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요일 밤 11시 47분
옥상은 고요했다.
할머니와 한서준, 박소영, 한미영, 준호가 모두 내려간 후 나는 혼자 남겨졌다. 새싹이 돋아난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축축한 흙을 톡톡 쳤다. 생명이 깨어나는 느낌. 그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옆 화분들을 둘러봤다. 병충해로 손상된 잎들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죽어가던 식물들을 살린 내 손이 이번엔 막혔다. 한서준이 말했다. 약을 뿌리고 환기를 하고 햇빛을 조절하면 된다고. 과학이었다. 기적이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뭔가 자꾸만 떨렸다.
내 손의 기적이 모든 생명을 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충해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내 손은 죽어가는 생명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지만, 질병을 막지는 못했다.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밤거리의 불빛들. 저 아래 누군가의 집들, 누군가의 삶들, 누군가의 밤들. 나는 9년을 그 위에서 살았다. 같은 책상, 같은 의자, 같은 천장.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정원이 생겼다. 죽어가는 정원.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공간. 내 손이 닿자 살아났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였다.
할머니의 웃음소리. 준호의 "우리 함께 할 수 있어?"라는 질문. 박소영의 눈물. 한서준의 조용한 옆자리. 한미영의 "고마워요, 유진아"라는 인사.
나는 이들을 살렸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겨진 이 옥상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살린 건 정원이 아니었다.
**첫 번째 깨달음.** 손을 펼쳤다. 보통의 손이었다. 어떤 기적도 담고 있지 않은. 단지 흙을 만질 수 있고, 물을 줄 수 있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손. 그런데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9년을 돌이켜봤다. 같은 책상에 앉아 있던 나. 퇴근 후 혼자 밥을 먹던 나. 휴일에 집 안에만 있던 나. 누군가와 깊이 있는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왜?
두려웠다. 상처받을까봐. 거절당할까봐. 내가 충분하지 않을까봐.
그래서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았다. 누군가를 신뢰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거절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원을 가꾸면서 그것을 반복했다.
병충해가 났을 때 청원 활동을 중단하라고 사람들을 밀어냈다. 박소영의 눈이 흔들렸다. 한미영의 입술이 굳어졌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혼자가 되고 싶었다. 혼자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니까.
눈물이 났다.
처음이었다. 9년 동안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는데. 옥상에 서서 밤하늘을 보면서 처음으로 울었다. 내 외로움이, 내 미안함이, 내 상실감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두 번째 깨달음.** 나는 정원을 지키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나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깨달음이 가슴을 짓누렀다. 숨이 차올랐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축축한 흙 위에 손을 내려놨다. 온기가 있었다. 생명이 있었다.
**세 번째 깨달음.** 내 손이 아니어도 생명은 자라났다.
할머니가 옥상에 올라와 노란 장갑을 끼고 흙을 파던 모습. 한서준이 살충제를 뿌리며 "이렇게 하면 된다"고 설명하던 모습. 박소영이 물 줄통을 들고 꾸준히 물을 주던 모습. 한미영이 삽으로 흙을 고르던 모습. 준호가 작은 손으로 새싹을 만지며 웃던 모습.
우리가 함께 했을 때 정원은 살아났다. 그게 기적이었다. 그게 치유였다. 내 혼자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옥상 문이 열렸다. 김재하였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삽과 그 같은 것들이었다. 정원을 정리할 도구들. 그의 얼굴은 결연했다.
"이제 정원을 정리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딱딱했다. 규정대로였다. 규칙대로였다. 완벽했다.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봤다.
"당신도 혼자셨군요."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삽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다시 잡았다. 손가락이 삽의 손잡이를 몇 번 주저하며 조였다.
"뭐라고?"
목소리가 작았다.
"당신도 혼자가 되고 싶으셨던 거 아닐까요. 규정만 지키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니까. 완벽하게 규칙을 지키면 아무도 날 비난할 수 없으니까."
그의 얼굴이 경직됐다. 눈빛이 흔들렸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9년을 봤다. 혹은 그 이상. 관리실에 앉아 규정을 들고 주민들을 통제하는 그 사람의 혼자됨.
"당신도 누군가가 돌봐줬으면 했던 거 아닐까요."
김재하가 옥상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삽을 바닥에 내려놨다. 손이 여전히 삽 위에 머물렀다. 저 아래로 보이는 건 아파트 단지, 도로, 그리고 건물 숲이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옥상을 스쳐갔다.
"남편을 잃은 지 이제 15년이 됩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거의 중얼거리는 듯했다.
"혼자가 되니까 건물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싶었어요. 혼자인 것도 힘든데 건물까지 망가질 수는 없다고. 그래서 모든 규정을 지키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어요."
그가 돌아봤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어깨가 조금 구부러져 있었다.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당신의 정원을 보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는 한참을 말 없이 정원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무너뜨리려던 것을 다시 보는 것처럼.
"정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규정을 어기는 것도 싫었고, 누군가 다치면 책임져야 하니까. 하지만 그건 핑계였어요. 정말은..."
그가 멈췄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정말은 제 마음이 죽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요. 15년을 규정으로만 살아왔는데, 당신이 이 정원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걸 보니까... 제가 뭘 잃어버렸는지 보이는 거였어요."
나는 일어섰다. 천천히.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거친 손이었다. 노동의 흔적이 있었다. 내 손과 비슷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건물주는 재검토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말의 끝이 더 이상 규정처럼 들리지 않았다.
"옥상 정원의 구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대요. 보강 공사를 하면. 저는 건물주님께 직접 전화했어요. 규정을 들고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 정원이 왜 필요한지 설명했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맺혔다.
"왜 지금까지..."
나는 묻지 못했다. 왜 규정만 들고 나타났는가. 왜 미안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김재하가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제가 규정을 들고 다니는 이유를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하면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완벽하게 규칙을 지키고 완벽하게 건물을 관리하면, 누군가는 나를 필요로 할 거라고."
그가 정원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당신을 보니까 알겠어요.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요. 식물들도 죽고, 병충해가 생기고, 계절이 바뀌면서 시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정원을 떠나지 않아요. 오히려 더 자주 와요."
그가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본 김재하 중에 가장 약해 보였다.
"왜냐하면 여기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여기가 자기들처럼 부러져 있으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한 번 더 숨을 쉬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올라오려는 사람처럼.
"저는 15년을 완벽하게 살아왔어요.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규정만 지켜왔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어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눈물이 흘렀다. 그의 뺨을 타고. 그는 손등으로 닦지 않았다. 그냥 흘리게 놔뒀다.
"당신이 한 말이 맞아요. 나도 혼자였어요.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내가 먼저였다. 손가락을 맞닿게 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천천히 내 손을 잡아 돌렸다.
"우리 함께 정원을 키워요. 완벽하지 않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규정으로 가득 차 있던 눈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한 눈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
"완벽하지 않게?"
"네. 식물들이 죽을 수도 있고, 계절이 바뀌면서 시들 수도 있고,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거 아닐까요."
옥상에 바람이 불었다. 한두 장의 잎사귀가 떨어졌다. 계절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당신은 왜..."
김재하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왜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도 이 정원이 필요하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느꼈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옥상 위에서. 정원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완벽하지 않은 그 자리에서. 바람이 우리를 스쳐갔다. 그의 어깨가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이거... 이게 무슨 일이에요?"
김재하가 물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나도 대답했다. 진실로.
"하지만 괜찮아요. 몰라도.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옥상 한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강한 바람이었다. 계절이 확실히 바뀌고 있었다. 봄의 따뜻함이 물러나고, 무언가 서늘한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옥상 문이 열렸다. 한미영과 준호였다.
"할머니가 당신이 혼자일 거 같다고 했어. 그래서 왔어."
준호의 목소리가 맑았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찾았다. 따뜻했다.
한미영이 나를 안았다. 꼬옥. 그리고 김재하를 안았다. 그리고 준호가 우리를 모두 안았다. 작은 팔로.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옥상 위에서. 정원 한가운데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있어."
준호가 말했다.
"지금 이렇게 함께 있는 거야."
한미영이 나를 바라봤다. 걱정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뭔가 다른 감정이 채워지고 있었다.
"내일부터 뭘 해야 할까요?"
김재하가 물었다. 여전히 한미영과 준호를 안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이 사라질까봐 두려운 듯이.
"함께 정원을 정리해요. 가을을 위해서. 겨울을 위해서."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봄을 기다려요."
"봄을요?"
"네. 우리가 함께 맞이할 봄을."
한미영과 준호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미영이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 회사에 가야 한다고. 준호는 "할머니한테 인사하고 와야 해"라고 말했다. 옥상 문이 닫혔다.
남겨진 건 나와 김재하였다.
그리고 정원.
옥상은 저물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정원의 식물들은 저녁 해를 받고 있었다. 마지막 빛을 받고 있었다.
"이유진 씨."
김재하가 불렀다.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규정 없이.
"네?"
"고마워요."
그 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함께 흙을 만졌다. 아직도 따뜻한 흙이었다.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손과 내 손이 같은 화분 위에서 만났다.
옥상 문이 다시 열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올 것이었나. 아니면 한서준이.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이 바람에 흔들렸을 뿐이었다.
김재하가 내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내일은요?"
"내일 아침, 할머니가 올 거예요."
"그 다음은?"
"한서준이. 박소영도. 한미영도, 준호도."
"모두가?"
"네. 모두가 함께."
김재하는 한참을 말 없이 정원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저녁빛에 물들고 있었다.
"건물주가 정말 허락할까요?"
목소리가 작았다.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건물주가 재검토하기로 한 건 이미 결정된 거예요. 하지만..."
나는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을 봤다.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정원을 지키기로 결심했다는 거예요. 규정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했다는 거."
그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이 조금 올라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옥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옥상. 우리는 어둠 속에서 정원을 만지고 있었다. 흙의 온기만으로 서로를 느끼며.
"혹시..."
김재하가 말을 시작했다. 멈췄다. 다시 시작했다.
"혹시 이게 다시 없어질까요?"
"뭐가요?"
"이 순간. 이 느낌. 당신. 정원. 모든 게."
나는 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모르겠어요. 계절이 바뀌니까. 식물들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싸울 수도 있으니까."
"그럼..."
"그래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옥상의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스위치를 켠 것 같았다. 아니면 자동 센서가 작동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옥상이 밝아졌다.
우리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내일 아침에 봬요."
김재하가 말했다.
"네. 내일 아침에."
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이 내 손을 스쳤다. 그리고 옥상 문으로 향했다.
"이유진 씨."
다시 불렀다.
"네?"
"저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옥상 문을 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옥상에서.
정원 한가운데서.
밝혀진 불빛 아래에서.
하지만 이번엔 다른 혼자였다. 완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본 혼자.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혼자. 누군가와 손을 잡은 후의 혼자.
나는 정원의 모든 화분을 한 번씩 돌며 만졌다. 각각의 식물들. 각각의 흙. 각각의 생명.
내일 아침, 할머니가 올 것이었다. 노란 장갑을 끼고.
그 다음날, 한서준이 올 것이었다. 살충제를 들고.
박소영도, 한미영도, 준호도. 그리고 김재하도. 모두가 함께 정원을 맞이할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게.
흙을 묻히며.
계절을 함께하며.
그렇게 우리는 정원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정원과 함께 자라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이 정원이 나한테 가르쳐준 것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