 컸다. 침실 안에 울렸다.

"설명할 수 있어. 진짜로."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섰다.

"계약이... 충분해. 이 정도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밀어냈다. 문을 열었다.

"지은, 제발 들어. 난 처음엔 그 일에 연루됐는데, 나중에 피해자들 편에 섰어. 신문엔 그 부분이 안 나왔지만, 경찰 조사에서 증명됐어."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준호가 계속 말했다.

"너를 만났을 때 난 그 모든 걸 뒤로했어. 너는 내 미래였어. 계약이 아니라..."

"나가 뭘 믿어야 해? 넌 거짓말쟁이잖아."

"그건..."

"나가 뭘 어떻게 믿어?"

나는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이 떨렸다.

---

밤 열두 시.

서연이 전화를 걸었다.

"뭐해?"

"자고 있었어."

"거짓말. 너 지금 우는 거 들리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은, 뭐 있어? 뭐가 있는 거야?"

"...준호가."

"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 준호가 연루됐어. 준우가 기사를 보냈어."

전화 너머로 서연의 숨소리가 들렸다.

"지은, 그건..."

"내가 완전히 속았어.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어. 이런 사람을 '거짓 남친'으로 고용했어."

"잠깐, 잠깐. 넌 준호를 모르는 거야? 그게 뭐 하는 말이야?"

"모르는데 뭐해? 계약서에 서명했잖아. 계약. 거래. 그게 다잖아."

"지은."

서연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현실을 직시하는 거지."

"그건 현실이 아니라 판단을 멈추는 거야. 넌 준호가 뭘 했는지도 모르면서, 사진 하나와 신문 헤드라인으로 결론을 내렸어? 기사 본문을 읽어봤어?"

나는 침묵했다.

"지은, 너도 알잖아. 준우가 뭘 하는 사람인데? 그가 왜 너한테 이런 걸 보냈는지 생각해 봤어?"

그건 맞다. 준우는 나를 좋아한다고 자칭하는 남자였고, 동시에 내가 거절한 남자였다. 그리고 루미에르와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의 CEO였다.

"준호와 만나봐. 그 전에 뭔가 결론 내리지 말고."

"이미 늦었어."

"뭐가 늦었어?"

"모든 게."

나는 전화를 끊었다.

---

밤 한 시.

내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전화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도착했다.

'지은, 진짜 들어. 나 처음엔 그 일에 연루됐는데, 나중에 피해자들 편에 섰어. 신문엔 그 부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경찰 조사에서도 증명됐어. 그리고... 너를 만났을 때 난 그 모든 걸 뒤로했어. 너는 내 미래였어. 계약이 아니라 진짜 미래.'

나는 그 문자를 읽었다. 다시 읽었다. 다시 읽었다.

---

밤 두 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준호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너는 내 미래였어.' 그 말이 거짓일까? 내가 뭘 알겠는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사진 하나와 기사 제목만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준호를 내쫓았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갔다.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검색창을 눌렀다. 기사 제목을 입력했다. '계약연애 중개소 사기사건 연루자'.

기사가 떴다. 헤드라인은 명확했다.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화면을 넘겼다. 연루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준호의 이름이 있었다. '강준호(27) 프리랜서'.

내 손이 떨렸다.

기사를 더 읽었다. 그 안에는 준호가 "초기에 중개소 운영에 참여했으나, 피해 사례를 인지한 후 경찰에 자진 신고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경찰의 진술도 있었다. "피의자 강준호는 피해자 보호에 협력했으며, 수사에 성실히 응했다."

내 눈이 멈췄다.

그 아래에는 더 있었다. 다른 기사 링크. '계약연애 중개소 사건, 피해자 보호에 앞장선 증인'. 그 기사의 사진에는 준호가 있었다. 경찰청 앞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내 손이 떨렸다.

준호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너를 만났을 때 난 그 모든 걸 뒤로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일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밤 세 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화를 걸 수도 없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미안해'? 그런 말로 충분할까?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의 이름을 찾았다. 마지막 메시지를 읽었다. '너는 내 미래였어. 계약이 아니라 진짜 미래.'

손가락이 움직였다.

'미안해. 내가 너를 믿지 못했어. 내가 너를 알려고 하지 않았어. 그냥... 미안해.'

그 문자를 쓰고 지웠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밤 네 시.

나는 침대로 돌아갔다. 준호가 앉았던 자리를 만져봤다.

그곳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따뜻함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깨달았다.

밤 다섯 시.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전화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전화가 끝나자마자, 내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루미에르 그룹 CEO 지은, 계약연애 중개소와 연루된 혐의로 수사'

기사 제목이었다.

내 손이 얼었다. 준우가 한 것이다. 내가 준호를 내쫓은 사이, 준우는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준호를 이용해 나를 고립시키고, 지금 내가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호, 이건..."

"지은. 나 지금 가는 중이야."

그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뭐?"

"너한테 가는 중이야. 잠깐만."

전화가 끊겼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창밖을 봤다. 밤이 채 밝아지지 않은 새벽 거리. 그 안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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