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계절, 우리는 정원사였다 - 4화
금요일 저녁, 옥상 계단 입구에 자물쇠가 생겼다.
새로 단 것 같은 은색 자물쇠. 내가 어제 올라올 때는 없던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차갑고 묵직했다. 아직 열려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채웠을 리 없다.
손이 떨렸다.
숨이 얕아졌다.
이것은 메시지였다. 명확한 메시지. 내일부터는 여기가 너의 공간이 아니라고.
옥상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정원은 여전히 초록이었다. 지난주보다 더 무성했다. 할머니가 가져온 흙에 심은 민트가 손가락 두 마디까지 자랐고, 준호가 물을 준 나팔꽃들은 연분홍 꽃을 터뜨리고 있었다. 한서준이 지난 수요일 옮겨 심은 선인장도 살아있었다. 모두가 내 손을 거쳐 살아난 것들이었다.
그런데 자물쇠는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
핸드폰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여보, 지금 올라올 수 있어? 오늘따라 할 일이 많아서."
목소리가 밝았다. 할머니는 이제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식물들을 물 주고, 죽은 잎을 따고, 새 흙을 고르는 일들. 9년을 같은 자리에서 반복했던 내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감을 가진 일들이었다.
"할머니, 자물쇠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할머니의 숨이 잠깐 멈췄다.
"그 관리자?"
"응. 어제 없던 자물쇠가 오늘 생겼어."
"그 사람, 진짜..." 할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30분 있으니까 올라가. 준호와 서준이, 영숙이 딸도 연락했는데 다들 올 거야. 토요일이니까."
자물쇠가 내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것을 밀어낼 만큼 따뜻했다.
"알았어. 올라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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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제일 먼저 나타났다. 엄마 손을 놓고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요즘 준호는 학교에서도 달라졌다고 했다. 엄마가 말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나 내일 학교에서 식물 기르는 거 발표하고 싶어"라고 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한미영의 눈빛이 바뀌었다. 오랫동안 자식에게 줄 수 없었던 무언가를 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나! 봤어? 민트 이렇게 났어!" 준호가 내 손을 잡고 흙 위로 튀어나온 초록 줄기들을 가리켰다. 손가락 마디마다 작은 잎들이 오글거리고 있었다.
"응, 봤어. 넌 물을 참 잘 줬구나."
"그런데 누나는 왜 물을 주면 더 잘 자라?"
내 손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이 질문에 아직 답을 모르고 있었다.
"글쎄... 그냥 그런 거 아닐까? 누군가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식물한테는 물처럼 필요한 거."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설명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누군가가 이곳에서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미영이 따라 올라왔다. 손에는 쌀을 들고 있었다.
"준호가 자꾸 '엄마도 옥상에서 밥 먹고 싶다'고 해서 주먹밥을 만들어 왔어요. 괜찮으면 함께..."
"좋지." 내가 말했다. "다들 올 거니까."
박소영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요즘 박소영은 정원에 올 때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세상을 본다. SNS에 올릴 사진들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서준은 박소영이 카메라를 들 때마다 자리를 약간 옆으로 물린다. 완벽한 구도에서 빠지려는 듯이.
할머니가 올라왔다. 손에는 상추 모종이 들려 있었다.
"상추 같은 건 쉽거든. 금방 자라고, 맛도 있고. 먹으면서 자라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어. 남편이 상추를 제일 좋아했어."
할머니는 이제 남편 이야기를 할 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말했다. 마치 그가 여기 있는 것처럼. 옥상에서, 내 손을 거쳐 살아난 식물들 속에서.
한서준이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그는 항상 조용히 들어온다. 마치 자기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회사에서 10년을 같은 자리에서 보냈다고 했다. 내가 9년을 견뎌온 자리. 그는 10년을 그곳에서 더 견디고 있었다.
"자, 다 모였네." 한미영이 쌀밥을 펼쳤다. 옥상 한쪽에 수건을 깔고, 주먹밥들을 나열했다. 소박했다. 완벽하지 않았다. 밥알이 여기저기 흘렀고, 김이 제대로 감싸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었다.
우리가 함께 밥을 먹은 것이.
"여기 앉아요." 준호가 내 손을 잡고 앉혔다. 할머니는 내 옆에, 한미영은 준호 옆에 앉았다. 박소영은 사진을 몇 장 찍은 후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앉았다. 한서준은 가장자리에 앉았다. 항상 가장자리에.
주먹밥을 집어들었다. 따뜻했다. 한미영의 손에서 나온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밥을 씹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건 치유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내가 식물에 물을 주면 그것들이 자란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면서 나는 더 깊어진다. 그들의 뿌리처럼, 내 감정도 흙 속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 밥을 먹고 있는 지금, 나는 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느낄 수 있다.
"누나, 이거 맛있어?" 준호가 물었다.
"응. 엄마가 잘 만들었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밥이 더 맛있어."
한미영이 웃었다. 그 웃음은 진짜였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밥주먹이라도, 그것이 아이에게 맛있다고 들을 수 있다는 것. 한미영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할머니는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눈가가 축축했다.
"뭐 해?" 박소영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니지. 그냥..." 할머니가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죽을 때까지 혼자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같이 밥 먹을 날이 올 줄은."
한서준이 밥을 씹다가 멈췄다. 그의 눈이 옥상의 식물들을 훑고 지나갔다.
"이곳에서만 자신이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어요. 어제 저희 회의실에서 그 말이 자꾸 떠올랐어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사람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전 없었거든요."
내가 한서준의 얼굴을 봤다. 30대 초반의 남자. 겉으로는 능숙해 보이지만, 그 뒤에는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내 손처럼.
"저도 없었어." 내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달라."
한미영이 내게 물었다. 그 질문은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 잘 돌봐요? 식물도, 우리도. 당신 같은 사람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나를 봤다. 내가 그들을 돌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내가 죽어가는 정원에 물을 주면서, 나 자신의 황폐함을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오면서, 내 감정은 더 깊어졌다.
"그냥... 누군가 신경 쓰는 것 같았어. 이 정원이. 그래서 물을 줬어. 그뿐이야."
박소영이 카메라를 들었다. 우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찍고 있었다. 렌즈 너머의 세상. 그녀는 그곳에서만 안전했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 내가 보고 있었다. 그녀가 카메라 뒤에 숨는 것을. 나중에 SNS에는 '#완벽한힐링공간' 따위의 해시태그가 붙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의 뒤에는 할머니의 눈물이 있고, 한서준의 깊은 한숨이 있고, 내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는 빨랐다. 누군가 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마의 손이 아이의 어깨에 놓였다.
김재하 관리자가 옥상 문을 밀고 들어왔다.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단했다.
"다들 내려가야 합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부터 이 공간은 통제 대상입니다. 건물 구조상 문제가 있다는 건축학자의 진단이 나왔어요. 옥상에 추가 무게를 실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 심장이 멎었다. 건축학자. 진단. 그것은 내가 거짓말로 막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김재하가 나를 봤다. "이 정원은 허가 없이 만들어진 시설입니다. 내일 아침 철거 절차가 시작됩니다."
"잠깐, 그게 무슨..."
할머니가 일어섰다. 하지만 김재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내게만 눈빛을 남겼다. 그 눈빛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책임감이 더 강했다.
준호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누나... 내일은?"
내일은.
내일부터는 이 정원이 없다. 내일부터는 할머니가 올 곳이 없다. 남편의 흔적을 찾을 곳이 없다. 준호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낄 곳이 없다. 한서준이 자신이 사람 같은 기분을 드는 곳이 없다. 한미영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생각했다. 관리자에게 빌기? 법적인 대항? 건축학자의 진단을 무시하기? 모두 불가능했다. 나는 다만 이 정원을 기른 사람일 뿐, 이 건물의 주인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내 옆에 섰다.
"내일도 와야겠네. 사진을 남겨두고 싶어. 우리가 여기서 있었다는 증거를."
박소영이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엔 SNS를 위한 사진이 아니었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
한서준이 말했다. 10년을 조용히 회사 자리에서 버틴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강해졌다.
"어떻게?"
내가 물었다.
"모른다. 하지만 이 정원이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는 이것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김재하가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굽어 있었다. 책임감의 무게로.
옥상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식물들은 계속 자라고 있었다. 내 손을 거쳐 살아난 것들. 그들은 내일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오늘 햇빛을 받고, 오늘 물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내 손에는 준호의 손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따뜻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아이의 손.
이 싸움이 얼마나 크고 깊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일 이 자물쇠를 열 사람은 나여야 한다는 것.
손가락이 자물쇠를 감싸고 있었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 그것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이 손이 죽어가는 정원을 살려냈다. 이 손이 준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손이 할머니의 슬픔을 덜어주었다. 이 손이라면, 이 자물쇠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그 계절, 우리는 정원사였다 - 5화
월요일 아침, 나는 옥상 문 앞에 서 있었다.
새로운 자물쇠는 회색이었다. 금요일의 은색보다 더 무겁고 단단해 보였다. 관리실에서 밤새 단 것이리라. 내 손이 닿아도 살아나지 않을 물질이었다.
할머니가 계단에서 나타났다. 새벽 여섯 시의 낡은 운동화를 신은 채로. 그 얼굴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자물쇠가 새로 달렸네요?"
"네. 어제 저녁에..."
"내가 알았어. 재하 그 아이가 왔어. 관리실에서 일하는 거 봤어. 표정이 별로 좋지 않더만."
최영숙 할머니는 자물쇠를 한참 바라봤다. 그 손가락이 차갑게 식은 금속을 따라 움직였다.
"이거 따는 방법이 있을까?"
"할머니, 그건..."
"아, 내가 따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생각해본 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그 말이 가슴을 저렸다. 나는 자물쇠 옆에 메모를 남겼다. 손글씨로. 떨리는 손으로.
'관리자님께. 이 정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말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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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 회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인사과 메일이 와 있었다. 휴직 승인. 나는 그것을 읽고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내 이름으로 휴직을 신청해두었을 것이다. 한서준이거나 박소영이거나. 아니면 할머니일지도.
사무실 동료들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야, 갑자기 휴직이라고? 조직 생활 이래 처음 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챙겼다. 아홉 해 동안 앉아만 있던 자리. 그것을 떠나가며 처음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홀가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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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오전,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한미영과 준호를 만났다.
"누나, 엄마가 왔어."
준호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밝음이 더욱 아팠다.
한미영은 자물쇠를 봤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혹시 따는 방법을 알아봤어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해보자. 함께."
그 말이 간단해 보였지만 복잡했다. 혼자 짊어지려던 것을 누군가가 함께 짊어진다는 것. 그것은 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옥상 문 앞에서 한미영은 자물쇠를 자세히 살펴봤다.
"건축학자의 진단이라고 했는데... 혹시 다시 진단받을 수는 없을까요?"
"법적 절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나요?"
"모르겠습니다."
한미영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자물쇠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뚫어질 듯이.
"우리가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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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 한서준이 자물쇠 앞에 섰다.
그는 건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혹시 방법이 있을까 하고 한 시간을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이건 관리사의 정식 절차야. 우리가 따면 기물 파괴죄야."
"그럼..."
"판사의 가처분 신청? 건축학자의 재진단? 주민 청원서? 모두 시간이 걸려."
"얼마나?"
"길면 한 달. 짧으면 이 주. 그 사이에 철거가 될 수도 있어."
한서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10년을 회사에서 버텨온 남자도 이 상황 앞에서는 무기력해 보였다.
"청원서라는 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것도 희망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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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전, 박소영이 자물쇠 사진을 찍었다.
SNS용이 아니었다. 그냥 기록이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 사진을 언론에 보낼 수 있을까요?"
"뭐라고?"
"'도시의 작은 정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요. 뉴스 제작사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가 이런 휴먼스토리를 좋아해."
박소영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SNS 셀카 때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진정한 것의 떨림.
"괜찮을까요?"
"시도해봐. 최악의 경우 실패야.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박소영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나를 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는 이 정원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해. 그것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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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김재하 관리자가 옥상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물쇠를 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봤다. 그리고 내 메모를 읽었다. 내 손글씨를 따라 읽으며 그의 얼굴이 변했다.
"이거... 누가 썼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이런 건 하지 마세요. 규정 위반이 아니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해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나를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었다. 그 말 속에는 '제발 나를 이 입장에 두지 마'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미안해요. 건축학자의 진단이 나온 이상,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건물주도 이건 따를 수 없어. 법적인 문제가 돼."
"법적인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김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 그것은 회사 업무로 인한 한숨이 아니었다.
"아이들 때문에 이러는 거죠?"
"네?"
"저도 아이가 둘 있어요. 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 가는 아이들. 이 아파트에 사는 애들이지. 그 아이들이 이 정원에 자주 와요. 엄마 친구들이 말해. 애들이 처음으로 학교 말고 다른 곳에서 친구들을 만난다고."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미안해. 이 정원이 필요하다는 거 알아. 근데 내가 지킬 수 없게 돼 있어. 규정이라는 게..."
"규정이 모든 걸 정하나요?"
"아니지. 규정 뒤에는 사람이 있어. 건물주도 사람이고, 이사회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규정을 숨으로 삼고 있는 거야. 그게 우리 일이니까."
김재하는 자물쇠를 다시 봤다.
"혹시 주민 청원서를 모아본 생각은?"
"청원서요?"
"네. 이 정원이 필요한 주민들이 서명하면, 이사회에 상정할 수 있어.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도덕적 압박은 있어. 충분하면 건물주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요?"
"다만 기한이 있어. 철거 예정일이 2주일 후야. 그 전까지 충분한 서명을 모아야 돼. 전체 주민의 30% 이상. 이 아파트가 120가구니까... 36가구?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모으기도 쉽지 않지."
2주일. 36가구.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이 정원에서는 자라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 미안해. 정말."
김재하는 자물쇠를 열지 않은 채로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작아 보였다. 규정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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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옥상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청원서를 만들고 있었다. 손글씨로. 또박또박한 글씨로. 그 옆에는 한서준이 청원서의 법적 형식을 확인하고 있었고, 박소영은 이미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제출했다고 했다. 한미영은 준호와 함께 아파트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봤다. 정원 위에 모인 사람들. 내가 물을 주기 시작한 지 2주일 만에 이렇게 됐다. 이것도 골든핑거의 결과일까. 아니면 이미 그들 안에 있던 것을 내 손이 깨어나게 한 걸까.
"누나, 봐."
준호가 나를 불렀다. 손에는 청원서의 사본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써야 할 이름이 이 정도야."
36개의 네모. 36개의 빈칸. 그것을 채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부터 싸움이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워요?"
"솔직하게. 우리가 왜 이 정원이 필요한지, 왜 이 공간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그걸 이웃에게 말하는 거야. 그게 싸움이야. 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말로.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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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우리는 아파트 3동 1층부터 시작했다.
할머니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세요?"
"안녕하세요. 저 옥상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잠깐 말씀을 좀..."
문이 열렸다. 50대 여성이 나타났다.
"정원이요? 아, 그 옥상의? 우리 아들이 자꾸 거기 간대요."
"네. 그 정원이 철거될 위기에 있어서요. 주민 청원서에 서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뭐, 좋지. 이런 것도 있어야지."
펜을 들었다. 이름이 써졌다.
한 가구. 또 한 가구.
화요일 오후, 우리는 8개의 서명을 얻었다. 28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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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전, 박소영의 언론 보도가 나왔다.
작은 뉴스였다. 메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했다.
'도시 외곽 낡은 아파트의 옥상에 기적이 있다'는 제목으로.
'한 젊은 여성이 혼자 가꾼 정원이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제 그 정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마무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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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전, 초인종이 울렸다. 할머니 집으로.
"청원서요? 아, 그거 들었어. 뉴스에 나왔잖아."
손가락이 펜을 들었다.
이름이 써졌다.
금요일 오전, 우리는 20개가 더 모였다고 했다. 총 28개. 아직 8개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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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옥상은 조용했다. 우리 모두 지쳐 있었다.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만 있었고, 한서준은 자물쇠를 바라보고 있었고, 박소영은 사진을 찍지 않고 있었다.
"안 될까?"
준호가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모르겠어. 아직 하루가 남았어."
준호는 내 손을 잡았다. 한 주일 전 그 손과 같은 온기였다. 하지만 이제 그 손에는 절망이 섞여 있었다.
그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을 봤다. 9년간 봐온 천장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천장. 하지만 내 마음은 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팠다.
손가락이 떨렸다. 자물쇠를 열 수 없는 손. 주민들을 설득할 수 없는 입. 이 정원을 지킬 수 없는 나.
나는 천장을 응시했다.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8개의 서명. 8개의 이름. 그것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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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자물쇠 앞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관리자 김재하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더 높은 위치의 사람.
그 사람은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청원서를 이사회에 보냈어. 28개 서명. 부족했지만, 뉴스 때문에 건물주가 생각을 바꿨어. 일단 철거를 미루기로 했어. 조건부로 안전 진단을 다시 하기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정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 그게 맞는 것 같아. 이사회도 그렇게 봤어. 그래서..."
자물쇠가 풀렸다.
옥상에 햇빛이 들어왔다. 그 빛 속에서 식물들이 반짝였다. 2주일 동안 자라난 것들. 내 손을 거쳐 살아난 것들. 그들은 자물쇠가 풀렸는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오늘도 햇빛을 받고 있을 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올라왔다. 그 뒤로 한미영과 준호, 한서준, 박소영이 따라왔다.
"자물쇠가?"
할머니가 물었다.
"풀렸어요."
"정말?"
"네."
옥상은 다시 우리의 정원이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의 정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물을 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 기쁨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계절은 계속 바뀔 것이고, 식물들은 계속 시들 것이고, 우리도 계속 상처받을 것이었다.
그것이 정원의 진실이었다. 아름다움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
"누나, 웃어."
준호가 말했다.
"지금이 좋은 날이잖아."
나는 웃었다. 그것이 가장 힘든 웃음이었다. 기쁨과 슬픔이 섞인 웃음. 살아있다는 증거로서의 웃음.
할머니가 내 옆에 섰다.
"너도 힘들겠지. 이 정원도 결국은..."
"모두 시든다는 거죠."
"그래. 모두 시든다. 그래도 우리는 또 다시 물을 줄 거야. 내년 봄에도, 그 다음 봄에도. 그게 정원사의 일이야."
정원사. 나는 정원사였다. 9년을 같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 정원사가 되었다.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풀리지 않았다. 건축학자의 재진단이 남아 있었다. 만약 그것이 부정적으로 나온다면? 우리의 정원은 다시 위협받을 것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은 자물쇠가 풀렸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옥상에서 우리는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가져온 주먹밥. 한미영이 만든 계란말이. 박소영이 준 과자. 한서준이 마련한 음료. 모두 함께 앉아서, 옥상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공동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