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감정의 균열, 신뢰의 시작

루미에르 그룹의 컨퍼런스 룸은 여름 햇빛이 가득했다. 천장 높이의 창문을 통해 서울 강남이 한눈에 들어왔고, 신제품 론칭을 위한 마케팅 팀이 모여 있었다. 나는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CEO님, 이번 라인의 컨셉은 '럭셔리한 일상성'입니다." 마케팅 이사 김태현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프리미엄 가격대를 유지하면서도 타겟층의 공감을 유도하는 전략입니다."

나는 슬라이드를 훑어봤다. 수치, 그래프, 경쟁사 분석. 모두 예상된 것들이었다. 깔끔하고 효율적이고, 감정이 없었다.

"소비자가 이 제품을 샀을 때 느껴야 할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해봐." 내 목소리가 회의실에 떨어졌다.

팀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건 내가 하지 않던 질문이었다.

지난주부터 준호는 내 옆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계약의 일부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CEO의 남친은 중요한 회의에 함께해야 한다고.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기분을 사는 거잖아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이 크림을 얼굴에 펴바를 때 누군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느낌. 그런 감정이 있다면 어떨까요?"

침묵이 흘렀다. 김태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고, 다른 팀원들은 메모를 시작했다.

"감정은 마케팅이 아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우리는 데이터로 움직이는 회사다."

준호는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나는 실망을 읽을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나갔다. 준호도 일어서려 했다.

"잠깐." 내가 말했다.

그는 다시 앉았다. 나는 내 노트북을 켰다. 준호의 블로그 글이 열려 있었다. 어제 밤 11시에 올린 글. 제목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가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느껴야 할 감정을 모르고 산다. 누군가의 손길, 따뜻한 말, 작은 관심. 그런 것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진정한 상품이 아닐까.*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회의 직전에 쓴 글이다. 내 질문을 예상한 건가.

"너 이거 언제 썼어?" 내가 물었다.

"회의 들어가기 전에요." 준호가 대답했다.

"내가 한 질문이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 않았어요?" 준호가 역질문했다. "지은이는 느껴지는 게 없어요?"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의 눈을 피했다. "다시 생각해볼게. 너 제안."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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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이는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남 지역의 고급 카페였고, 내가 선호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 앉았다.

"너 준호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 민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회의 영상 봤어. 너 그 남자 말 들으면서 웃었어. 계약연애 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웠어."

나는 커피를 집어 들었다. "계약일 뿐이야."

"거짓말은 서툴러." 민준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가 가리킨 것은 시계였다. 은색 팔찌형 시계. 준호가 2주 전에 선물한 것.

"이건 계약의 일부야." 나는 말했다.

"그래? 그럼 계약서에 '선물' 항목이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했다.

민준이가 손을 놓았다. "지은, 난 너를 오래 알았어. 넌 절대 거짓말을 잘 못 해. 특히 감정에 관한 거."

"감정은 필요 없어."

"그건 네 신조지, 현실이 아니야." 민준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계약을 연장할 때가 오면, 그때가 진짜 위험한 거야. 너는 계약이라고 생각해도 준호는 다를 수 있어. 그리고 넌 그걸 알면서도 연장하려고 할 거야."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떨리고 있었다. 민준이의 말이 정확했다. 나는 이미 계약 연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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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사무실에서 다음 분기 예산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밖은 검은색이었다.

준호가 들어왔다. 그는 내 책상 옆에 서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일만 해도 되는 거야?" 그가 물었다.

"이게 내 인생이야."

"그게 너무 슬퍼 보여."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을 쳤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슬픔은 사치야." 내가 대답했다.

준호는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그 온기가 나를 타고 올라왔다. 눈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앞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서둘러 손을 빼고 돌아섰다. 의자를 굴려 뒤로 물러났다.

"지은?"

"일이 많아."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봤다. 내가 흘린 눈물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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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 아버지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루미에르 그룹의 회의실로 초대했다. 준호도 함께였다. 아버지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무언가 묵직한 표정이 있었다.

"준호 군." 아버지가 말했다. "딸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준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에요, 이건 계약일 뿐..."

"내가 이 회사를 세울 때 가장 큰 실수가 뭔 줄 알아?" 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내 딸에게 감정은 약함이라고 가르친 거야."

아버지는 내 눈을 찾았다. 그 시선이 나를 관통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지 알아?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 그것보다 강한 게 뭐가 있겠어?"

아버지의 말이 회의실에 울렸다. 나는 그 말을 피할 수 없었다. 내 가슴이 떨렸다.

감정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그 깨달음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감정을 약함으로 취급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완벽한 CEO가 되기 위해. 하지만 준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내가 눈물을 흘렸을 때, 그것이 약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하는 강함이었다면?

아버지는 회의실을 나갔다. 준호는 남았다. 그의 표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버지 말이 맞아?"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어." 나는 대답했다. 진실이었다.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를 신뢰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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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 서연이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책상 앞에 앉지 않고 창문 옆에 섰다. 서울의 야경이 펼쳐진 그곳에서.

"직원 만족도 조사 결과가 나왔어." 서연이가 말했다. 그녀는 태블릿을 내 책상에 놨다. "검토해 봐."

나는 화면을 켰다. 수백 개의 응답.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

*"CEO가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느껴요."*

*"감정 없는 기계 같은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게 아니라 숫자가 되는 기분이에요."*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난주에 마케팅팀 주임이 그만뒀어." 서연이가 계속했다. "루미에르를 떠났어. 이유를 물었더니 CEO가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어."

그 말이 가슴을 쳤다. 내가 직원들을 데이터처럼 취급했다는 뜻이었다.

"너 처음엔 달랐어." 서연이가 말했다. "대학교 때 기억나? 넌 사람을 잘 챙기고, 웃음도 많고... 그땐 진짜 따뜻했어."

"그건 옛날이야."

"왜? 언제부터 감정을 끄기로 했어?"

나는 시계를 집었다. 준호가 선물한 시계였다. 손가락이 그것을 자꾸만 만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언제부터 사람을 숫자로 보기 시작했을까. 직원들을 효율성으로만 평가하기 시작했을까. 준호가 회의에서 한 말처럼,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감정을 사는 것이라면, 직원들도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소속감을 원하는 건 아닐까.

"내일부터 바꿔야겠다." 나는 중얼거렸다.

"뭘?"

"회의 방식.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을 사람으로 대해야 해." 나는 태블릿을 들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경영 방식을 재구성할 거야. 먼저 각 팀 리더들과 개별 면담을 시작하자."

서연이가 놀라 입을 벌렸다. "정말?"

"응. 내가 뭘 잘못했는지 직접 들어야겠어."

서연이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넌 진짜 준호를 좋아하는 거 맞지?"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 먼저 내가 상처 준 사람들에게 제대로 마주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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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나는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후 3시, 한강공원 벤치에서 만나자. 진짜 얘기를 하고 싶어. 계약 없이."

메시지를 보낸 후, 나는 한참을 화면을 바라봤다. 그의 답장을 기다렸다.

10분. 20분. 30분.

그의 답장이 왔다.

"알겠어요."

단 세 글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내일 그 벤치에서, 우리는 더 이상 거짓으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만 개의 불빛.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거짓과 진실이 뒤엉킨 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거짓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CEO님." 경비팀장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뉴스 확인하셨어요?"

나는 노트북을 켰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

*"루미에르 그룹, 불법 하청계약 적발... 직원 착취 의혹"*

기사의 출처는 명확했다. 유진이었다.

내일 벤치에서의 만남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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